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16.

노란 리본


1. 많은 것은 없는 것이고, 어디나 향하는 것은 아무 곳도 향하지 않는 것이다. 돌볼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곁으로 들이자. 그 밖의 것들은 과감히 쳐내는 것이다. 상처를 주게 되더라도, 도리어 제가 아프게 되더라도. 관계도, 소유도, 다른 모든 일들도. 스스로에 주문하는 말.

2. 그 분이 떠나셨다. 인사를 남기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 분을 좋아했다. 그 분은 솔직했고, 유머러스했다. 그 유머는 그 분의 것이었다. 내가 느낀 그 분은 그랬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고,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다. 비대면 관계를 불신하는 옛 사람이나, 그 분의 흔적을 기다리는 일에는 낯섦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떠나셨다. 뜻하는 생활 이어가셨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할 때도 너무 힘들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감사했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3. 작년 여름의 일이다. TV를 보다가였나.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의 옆 침상을 쓰고 있던 그 분은 상인이었다. 그 분은 저 놈의 세월호 때문에 장사 다 망해버렸다면서, 쫄쫄 굶게 생겼다면서, 제발 좀 저 특별법인지 지랄인지 하는 일들 좀 싹 다 관둬버렸으면 좋겠다고, 수분이나 목청을 높였다. 나는 무얼 했을까. 어떻게 반격을 해야하나 생각했을까. 아니. 병실 가득 그 분의 침이 차오르는 동안, 나는 내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바라보았다. 저 리본을 저 분이 보게 될까를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이튿날 재차 병실을 방문할 때, 가방엔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세월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내게 추모의 날이 아니다. 이 날의 비겁함과 나에의 혐오를 다시 떠올리는 날이다.


2016. 4. 10.

타인의 진심은 타인의 것


1. 타인의 진심을 함부로 의심할 권리가 제게 있다는 이상한 믿음에서 세상의 많은 폭력은 빚어진다. 나의 진심이 나의 것이듯, 타인의 진심은 타인의 것이다. 표현된 진심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방에서 따져볼 일이다. 그 입증 책임을 타인더러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다. 

2. 사랑에 관해라면 어설픈 카운슬링 백 번 듣는 것보다 [아노말리사] 한 번 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3. 테라스에 앉아 꽃을 본다. 벌들이 꿀을 빤다. 꿀 빨고 앉아 있다. 이 꽃, 저 꽃을 쉴새없이 오간다. 잠깐 머무는 꽃, 오래 머무는 꽃. 참도 부지런하다. 꿀 빨고 앉아있다,는 말을 듣기에 저들은 너무 필사적으로 산다.


2016. 4. 3.

불면의 밤



차례대로 [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


  기자가 물었다. “아직까지 거리를 지키시는 이유가 뭐죠?” 여인이 대답했다. “제 영혼 하나만큼은 지킬 수 있으니까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가 일었다. 세계 경제를 파탄에 몰아 넣고도 저들은 숨어 배당금 잔치를 했다. 하지만 분노는 영원할 수 없었다. 동력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갔다. 하나 둘 거리를 떠났다.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단지 한 줌의 사람들만이, 그러고도 한동안 거리를 지켰다.

아무리 싸워도 승산이없다 직감할 때,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어 줄 수 없다 의지케 되는 한가지는 ‘자기 영혼'이다. 그래 이거라도 지켜내자. 이 간신한 불씨마저 사그라진다면 내 삶도 함께 끝장나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과 한둘로 특정할 수 없는 일상의 적들 앞에, 우리는 마지막 구원처로 '내 안의 평화'를 희구한다. 그렇게 회사를 견디고, 연애를 감당하며, 아이를 키운다. 이 길의 궁극엔 타인마저 불필요하다. 결국 '내가 있고, 남이 있다’. 단지 삶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수행을 찾고 닦아야 하는 길을 걷는다. 모두는 얼마간 구도자가 된다.

  차이밍량의 승려 3부작-[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은 구도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붉은 천을 두른 승려가 있다. 그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걸음이 매우 느리다. 아주 간신히 한 걸음씩을 뗀다. 어찌나 그 속도가 느린지 단 열 개의 계단을 밟는 데 5분의 시간이 걸린다. 저 이름 각오했다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얼이 빠질 무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승려의 곁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그를 흘끔거리거나 무시한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열차가 지나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려는 한결같다. 시종 정지화면에 가까운 한 걸음을 겨우 내딛는다.

