2013. 12. 15.

2013. 11. 12.

어떤 노래


   초등학교 졸업 후 이듬해였나. 몇 명의 동창생과 그의 어머니들이 한 식당에 모였다. 이따금 엄마들끼리만 따로 만남을 가져온 티가 확연한 모임이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흘끔거리며, 지금 둘러 앉은 우리의 이 조합이 얼마나 어색한지를 저마다 헤아려보고 있었다. 엄마들의 높은 톤, 바쁜 수다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아이들은 그만큼의 바쁜 젓가락질을 그러나 조용히 해댔다.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한 어른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 우리 손엔 만원씩이 쥐어졌다. 엄마들은 저만치 커피 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거리에 남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끔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 집에나 갈까. 모든 게 괜한 시간낭비 같았다. (잘하면 만원이 공돈 되겠는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또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우리 노래방 안 갈래?”

   돌아 보니 신 모양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짐짓 웃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놀란 얼굴을 했다. 노래방이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노래방 아니면 영화관이었다. 중1짜리 아파트 촌 아이들이 달리 무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 애가 그렇게 맹랑해서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 애는 그래서는 안 됐다. 학교를 무슨 수녀원 다니듯 늘 조용하고 엄숙했던 아이였으니까. (그걸 섹시하게 여긴 녀석들도 더러 있었지만.) 더구나 저 여유에 찬 미소라니.
  그런데 다들 순순히 동의의 눈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색함과 무료함을 일거에 퇴치해 준 구세주의 등장이 반가운 모양들이었다. 한 자리로 주섬주섬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신모양은 머뭇거림도 없이 앞장을 섰다. 잠깐을 바라보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깔끔한 공기,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책 장을 넘기는 손들만 저마다 바빴다. 순식간에 예약 번호가 쌓여갔다. 나는 괜시리 음료수를 홀짝대며 어서 내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오늘이 그간 연마해 온 김민종의 찢기 창법을 공개할 시간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연습한대로 불렀다. (그랬으므로 당연히) 환호 내지는 감탄의 얼굴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뜻밖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몇몇의 비웃는 얼굴들이 언뜻 감은 눈 사이로 비쳤다. 나머지 녀석들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노래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예약번호를 찍고 있었다. (아, 한 놈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잘못 본 건 아닐까. 그 채로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만 싶었다.
  굴욕감에 한동안 젖어 있어야 했다.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그러느라 신 모양의 차례가 온 줄도 몰랐다. 누군가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고 있었다. 저 애는 과연 무슨 노래를 부를까. 그것만이 (내 노래 다음으로) 기실 이 시간의 유일한 흥미거리일 것이었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아니라면 달리 무얼지, 사뭇 기대가 되던 참이었다.
 장필순의 [방랑자]. 그게 그 애의 선곡이었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제목만으로 충분히 우스웠다. 방랑과는 제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이가 하필 고른 노래라니.

  그러나 첫소절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멈칫했다. 어수선했던 방 안의 기운도 일순 차분히 가라 앉았다. 뭐지 이건. 아이들은 저마다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 되어갔다. 그 애의 목소리만이 흡사 진공상태처럼 되어버린 방 안을 홀로 채워 나갔다.
  들을수록 묘한 목소리였다. 그건 노래라기 보다 읊조림에 가까웠다. 온 몸의 힘을 다 뺀 채로 무심하게, 그러나 뭔가 아주 중요한 진실을 전하려는 듯한 목소리. 차라리 어딘가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사람의 단말마래도 좋았다. 떨어질 듯 간신히 호흡이 이어졌다. 호흡과 휴식 사이, 다시 호흡과 음성 사이에 무언가 아주 깊고 거대한 것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듣는 내내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신 모양은 그 뒤로도 몇 곡을 (더 불렀지만 내 기억에는 방랑자만 남아있다) 모두 이렇게 불렀다. 한 곡 한 곡이 끝나고 마이크를 내려 놓을 때마다, 무거운 전율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 애가 새롭게 보였다. 제 삶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사람 같았다. 불현듯 아까 밖에서 당돌했던 그 애의 얼굴이 생각났다. 표정에 베어있던 묘한 오만함. 그건 아마 ‘이제까지 너희가 알던 나는 잘못이고, 곧 진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일 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 얼마나 따분하다는 눈으로 그 애를 바라 봤을까. 그 모든 시선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 나중에 커서 뭐 할꺼니. 나? 가수가 되고 싶어. 가수? 정말? 응. 가수할거야. 난 노래 잘하는 가수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가수가 될 거야. 정말? 노래를 잘 못해도 가수가 될 수 있어? 그럼. 물론이야. 마음 속 깊은 것만 전해지면 돼.
  이 영특한 소녀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전에 모르던 모습을 발견한 날, 공교롭게도 그건 그 애의 마지막 얼굴이 되었다. 바라던 가수가 되었는지 아닌지 이후 그 애의 소식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언젠가 호기심에 몇 번 검색질을 해봤지만 곧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게 마주하는 건 어쩐지 두려운 일이었다. 나름 나도 열심히 음악을 들으며 사니 언젠가 때가 되면 인연이 닿을 것이고, 아니어도 그 애는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이었다. 그날 그 노래의 무심함처럼.

