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1.

곡성


[다우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장 수녀는 흐느껴 운다. “아직도 의심이 들어요. 의문이 든다고요.” 순백한 젊은 수녀는 함께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감싼다. 사태는 이미 종결됐다. 그녀가 그토록 의심하던 플린 신부는 쫒겨났다. 그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곡성]이 공포스런 이유는 거기에 광기나, 피칠갑이나, 좀비, 악마, 혼령이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차라리 가장 깊은 곳에서 스멀대는 도저한 무력감 때문이다. 이 지옥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을 기어코 직시시키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도, 판단하지 않고도, 이론과 종교와 과학 따위에 의탁하지 않고도, 인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않고도 이 세계를 견뎌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질문을 던진 채 끝을 맺지만, 관객은 한 켠에 묵시록적인 대답을 안고 돌아간다. ‘아니, 전혀.’ 오늘만도 나는 한 동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다. 그에 대한 평판이 있었고, 나는 그 평판 위에서 그의 작은 실책을 보았다. 확대경에 찍힌 사진처럼 그 장면은 머리에 남았다. 이토록 얄팍한 인식과 감정, 그리고 믿음이라니. ‘당신들은 아마도 계속하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곡성]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