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31.

존내 양아치


  학창시절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그건 누구보다 10세 이후의 내 모든 생애주기를 지켜 봐온 M군이 잘 안다. 그는 지금도 나를 그렇게 부른다. ‘쓰레기’ 내지 ‘존내 양아치’. 내가 어쩌다 ‘존내 양아치’가 되었는지 그 원인을 구태여 추적 한다면 몇가지 쓸만한 사연을 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라고 해서 그 야비하고 야만적이었던 내 지난 날들을 충분히 설명해주진 못한다. 우리 집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고, 나는 그 전까지의 삶에 어떤 강한 트라우마도 없었다. 그 시절 무엇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는지 해석할 필요를 못 느낀다. 별의미가 없을테니까. 차라리 감기처럼 찾아왔다고 해야할까. 그저 인정하고 살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존내 양아치'였다는 사실에 대해. 왜 아직까지 내가 그 시절을 지워낼 수 없는지에 대해.

  나는 소위 일진회 멤버였다. 젤로 잔뜩 쳐바른 기생 오라비 머리를 하고(그땐 왁스가 없었다), 교복 바지는 종아리 6.5인치로 바짝 줄인 채, 수돗가에 걸터 앉아 하교하는 아이들을 괜스레 꼬나 보는 일이 내 주 일과였다. 혓바닥엔 페인트 사탕이 물려 있는 일이 많았다. 학생부 지도 교사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을만큼 일진회와 그들 사이에는 모종의 알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아이들은 잘못도 없이 기죽어야 했고 우린 그걸 즐겼다. 눈을 제대로 깔지 않거나, 혹은 (내 기준에 조금이라도) 불경스런 모습을 비치는 아이들이라면 우선 눈도장을 찍어 두었다. 나중에 혹시나 그 아이가 자기 반에서 어떤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건 일진회 출동의 좋은 명분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게 정의고 우리의 일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이 학교의 중심이고, 이 학교의 질서는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식의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싸움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일진회에 가입될 수 있었느냐. 그건 간단했다. 싸움 잘 하는 애들 옆에만 있으면 되었다. 싸움 잘하는 능력은 일진회의 30% 멤버 정도만 갖추면 충분한 것이다. 나머지는 그들을 보조할 기싸움만 잘 해주면 된다. 눈빛, 발걸음, 행동가지 자체에서 풍기는 어떤 불량스러움. 그거면 된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교복을 심히 줄이고, 예쁜 여자애들을 옆에 끼고만 있으면 된다. 이따금 타학교 일진회끼리의 연합행사 때 얼굴 비춰 잔뜩 취해주고, 선배 일진들에게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만 잘하면 된다. 한마디로 야비한 꼬붕짓. 그게 그 시절 내 정체감의 전부였다. 이상하게도 성적이 잘 나왔지만(상위권) 그건 내 정체감의 중요한 바탕은 아니었다.(재수 없지만 사실이다.) 나는 그 시절 무엇보다 가학에 취해 있었다.