   어떤 노래는 단 한번으로도 누군가의 귓가에 평생 맴돈다. 내게는 어릴적 고수부지 뚝방에서 할아버지가 부르던 취한 노래가 그랬고, 벌거벗은 내 몸을 씻기며 엄마가 부르던 허밍소리가 그랬고, 그리고 그 날 그 아이의 노래가 그랬다. 이 노래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한 소절 듣는 것만으로도 탁하고 마음이 내려앉는 그런 목소리를 가질 순 없을까. 글쎄 나는 한참 먼 것 같다. (2013)

2013. 11. 8.

천명관의 글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
                                           
                                                                         - 천명관, [고래]중에서

2013. 10. 17.

어떤 불가피함


그게 그 사람이 존재의 불안과 세계와의 불화에 대응하는 방식일테다. 달리 살아왔으므로 내 눈엔 거슬려보이는 게 어쩔 수 없겠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말할 일도 아닌 것이다. 내가 무슨 노자도 아니고 마호메트도 아닌데 화도 나고 욕도 해주고 싶을 때야 물론 있겠지. 그럴 땐 정 참을 수 없을만큼 기다렸다 사이다처럼 쏴주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큰 품의 연민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저 이도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다보니 불가피하게 저리 되어버렸다고. 안그런다면, 일일이 대응하며 소진한다면, 아마도 내 편이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러모로 살아간다는 건 짙은 피로를 동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또한 짊어지고 버티어 서야 할 어떤 불가피함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2013. 9. 16.

서머싯 몸의 글



“그때 나는 부인에게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2013. 8. 7.

졸라 섹시하다


작지만 지속적인 성취로 자존감을 두터이 해나가는 사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느라 삶을 허비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발가 벗겨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자기 성찰에 부단하지만 자아 중심성에 함몰되지는 않는 사람. 타인을 동정할 줄 알지만 결코 시혜적으로 굴지는 못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가 타인, 세계의 문제와 연결 되어있으며 그 반대 역시도 공히 성립됨을 온 감각으로 이해하는 사람. 저 한 몸뚱이가 아무리 기써본들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아무리 작고 여린 것이라도 함부로 어찌해선 안된다 믿는 사람. 오직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말하고 행동하고 소비하는 사람. 이 지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끝내 살아남음으로써 무언가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사람. 그런 사람. 졸라 섹시하다.

2013. 4. 23.

긴 호흡 느린 걸음


너무 많은 아름다움, 너무 많은 욕망의 부추김들이 사방 도처에 부비트랩처럼 널려 있다. 가히 자본의 과욕망과 포스트 모던의 오남용이 힘합쳐 만든 비극적 살풍경이다. 두 눈 밝게 뜨지 않으면 저들이 설계한 노름판 안으로 시시각각 포섭 당하게 생겼다. 아름다움을 가려볼 줄 아는 눈이 그 어느 시절보다 긴요해진 것 같다. 긴 호흡 느린 걸음으로, 가깝고 작은 것을 세심하게 자주 살피며 그걸 찾아가고 싶다. 그래야 할 것만 같다.

2013. 3. 29.

산책. 2013년 봄


산책. 2013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