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12.

[여행자] 그리고 박원순



1.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작동하는가를 알 수 없을 때 내가 줄곧 떠올리는 영화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다. 신분을 바꿔치기한 남자의 스릴러적인 여정을 담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드라마에 관해 영화는 아무런 관심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로크는 어째서 로버슨으로 살아가기로 한 걸까(현명한 아내가 있고,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명망도 있는 그가 어째서? 더구나 그가 바꿔치기한 로버슨이란 인물이 대단히 매력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뭔가 그가 희구했던 삶의 보장을 가졌다 보기 힘든데?). 이 질문은 영화를 본 모두에게 찾아들 것이나, 영화는 끝내 그것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서사의 찜찜함을 남기지는 않았겠지만 이토록 오랜 걸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이 영화는 로크의 동기를 너무나 무심히, 너무나 뻔뻔히 끝까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태도의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끝내 알 수 없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누구도 이 남자의 동기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로크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죽지 않고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면, 아마 단서가 될만한 몇 가지 정황을 내놓았을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으로 결코 진실을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 로버슨으로 살기로 했는지, 왜 목적도 없는 여행을 시작했는지, 우연히 만난 소녀와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아니 처음부터 그런 계획들이 있기나 한 것이었는지, 영화도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 안토니오니 조차도 몰랐(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불가지론의 태도, 부조리의 체념적 수용이야 말로 [욕망], [정사], [붉은 사막], [자브리스키 포인트] 등을 통해 줄곧 견지해왔던 그의 인장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3. 원대한 이상주의자이자 영민한 현실 개혁가였던, 무엇보다 현직 수도 서울의 수장이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그중에서도 [여행자]를 떠올렸다. 그 떠남을 설명할 아무런 동기가 로크에겐 없었지만, 이 남자에겐 (사법상 확정되지는 않았으되) 죽음을 추적할만한 유력한 정황이 있다는 점은 물론 차이로 있다. 아직 장례가 진행 중인 한편, 슬픔과 분노, 추론과 억측, 합리와 비이성이 뒤엉켜 있는 지금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 남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결국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누구에게도 이 사건에 관해 진실로서 단정할 만한 무엇이란 건 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자신, 이 남자의 가족, 이 남자와 함께 했던 사람들, 이 남자로부터 피해를 입었을지 모를 사람들, 이 남자의 가치와 지향을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 했을 그 모두가 패배자로 남게 될 것이란 사실 외엔. 따라서 이런 방식의 죽음은 최악의 방식이란 사실 외엔. [여행자]에서 로크가 인터뷰한 한 아프리카 게릴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을 더 드러낼 뿐, 결코 타자를 더 잘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2020. 7. 5.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



1. 아인이와 재인이를 만났다. 재인이가 세상에 난 지 한 달쯤 못되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8개월 만이다. 그 사이 세상은 거대한 전기를 맞아 둘로 나뉘었다. 이 천진한 것들은 몸집이 약간 불고 자기표현을 좀 더 분명한 쪽으로 내뱉을 수 있게 되었으되, 둘로 나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예쁘고 티 없는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실에 깊은 유감이 들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밥을 다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나서는 길에 아이들은 제게 어울리는 귀여운 마스크를 착용했다.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나는 이 얼굴들을 여러 장 사진에 담았다. 하여간 이 근원적 체제를 생성하고 유지하고 떠받드는 무수한 생활 가운데 있는 한 어른으로서 깊은 죄책감이 들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조용한 바다]를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서였는데, 아인 재인과의 식사가 일찍 끝나, 그 전회차 상영 시각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하게 되었다.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에토레 스콜라)이란 (내게는 듣보잡의) 영화가 상영될 참이었다. 볼까 말까 하다가 열감지 카메라를 통과한 김에 그냥 보기로 했다.

3. 에밀 쿠스투리차 [집시의 시간]과 배창호 [꼬방동네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공간의 설정과 등장하는 캐릭터(도시빈민들)의 인상 때문이다. 앞선 두 영화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그냥 취향에 안 맞아서), 이 영화는 그냥저냥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일단 한정된 공간(도시 중심과 유리된 언덕배기 빈민가)에서 모든 사건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야말로) 혼돈의 가족(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들)만이 등장하여 이 모든 소란을 이끌어간다.

4. [집시의 시간]에 있는 것이 여기도 있었다.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것이랄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정서가 하여간 여기에도 있다. 복잡한 가계도(라 쓰고 개족보라 부른다)도 그것이거니와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서 터지는 B코드 유머(분명 죽었어야 마땅한 아버지가 살아났다!)에 더해 반복되는 몽환적인 음악(지나치게 반복적이어서 한동안 귓전에 맴돈다)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모든 불협화음과 동시에 '사실적'이다. 그래 저럴 수도 있지.

5. 극장을 나서 삼청동으로 걸었다. 학고재 전시를 보고 싶었는데 7시가 넘어 도착해 문을 닫았다. 바로 옆 블루보틀에서 머그잔을 사고 핫초코를 마셨다. 자신들이 생산하는 음료에 자부심이 높은 점원은 나더러 뚜껑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까닭으로 우유와 함께 마셔야 제대로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논거를 달았다.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한 잔의 음료일지언정 저 정도의 단호함과 떳떳함이라면 충분히 그 의지를 따라야 하는 게 맞는 처사일 것이었다.





인생영화 2020



인생영화를 돌아본다. 이 일은 5년에 한 번씩 하기로 한 바 있다. 2015년에 했으니 올해 할 차례가 된 것이다(인생영화2015).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든다. 프랑수와 트뤼포도 그랬고, 마틴 스콜세지도 그랬다. 박찬욱도 그랬고, 봉준호도 그랬다. 감독도 평론가도 아니나, 나에게도 그런 리스트가 있다. 다만 내겐 시대를 초월해 두고두고 여러 삶에 영향을 끼칠 걸작들을 알아볼 눈이 일천하므로, 그저 삶이 어딘가 무력해지거나 잘못되고 있다 싶을 때마다 꺼내보았던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 목록은 걸작의 목록이 아니라, 정서의 치료제 목록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혹은 2020년 오늘, 생활의 지향 내지 지침의 목록이라 해두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