  이후에도 망나니 짓은 계속되었지만 중3 여름, 나로선 큰 전환이 된 사건을 만난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일진회 탈퇴를 선언했고 그에 상응하는 보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일진회 내부에선 일종의 계파 갈등 같은 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 싸움짱이 기싸움을 펼치고 있었는데, 나를 비롯한 꼬붕들은 어디에 줄을 설 것인지 곧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복잡한 정치게임이었고,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를 나갔다. 수돗가에 걸터 앉아 아이들을 꼬나 보면서도 눈빛이 전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진작 나는 어느 한 아이의 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아이가 더 셌기도 했고, 인적 네트워크가 넓었으며, 또한 선배 일진들 중 주류의 신임을 보다 얻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말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저쪽 편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항변하는 편지를 작성하기도 했고, 그에게 찾아가 일대일 대화를 요구한 적도 있으나 허사였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나를 왠만해선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저쪽 계파의 내 급 되는 아이와 싸움을 붙는 것이었다. 말도 안되는 일을 구실로 나는 결투 신청을 했다. 거기서 승리함으로써 나는 신임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 결투는 우리 학교 동네에서도 가장 큰 공원에서 펼쳐졌다.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정말 백 수십은 되는 아이들이 빙 둘러 결투를 기다렸다. 나는 이런 식의 상황에 내던져진 건 처음이었기에 많은 긴장을 했다. 내가 싸움을 걸었으면서도 내가 기싸움에서 지고 시작하는 게임이었다. 싸움은 단 5분 만에 끝났다. 완벽한 나의 패배였다. 나는 손가락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고, 호기롭게 웃음짓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걱정스러운 건지 실망한 건지 알 수 없는 여자친구의 얼굴을 봐야했고, 고놈 꼴 참 좋다며 속으로 배시시 거리고 있을 평소에 내가 갈구던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했다. 그러나 거기까진 좋았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싸움을 끝내려면 내가 졌다는 선언을 해야 했는데, 나는 나와 싸운 상대에게 찾아가는 대신 그의 대장에게로 갔다. “나 손가락이 꺾여서 더 못할 거 같은데”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더니 내 얼굴에 연기를 뿌렸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나는 한없이 깊은 굴욕의 늪으로 잠겨야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일진회를 탈퇴했고, 그 대가로 선배와 동기들에게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그런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거의 죽은 존재로 살았다. 한 학기만 버티면 졸업이 다가온다, 그때까지만 유령처럼 살자. 모든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비웃는 것 같았고, 내 존재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 인생의 가장 우습고도 힘겨운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추신 : 나의 악행사(惡行史)를 펼치자면 여기가 아닌 책 한 권의 저술이 필요할 것이므로, 더 긴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지난 날의 부채감으로, 또 지금 내가 먹고 입고 쓰면서 세계에 저지르는 착취에 대한 죄의식으로, 굳이 거창하게 말하면, 거기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이후 많은 시간을 살아간다. 많은 아이들을 괴롭혔고, 그중엔 물리적, 정신적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나를 변호할 생각이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무조건 죄인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그들이 아직까지 어떠한 앙심을 버리지 못한대도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직접 사과할 수 없음에 죄송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이따금 고백하며, 그 괴로움과 계속 살겠다. (2015)

2015. 7. 30.

사적 리스트의 은밀한 매력


  부산 국제 영화제가 20주년을 맞아 ‘아시아 영화100’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연다고 한다. 보도자료의 내용을 빌자면 이 기획은 ‘아시아영화의 가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보존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리스트는 5년마다 새롭게 업데이트 될’ 예정이고, 앞으로 ‘아시아영화의 미학과 역사 가이드는 물론 아시아의 숨겨진 걸작과 감독을 발굴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순위 선정을 위하여 ‘아시아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전세계 73명의 심사단이 구성’됐는데 여기엔 ‘저명한 각국의 영화평론가들과, 칸영화제 등 세계유수 영화제들의 집행위원장 및 프로그래머, ‘모흐센 마흐말바프’, ‘봉준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등 수준 높은 국내외 아시아영화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그 권위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영화제 측은 기대하고 있다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리스트들-이를 테면 까이에 뒤 시네마, 키네마 준보, 포지티프, AFI 선정 올해의 영화, 싸이트 앤 사운드 선정 100대 영화 등-이 올라오면 우선은 챙겨보는 편이다. 세계 영화의 동향도 나름 살필 수 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영화들과 접할 기회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유용한 DB 지도인 셈이다. 그 지형도의 한 축을 새롭게 만들어 차곡이 구축해 나가겠다는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선언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세계 최고의 아시아 영화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특화된 또 하나의 유용한 DB를 만들어 나간다면 영화 팬으로서도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기사를 읽고 나니 불현듯 과거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한 때는 저런 리스트들이 올라오면 거의 암송하듯 꿰고 다녔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선정 몇 년도 최고의 감독은?” 하면 가령 척하고 대답이 나오는 식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걸그룹(AOA입니다) 멤버 이름도 아직 못 외고 있는 요즘인데 말이다. 전만큼 저런 리스트에 주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발표가 올라오면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훑고 넘어가는 정도가 됐다. 내 영화적 안목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까닭에서일까? 이제 그런 오만을 떨어도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걸까? 아닐 것이다. 여전히 나는 좋은 영화들과 그렇지 못한 영화들, 좋은 영화와 더 좋은 영화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명확한 기준과 원칙 하에 판결 내리듯 올해의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신속히 가려내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럴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다. 여러 번 봐야 하고 여러 번 곱씹어야 한다. 그렇게해도 다섯 편 남짓의 ‘사적인 리스트’를 겨우 뽑아 올릴 수 있을까 말까다.

