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3.

개구리


숨소리마저 조심스런 조용한 공간에 있다. 옆자리엔 여고생이 앉았다. 귀엽게 생겼다. 하는 짓도 귀엽게 꼼지락꼼지락거린다. 아 이러면 안되지. 나는 네 삼촌뻘이다. 미안하다 조카.
어쩌다 목에서 개구리 소리가 났다. 침을 잘못 삼키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따금 이런다. 시선들이 내 쪽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아 나만 들리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소리는 찰나 나를 10년 전 어느 밤으로 이끌었다. 추운 날이었다. 막차를 기다리며 연상녀와 격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 목에서 ‘개굴’ 소리가 났다. 연상녀는 잠깐 멈칫했으나 다시 키스에 몰입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개굴!’. 그쯤에서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나는 개구리라 불렸다. 물론 우리 둘 사이만의 별명이었다. 피터팬 컴플렉스와 MOT를 몹시도 사랑했던 그 여자. 잘 살고 있을까.

2015. 12. 22.

바닷마을 다이어리


거실 한 켠에 작은 제단을 마련해놓고 기도를 올리던 장면이 오래 남았다. 그릇 모양의 놋쇠 종을 댕 한번 쳐 울리고 눈을 지그시 감던 저 얼굴들에 편안함, 정결함이 흘렀다. 속수무책 그 장면에 가슴이 설렜다. 먼저 떠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녀 자신들을 위한 장소가 되어주기도 했으리라. 불현듯 그 종을 방에 두고 싶어졌다. 가까운 불교 용품점을 검색했다. 여고 바로 맞은 편에 있었다. 산책 중에 여러 번 지나친 길인데 이런 가게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스즈를 닮은 여고생과 마주치길 내심 바랐다. 그러나 겨울 방학이었다. 잔뜩 때가 낀 유리문을 밀었다. 내 또래의 남자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문이 닫히며 풍경 소리가 예쁘게 울렸다. 사람 크기의 플라스틱 불상, 탁상용 청동불상, 목탁, 염주, 승복 따위가 있었다.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남자의 얼굴이 퍽 무기력해 보여 그럴 수 없었다. “저기, 놋쇠 종 있나요?” “흔드는 거요, 치는 거요” “치는 거요. 이렇게 막대기 같은 걸로..” 남자는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정말 종들이 있었다. 영화서 보던 거다. 가까이서 보니 엷게 먼지가 앉았다. “이거 얼만가요?” 커피색의 윤기나는 종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남자는 대답대신 클리어 파일을 뒤적였다. “15만원이네요.” 뭐? 저 그릇하나에? “저어. 그럼 저 옆에거는요?” 살 마음은 없었다. 그냥 물어 보았다. “10만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거리로 나왔다. 바람이 찼다. 한 무리의 재잘대는 여고생들과 스쳤다. 저 소란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 친구들도, 무례한 점원도 각자의 한 시간을 통과하는 중일 것이다. 언젠가 그리거나 미워할. 다시 돌이키고 싶거나 그러고 싶지 않을 어떤 시간을.


2015. 12. 21.

그렇게 조용한 혁명을


선뵈기 퍽 부끄럽더라도, 사랑 받지 못할까 의심 들더라도, 상관없다. 스스로에 진실하기만 하다면.(아니 거짓이 좀 섞여도 괜찮다. 완전히 깨끗한 게 세상에 어딨어.) ‘이만하면 그냥저냥..‘이라 읊조릴만한, 크게 특별날 일 없는 성취라면 다만 넉넉하다. 아주 작은 성공들의 역사. 그 경험치의 긴 누적이 결국 우릴 구원해낼 것이다. 그런대로 이 지독한 삶은 살아질 것이다. 느릿이 내면에 자기 믿음이 차오르는 순간, 사랑은 애써 구걸하지 않아도 이끌려 온다. 도대체 관심, 사랑 같은 걸 먼저 안달나 좇지 좀 말아야 한다.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멋스러운데 내 주변엔 왜들 이리 가슴에 구멍난 이가 많은지 모르겠다.(이젠 맘 아프지도 않다. 솔직히.) 당신 졸라 괜찮아,라는 말은 힐링 장사꾼의 워딩 같아서 차마 못쓰겠다. 흩어진 사탕알 줍듯 하나씩 하나씩. 긴 호흡 느린 걸음으로 자기 준칙을 세워 나가는 일. 당신도, 나도, 그렇게 조용한 혁명을. 부디.

2015. 12. 17.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지역혐오, 노키즈존, 보복운전, 층간다툼, 캣맘혐오, 여성혐오 등등등. 온갖 혐오증와 히스테릭에 질식중인 이 사회. 넘쳐나는 소셜포비아들. 명백한 파시즘의 전조다. 늘 갈등은 있어왔으나 지금의 양상인 적은 없었던 듯. 높은 공격성은 낮은 자존감에 바탕한다는 게 범죄심리학의 제1명제인데, 오늘날처럼 개개인의 존재감이 처참히 말살 당하는 일이 일찍이 없었던 바, 기이한 현상은 아닌 것이다. 작금의 혐오증은 그러니까 자연한 수순이다. 너무 많은 자극들, 너무 많은 욕망의 부추김들. 그러나 그걸 미처 좇을 수 없는 경제사회적 처지. 그런 내 처지가 크게 개선될리 없을 거란 낙담, 불안, 절망. 독재에 맞서기처럼 뚜렷한 적도 없는 시대. 오직 살아 남는 것만이 유일한 저항이 되어 버린 시대.

2015. 12. 16.

2015. 12. 14.

질근 그저 살아나가는 일


슬픔과 공허에 긴 시간 허우적이는 사람들. 그 시간이 너무나 길어져 우울이 차라리 존재양식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망가진 과거와 재건 불가한 현재를 부단히 호소하며 타인과 자신 스스로를 자기 슬픔의 당위에로 기어이 동참시키고 만다. 그를 위한 사연과 증거들을 참 세심히도 나열해내면서. 대개 남 탓 투성이의, 자기는 오로지 피해자란 식의 취사 선택된 플롯들.(자기 책망과 혐오에 지독히 젖어 있더라도 저 안 깊은 곳엔 나를 그렇게 만든 그 무엇에 대한 탓이 덩어리져 있다.) 살고자 하는 뜻일 것이다. 혹은 살려 달라는 애원일 것이다. 그게 없다면 저토록 질길 수도 없다.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끝내 당신도 죽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도 죽인다. 우울이 습관이 되어버린 친구들이여, 세상 누구도 당신을 구원해주지 못한다. 오직 당신만이 그 연옥에서 당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우선은 밥부터 한술 뜨자. 상담을 받든 약을 지어먹든 무너진 마음의 잔해를 털어내자. 천천히 한 타래씩. 필요하다면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들을 가슴 속에서, 현실의 시스템 안에서 벌하자. 그럴 수도 없다면? 그냥 꿀꺽 삼키고 살아가는 수밖에. 슬픔과 공허와 상처에 굴복 당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과 공생을 도모하는 수밖에. 삶을 저버릴 수 없는 바에야 하여간 살아내야 할 것 아닌가. 하나씩 자신을 돌이키며 질근 그저 살아나가는 일. 그 순간 어둔 삶에도 숭고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오직 저 시간들을 지켜봐 줄 수 있을 뿐이다.

2015. 12. 2.

산책. 2015년 겨울


산책. 2015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