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1.

노파의 향


한낮. 노파가 저만치 앞질러 갔다. 따를 수 없는 잰걸음이었다. 무슨 일일까. 걸음을 따라 특유의 향이 이어졌다. 코끝이 매캐했다. 죽음에 가까워진 냄새로구나. 불경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말도 아니었다.

모든 아이는 달큰한 향을 풍기며 태어난다. 어미 젖의 향, 제 품은 순결의 향. 생각해보면 향이 없는 것은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향이 있다. 시절에 걸맞은 향내를 바꿔 풍기다, 다만 언젠가 병들고, 언젠가 떠난다. 향. 육신의 향. 심령의 향. 나는 어떤 향을 풍기고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땀내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백 번의 관념보다 한 번의 노동이 새겨지기를. 되도록 거친 손과 그을은 살결을 갖게 되기를. 그렇게 시큼한 노동의 향내가 내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나 구호를 삼는 일은 그것이 턱없이 부족할 터이기 때문이다. 노파의 향을 따르며, 나는 내게서 땀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러웠다. 그것도 몹시. 저 향도 언젠가는 내것이 될 것이다. 그때라면 좀 덜 부끄러운 일이 될까. 노파의 향은 매캐했으되, 불쾌하지 않았다. 떳떳한 죽음의 냄새였다.


2016. 5. 20.

여자친구


그녀는 여행을 갔고 나는 남았다. 창 너머 앉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나도 그녀도 먼 거리를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버스는 떠났다. 청소를 하고, 짐을 꾸리고, 투표를 하고, 그리고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우리 둘 중 우리가 잠들어버렸다는 걸 인지한 이는 없었다.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서야 잠을 깨었고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어떡해,를 읊어댔다. 나는 우리에게 단 1초라도 줄일 방법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답은 없었다. 무조건 뛰었다. 신호를 무시했고 경적 소리도 무시했다. 저 편에 기적처럼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버스는 그녀를 날름 삼키고는 문을 닫았다. 저만치 사라졌다. 허리를 굽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한 시간 쯤 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속을 밟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잘 다녀올게. 사진 많이 찍어와. 전화를 닫았다. 한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탔다. 그 중엔 중국인 가족이 있었다. 너 댓살 쯤 먹은 막내가 엄마 허리춤을 끌어 당기며 칭얼댔다.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는 스마트폰 게임에 몰두해 들었다. 不出, 可入 따위 글자들이 화면에 큼지막이 떠올랐다. 한동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궤도 소리가 둔중했다. 풍경이랄 것도 없는 어두운 것들이 스쳐 흘렀다.


2016. 5. 1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말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소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중에서
 
 나는 예술 그 자체에 관하여 또는 예술의 사명에 관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삶 자체이다. 삶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정말로 본질적인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술가로서의 과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더 중요히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문명이 처한 상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역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 각자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뛰어난 인물들‘, 통치차들, 종교 재판관들이 설치는 역사적 단계는 우리 시대로 끝나간다는 인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행복을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서 우리의 삶을 함께 바꿔내자는 주장을 펴 왔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망각했으며, 이 개성은 보편적 역동성 속에서 상실되어 버렸다. 인간은 인류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이해는 망각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구심점을 이루는 고유한 존재라는 인식, ’나‘ 자신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결심과 막대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는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다. 그에 반해 순전히 물질적인 것들은 제도적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우리들 삶의 근거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의 삶은 경화증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마비 증상의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에 가담하고 발전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인간의 행동과 인간의 운명 사이 상호 연결 관계가 상당히 심각하게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분리가 현대인의 자의식을 불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자기 자신은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스스로를 여긴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환경의 강제를 받아왔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운명에서 결국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는 숙명적인 감정을 가슴 한켠에 품고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하여야만 한다. 고통, 그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자신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악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소유한 힘으로부터 오는 것도 인간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 공동체를 위한 담보도 아니고 사회적 조화의 현상도 아니다. 예술은 일종의 사랑 고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우리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 얽매여 있다는 자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고백이다. 예술은 삶의 본디 의미를 표출해주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며 사랑이고, 희생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

2016. 5. 11.

곡성


[다우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장 수녀는 흐느껴 운다. “아직도 의심이 들어요. 의문이 든다고요.” 순백한 젊은 수녀는 함께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감싼다. 사태는 이미 종결됐다. 그녀가 그토록 의심하던 플린 신부는 쫒겨났다. 그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곡성]이 공포스런 이유는 거기에 광기나, 피칠갑이나, 좀비, 악마, 혼령이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차라리 가장 깊은 곳에서 스멀대는 도저한 무력감 때문이다. 이 지옥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을 기어코 직시시키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도, 판단하지 않고도, 이론과 종교와 과학 따위에 의탁하지 않고도, 인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않고도 이 세계를 견뎌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질문을 던진 채 끝을 맺지만, 관객은 한 켠에 묵시록적인 대답을 안고 돌아간다. ‘아니, 전혀.’ 오늘만도 나는 한 동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다. 그에 대한 평판이 있었고, 나는 그 평판 위에서 그의 작은 실책을 보았다. 확대경에 찍힌 사진처럼 그 장면은 머리에 남았다. 이토록 얄팍한 인식과 감정, 그리고 믿음이라니. ‘당신들은 아마도 계속하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곡성]은 말하고 있다. 

곡성


1. [곡성]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기 전 막연히 [소서러], [지옥의 묵시록] 류의 괴이한 처절함과 [사이비], [안개마을], [이어도] 류의 폐쇄 공동체적 광기와 음산함이 적당히 뒤섞인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다. 보기 좋게 희롱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레퍼런스를 쉬 대입하기 어려운 영화다. 강력하고 심오하며 정직한 영화다. 활짝 열린 창과 같은 영화다. 우리 사고와 행위가 추동되는 바탕인 믿음의 실체에 관해 질문하는 영화다. 자기 현시적 테크닉으로 일관하고 언뜻 심오해보이는 주제를 얄팍히 분칠한 어떤 경향의 영화들은 [곡성]을 보고나면 생각할 지점들이 많아질 것이다. 기분좋은 희롱을 경험한 관객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2(추가). 역대급의 해석들과 갑론을박이 쏟아질 작품임은 극장문을 나선 이라면 누구나 직감했을 터다.(물론 이 영화를 더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 한 해. 상당히 많은 수가 객석을 퉁명스레 털고 일어났다.) 개봉 첫 날임에도 반응은 역시 뜨겁다. 누가 누구의 편이냐, 누가 누구와 대립했느냐가 주된 논쟁의 양상인 거 같다. 감독이 ‘특정인과 특정인이 한 패'라는 식의 유권해석을 어디선가 흘린 모양인데(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누구와 누구가 진짜 악마였어,로 (아직까진) 논쟁이 쉽게 귀결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를 넘어선 매우 다층적인 고민거리를 안긴다. 누가 악마여도 좋고 누가 악마가 아니어도 좋은 지경까지 간다. 모두가 악마가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믿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 그 자체에 관한 징그러운 탐구. 그 끝에 도달한 곳은 거대한 무력감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영문도 없는 불행과 무력감. 영화 전체가 거대한 현혹(환각)이라고 느꼈다. 그 느낌에 관해 언젠가 정리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