   그렇다. ‘사적인 리스트’. 저런 일종의 공식화되고 선언화된 리스트들보다 더 관심을 당기는 건 아주 사적인 리스트, 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를테면 웨스 앤더슨 감독이 좋아하는 10편의 영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인생을 바꾼 몇 편의 영화. 영화인이 아니어도 좋다. 이름모를 블로거의 사적인 글, 리스트 또한 못지않게 흥미롭다. 어떤 까닭일까. 앞선 공식화된 리스트들은, (스스로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떤 힘을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영화광이 되고 싶다고? 그럼 우선 이 무시무시한 리스트들부터 읽고 오렴!) 저런 리스트를 반복해 접하다보면 소위 ‘영화 전문가’라는 분들의 선호 패턴이라는 것이 어떤 윤곽으로 가늠되는데, (편견일 수 있으나) 그 패턴은 대개 ‘시네마틱함’ 그 자체에 경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 ‘사적인 리스트’는 권위의 무게보단 그이의 취향과 경험과 세계관이 더 부각돼 드러난다. [타이타닉]을 아끼는 사람에겐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업 다큐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또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 앞에,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민케인], [동경이야기], [게임의 규칙]이 최고의 영화 상위를 굳건히 지키는 저 리스트들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가.  

  지금 나는 비평가, 영화 전문가의 역할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의 죽음’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다. 일반 대중보다 (아무래도) 더 절제되고 냉정한 기준과 안목으로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이들은 아무리 ‘누구나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 하는 오늘날이라 하더라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다.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들-문학, 연극, 회화, 음악, 사진 등-에 비해 그 우월함을 주장할만한 단 하나의 근거도 없는 예술이다.(영화는 종합예술이란 주장이 있지만, 비빔밥이 냉면보다 우월하다는 내적 근거가 없듯 이 경우도 그렇다.) 오히려 영화는 가장 역사가 짧은 후발 예술로서, 그 문화적, 지적, 경험적 자산의 축적이 가장 빈약하다. 게다가 그것은 일정한 시대상황적 바탕-전세계적인 시민사회의 등장과 산업혁명 이래 기술문화와 자본주의의 성장-이 조건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았을 예술이기도 하다.(다른 모든 예술은 고대 이전부터 존재했다.) 결국 어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맞먹을만한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 존재증명을 하는 일뿐이다. 아무 영화나 그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좋은 영화’가 그렇게 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비평가의 역할은 지대하다. 수없이 쏟아지는 영화의 홍수 속에 남들보다 먼저 보고, 깊이 보고, 다시 보고, 그럼으로써 마침내 어떤 영화들이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만한 물건인지 분별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종 불편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평이 외부로부터 이런저런 이론과 담론을 끌어와 스스로를 되려 영화와 유리시키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 정점은 90년대의 잡지 [키노]였고,(그 잡지는 두 페이지로 충분히 전달되고 남을 내용을 스무 페이지로 늘려 담는 일에 각별한 재주가 있었다.) 이후 탄생한 매체들도 지금까지 저 영향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그만큼 [키노] 및 오남용된 포스트 모던철학의 힘이 대단했다는 방증도 된다.) 도저한 공부를 선행하지 않았다면 아예 이 영광스런 영화들의 명단에 접근할 생각도 말라는 듯, 그렇게 고압적이고 허세투성이인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직도 그 시절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론가들이 활약하고 있고, 업계와 학계의 선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이것이 쌍방향 소통시대의 도래와 권위주의 파괴 흐름과 맞물리면서 ‘비평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몰고 오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이며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편집의 애티튜드로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따라서 보는 이가 그 자신의 삶의 감각에 대입해 영화를 사적으로 바라보려는 그 시도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기엔 어떤 현학적 이론이나 비평적 수사도 의무가 아닐 것이다. 어떤 영화가 그 영화를 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가를 들여 볼 수 있는 글이 읽고 싶다. 그런 글과 리스트가 훨씬 값지다고 생각한다. 비평 분야 중에서도 인상비평을 좋아하는 이유이며, 또한 이름 모를 어떤 블로거의 일기 같은 영화 글을 더 선호하는 이유다.



