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6.

하루키, 몸


하루키의 몸에 관한 묘사를 좋아한다. 그는 정말 거기에 공을 들인다.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섹스할 때는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몸을 구석구석 씻어내는지, 어떤 은밀한 상상 선을 그리는지, 어느 순서로 근육을 단련하고 다시금 차근히 풀어 나가는지. 방대하고 켜켜한 그의 세계에서 유독 나는 그런 것들을 볼 때 진한 흥미를 느낀다. 패턴이 늘 비슷한데도 그렇다. 흡사 내 몸에 비슷한 자극이 스멀스멀 들어오는 듯한 그런 착각. 동네를 걷다 불현듯 하루키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구체적인 문장이 아니라, 문장들이 모아진 느낌을 떠올렸다. 바람은 알싸했고 길엔 사람도, 사물도 드물었다. 노래가 꺼진 이어폰은 귀마개가 되었고, 그덕에 내 심박과 발걸음, 호흡 소리만이 또렷이, 온전하게 들렸다. 그 리듬에 깊이 빠져들며 나는 하루키가 무엇보다 몸에 관한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묘사들 덕에 지난 생활 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안정을 기여받았다는 점을 생각해냈다. 밥을 먹을 때, 샤워를 할 때, 섹스를 할 때, 산책을 할 때, 부지간 나는 지상의 많은 와타나베, 카프카, 덴고, 아오마메들과 근원적 고독, 생의 작은 기적 따위를 나눠온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16. 11. 24.

4등과 걷기왕


1. 경주마의 할 일은 1등으로의 골인이 아니라, 트랙을 뛰쳐 나와 저 초원으로 내지르는 일이다, 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두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걷기왕]과 [4등]. 그들 모두 탈주와 성장을 다룬다. 끝을 맺는 방법은 꽤 큰 차이를 보이는데, 한 편은 탈주 자체의 낭만을 서둘러 판타지화 하고, 다른 한 편은 탈주 이후의 불안과 치사함(그러나 그렇게라도 계속 살아갈밖에 없음)을 이야기 한다. 어느 쪽이 더 생활의 진실에 가까운지는 자명하다. 우리 대개는 비겁함을 알지만 다른 방도를 몰라 그저 살아간다. 혹은 그것이 비겁한 일임을 충분히 헤아리기도 전에 가뿐히 흘러가버리는 삶의 속도 앞에 무력해진다. 그 망연자실을 직시하는 대신 도리어 성급히 판타지화 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낙관을 주는가.

2.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을 못하는 이유는, 그 복잡성을 따라갈만한 인지력과 감수성을 갖지 못했음이 첫번째요, 방대한 소통의 그물망을 감당해내고 거기에 적극 동참할만한 소통력을 갖지 못했음이 두번째다. 저 재기스런 단문과 이미지와 상호 멘션들의 넘실댐이라니. 보고 있자면 압도감, 무력감 마저 드는 것이다. 핑계다. 품과 시간을 들인다면(복잡이고 감수성이고 소통력이고 간에) 얼마간은 끼어들 수 있지 않겠나. 그러나 그러려면 내가 가진 한정된 것들을 상당 부분 초과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리게 될 것들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블로그도 사회 연결망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있는데, 숫제 개인 기억 창고쯤 여기는 편이 그저 낫겠다 생각해 온 지 좀 됐다. 앞으로라고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조용히, 오래오래, 차곡차곡 쌓아두고 이따금 돌아보고 싶다. 아주 작은 것의 역사도 역사는 역사다.

3. 뽀미가 웅크린채 잠을 잔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마도 직접 밥을 주는 일이 적기 때문이 아닌가로 추정하지만) 내게만은 살갑게 굴지 않는 녀석이다. 살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작은 동작들에도 꽤나 기민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을 영상으로 담아 제목을 단다면 '경계 중'이 더없이 적합할 것이다. 서운키도 하고, 욕심 비슷한 게 나기도 한다. 그래도 6년을 넘게 본 사이인데, 넌 내게 아직 그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연이 있니,라고 묻고 싶어지기 까지 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평온히 잠을 자는 모습이 위안을 준다. 부러 그 앞을 살금 지나가기도 하고, 그이 얼굴에 내린 햇살을 가려도 보고 하지만 미동이 없다. 이 사실이 너무 기쁘다. 




