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3.

루프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 정신없던 한 주였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밀려드는 일들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겨우 하나의 선을 찾아 간신히 붙들었고 그것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나왔다. 미노타우로스 미궁을 헤쳐 나오는 실타래 같은 한 주였다. 

2. 신선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여전히 외출은 줄여야 함에도 이맘때 찾아오는 싱그러움에 속절없이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 오늘은 삼청동과 한남동 전시들을 둘러볼까 했는데, 결국엔 못했다. 오전엔 교회 점검반 일을 해야 했고, 오후엔 주중 못다 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집에 돌아오니 좀 있으면 수원과 서울의 슈퍼매치가 있을 시각이었다.

3. 하지만 오늘도 수원삼성은 보란 듯이 패배하고 말았다.

4. 아, 어제저녁 아내와 에무시네마 루프탑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아내도 그 시간을 고마워했다.

5. 2019년 칸 영화제 내내 기생충과 더불어 가장 뜨겁던 화제작이었고, 지난 1월 개봉했으나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네이버로 다운을 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한 호흡으로 보아지지가 않았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끊어보았고, 어느 간격은 일주일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하는 게 옳을 터였다.

6. 루프탑엔 바람이 살랑였다. 하늘엔 별이 보였다. 비 온 뒤 기온은 조금 차갑기도 했지만, 준비해 간 경량 패딩의 덕을 보았다.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환경이 아니랄 수 없었다. 초록 동글뱅이 모기향이 타는 냄새. 그것이 만드는 작은 불씨와 연기. 그것들 사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7. 마치 작은 기적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타닥이는 불씨와 살랑이는 바람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와 모닥불 아래 오롯이 따스한 공동체가 되는 자매들의 이야기였다가, 거친 파도와 불어 치는 바람 가운데 곧 다가올 이별을 묵묵히 받아 들고 그 운명을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모닥불 주변에 모여든 축제의 여인들이 내던 공명의 화음처럼, 나는 이 영화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물리적 공간 사이 공명에 대해 생각했다.  

8. 또한 오르페우스의 신화의 변용. 이 여인들은 서로를 끝내 저 심연에 두고 나와야 하는, 서로가 서로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에우리디케가 되어야 하는 스산한 운명을 그저 받아 들었다. 누구를 탓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변혁과 저항의 깃대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운명을 받아 들고 서로를 추억하기로 결심한 저 결단들, 감정들, 그 이후의 삶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온도로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 차갑다고도 할 수 없고 따스하다고도 할 수 없는, 가장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저 응시의 태도에 관해 생각했다.   



2020. 9. 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말


칠흑같은 어둠속에도 시는 존재한다. 그대들을 위해서.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