그는 지금 수행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왜 하필 타이페이 한복판이란 말인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도시의 일상과 붉은 천의 승려를, 지독한 차이로 대비해 보여줄 뿐이다. 이게 [행자]라는 영화의 전부다. HDV캠으로 찍었고, 조명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폰으로 찍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서유]는 배경만 달라질 뿐(프랑스) [행자]와 똑같은 영화다. 똑같은 승려가 똑같은 걸음을 걷는다. 서양 사람들이라서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똑같이 무시당하고 이따금 흘깃거림을 당한다. 군중 속의 (광대 같은) 수행자. 차이밍량은 무슨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군. 세상의 선호와 가치와 속도가 무엇이건 자기의 걸음을 걷는 사람의 이야기. 간편한 해석이기도 했고, 손쉬운 교훈이기도 했다. 다르게 볼 여지가 크게 없는 영화이기도 했다. (정말 위에 나열한 장면들이 전부인 영화다.) 동시에 일상의 수행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보였다. 지독한 세계를 살아내야 하는 건 당신들입니다. 이 승려를 스치지만 마시고 얼마간 무언가를 느껴보십시오. 차이밍량의 주문이 들리는 듯했다. 말하자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김민희가 말했던 ‘루틴’같은 것. 그녀는 매일 화실에 나간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곧 망해버릴 것 같”다고 했다. 승려의 걸음은 곧 나의 루틴을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러나 [무무면]을 보고 말았다. 이 영화에도 역시 똑같은 승려가 나온다. 똑같은 붉은 천, 똑같은 느린 걸음. 그러나, 세 번째 장면부터, 앞선 두 영화와는 전혀 새로운 영화가 된다. 화면 가득 지하철의 창 밖이 차오른다. 타이페이의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쉴새없이 스쳐 흐른다. (이 연작에선 물론이고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에서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속도감이 몇 분 간 지속된다. 화면 밖에선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일상음도 들려온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승려의 시점쇼트일 것이다. 승려는 그 긴 수행을 마치고 지금 ‘퇴근’하는 길이다. 무려 세 번째 영화 만에!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모두 24시간 사우나에서 벌어진다. 승려는 발가벗고 탕에 지친 몸을 누였다가 사우나로 들어간다. 스키니한 몸매의 한 청년이 나오지만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여자가 사우나 수면실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고,(이 장면은 물론 뜬금없다. 그러나 어찌나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길게 담아내는지, 보는 사람이 다 긴장이 되는 지경이 된다.) 드디어 승려가 수면실로 들어온다. 몸을 누이고 이불을 끌어 당긴다. 그도 잠에 들지 못한다. 무무면(無無眠). 영어제목은 No No Sleep이다. 눈은 감았으되 잠에 들지 못하는 승려. 그는 끝내 잠들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앞선 두 영화([행자], [서유])에서 나는 희망과 교훈을 읽었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빛을 지키는 일. 이 지독한 세계에서 우리가 죽거나 아주 나쁘지 않고 그런대로 살아나가는 일이, 저마다의 수행과 구도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보았다. 두 편을 보고 났을 때는 뭔가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고, 일상에 복귀해서도 그 에너지를 나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무무면]은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앞의 희망들을 처음부터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세계는 이토록 시시각각 어두워지는데, 우리는 정말 어디까지 싸워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였다. 승려가 지하철 창 밖으로 보았던 세계는 그의 지난 수행을 완벽히 무력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가공할 힘의 세계였다. 수행은 그토록 지난하고 어려운데, 폭력은 너무도 빠르고 간편하다. 언젠간 편한 잠에 들 수 있을까? 내 영혼 하나만이라도 건져낼 수 있을까?


추신 : 세 영화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2016. 4. 2.

허우 샤오시엔의 말






 작품의 형식, 스타일에만 골몰하지 마세요. 예술엔 정도가 없습니다. 주변의 일상 관찰을 통해,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만의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독창성의 근원입니다. 독창성은 다른 무엇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고 무엇보다 자기의 힘으로 느껴야 합니다. 통찰을 얻게 되면 내가 본 것과 느껴온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독창성은 그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큰 예산은 필요가 없습니다. 뭐든 정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장비란 아무거나 써도 괜찮습니다. 뭐든지요. 우리 주변의 누구나가 할 수 있어요. 지금의 영화는 과거와는 달라요. 제도권, 비제도권을 나눌 필요도 없어요. 할리우드 같은 거대한 시스템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건 정말 괜찮아요.
  영화는 내가 자라고 생활하는 곳에서 나옵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애착을 갖는 사회, 사람, 사물, 관계, 분위기 같은 것으로부터요. 대만은 특히 생동감이 넘치는 사회잖아요? 대립 세력 간의 마찰 같은 뒤틀린 이야기도 많고,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젊은 세대들 뿐아니라 부모들에게도요. 어떤 이야기든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 분쟁, 패배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극적이어야 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대만은 굉장히 독특한 곳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표현하려는 창작자들의 노력이 줄고 있죠.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 허우 샤오시엔, [자객 섭은낭] 칸 영화제 수상 후 귀국 기자회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