2016. 11. 18.

손홍규의 글


작가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 증오, 슬픔, 기쁨, 고통 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작가에게서 그가 무얼 확신하는가를 느끼는 대신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아파하는지를 느끼게 된다. 
                                       - 손홍규, 경향신문 칼럼 '글 못쓰는 작가' 중에서 


2016. 11. 14.

산책. 2016년 겨울. 광화문


산책. 2016년 겨울. 광화문
















2016. 11. 1.

순례의 해


 바람이 차가워졌다. 두꺼운 옷을 꺼냈다. 나프탈렌 향이 훅 끼쳤다. 아내가 사준 것이다. 한참 얼어 붙은 심사였던 그때. 불쑥 내 손목을 낚아채고, 매장 한 바퀴를 돌린 다음, 어느 거울 앞에선가 턱하고 걸쳐 입혔던 그 옷이다. 저 일련의 간결한 프로세스는 타래타래 얽힌 당시 내 마음의 모양새와 많이 대비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거기서 작은 위안을 얻었더랬다. 나는 어찌하여 차츰차츰 이겨내었다. 퍽 힘들었고 또 그런대로 해볼만한 계절이었다. 돌이키니 새삼 그랬다.

  프란츠 리스트 [순례의 해]를 찾아 눌렀다. 점퍼 안주머니에 플레이어를 넣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간질이듯 청량한 피아노음이 흘렀다. Lazar Berman이 연주했다. 다른 이가 연주했어도 나는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걸 들으며 걸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정말 예쁜 고양이를 보았다. 길냥이 처지이기엔 아까운 생김새라고 생각했다. 뽀미에겐 미안한 얘기다. 하지만 예쁜 건 어쩔 수 없이 예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오랜 갈망과 투쟁과 상처에 대해 떠올려 보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성가신 일이다. '두 아이를 바꾸어야만 하는 선택 앞에 놓인다면?' 극단의 질문이 난데없이 비집고 떠올랐다. 몸서리가 쳐졌다. 아름다움보다 더한 가치들이 있는 법이다, 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런 생각도 핀 것이다. 정말 압도적인 아름다움,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아름다움 앞에 놓인다면? 그때도 나는 저 법을 수호하려 들게 될까.

  닷새 째 방문이다. 신경치료 사흘, 스케일링 하루, 그리고 씌우기 하루. 그러고도 한 번을 더 가야 한다. 치과는 스무 해 만에 처음 찾는 것이다. 그 사실이 의사와 간호사를 적잖이 놀라게 했던 모양이다. 그들에겐 특별난 일일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닥 불편함이 없는 세월이었다. [순례의 해]를 귀에서 뽑고 치과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첫날이 아니다. 신경치료도 끝났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자리에 누웠다. 옆 자리의 치료기 모터 소리가 [순례의 해]를 강하고 빠르게 몰아냈다. 담당 의사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다. 볼수록 이동진 평론가를 닮았다.(목소리까지!) 그의 차분한 리드 덕에 수월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좋은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은 첫째 기술일테지만, 그만큼 또한 중요한 것이 꼼짝없이 의자에 누워, 숫제 천으로 시선을 차단 당한 채, 제 몸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낼 길이 없는 가련한 이들을 향해, 되도록 차분하고 정확하고 안정적인 어조로, 현 상황의 그저 80프로 정도만이라도 전달해주려 하는, 그런 작은 만남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 선생은 그걸 너무도 잘 알 뿐만아니라 곧이 체현해내는 사람이었다. 그점이 문득 감사했다. 마지막 덧니 씌우는 날엔, 집에 넘쳐나는 고구마라도 몇 개 구워올까 싶다.

  다시 [순례의 해]를 꼽고 병원문을 나섰다. 살근 달아오른 탓에, 올 때 만큼은 춥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새 해가 더 나와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놓고 도란도란 카페에 모여 앉은 여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쇼윈도마다 그랬다. 올초에 본 [너는 착한 아이]의 한 이미지가 그 위에 겹쳤다. 거기서도 젊은 엄마들은 평일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