2015. 7. 28.

신념의 선의와 그 실질 윤리




  한 선배와 통화를 했다. 오랜 시간 그를 알아왔고, 그가 천성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나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안다. 그 선배는 수년 째 한 국제구호단체에 기부를 해오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을 바탕하는 중요한 활동이다. 그는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곤 했다.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이 다섯이야.”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자식처럼 부른다.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직접 만날 것이란다. 그 아이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며, 작은 선물들을 감격에 젖은 듯 보여준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앞에서 나와 친구들은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늘 칭송하곤 했다.

  그러나 냉정히, 그건 그를 속이는 일이었다. 아동국제구호 웹페이지에 접속해본 일이 있는지. 그곳이 얼마나 ‘선의로 가득찬 폭력’을 전시하는가 목격한 일이 있는지. 첫 화면부터 마치 상품을 진열하듯,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 사는 곳, 장래희망 따위를 적어놓고, 아래엔 친절히도 후원하기 버튼을 달아 놓았다. 너무나도 경악스런 장면이다. 이젠 선의도 쇼핑을 한단 말인가? 저 아이들의 인격과 자존심은 도대체 생각된 바 있는걸까? 물론 모르는 바 아니다. 이리 각박한 시대임에도, 지구적 온정주의를 품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는 사람들의 선의를. 그를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의 노고를. 한때 관련 단체에 몸을 담았었고 그 일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있으므로, 또 후원자의 선의라는 게 그리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현지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라도 생계를 유지하길 원하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일이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불편하다. 지은 죄는 자기 삶으로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지 주일날 한 장의 헌금 봉투로 탕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빈곤 아동과 국제 소득 불균형, 생태 불균형 문제도 마찬가지다. 적선보다 우선 할 것은 지구적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우리 안의 탐욕과 폭력성에 대한 성찰이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 그들이 처음부터 시혜의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수천년간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구며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삶을 영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위엄을 빼앗은 건 힘있는 자들이었다. 지난 날엔 총칼과 포격이 그 일을 했다. 오늘날엔 전지구적인 천민자본주의가 빠르고 조용하게 그 일을 하고 있다. 거기에 어떻게 나 자신이 예외일 수 있을까. 이미 내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데. 그 반성과 실천의 바탕 위에(실천의 구체적인 방법을 다룬 책들은 시중에 많다.) 물질적, 활동적 나눔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방법만큼은 조심스럽고도 정교해야 할 것이다.

  주요 구호단체들과 그 참여자들은 아직도 이런 식의 적선이 매우 숭고한 행위라 믿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나눔 정신마저 희박한 세상을 살고 있으므로, 얼마간 인정 받을 행위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란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를 마치 어떤 명예라도 되는 양 자기 존재감과 공명심을 보조하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광경을 만들고 있는지 이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믿는 선의와 그 행위의 실질 윤리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015)


추신1. 경험해본 바 저런 돈은 대개 잘생기고 예쁘고 애교의 기술-편지, 선물 등-을 다양히 가진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그것이 현지에서 적잖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추신2. 선배에겐 아직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가 깊이 이 일에 의미를 두는데다 나 자신도 말처럼 옳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5. 7. 27.

우연의 마법




인간 이성의 촘촘한 기획을 신뢰하는 대신 우연과 운명과 욕망의 거대한 장난을 신뢰하는 편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가 무엇보다 우연의 마법을 그려내는 사람이라 좋다. 그 우연의 연쇄 속에 밥 먹고, 취하고, 섹스하고, 다투고, 삐지고, 외롭다가, 텅 빈 거리에 불시착하는 것. 다시 속을 줄 알면서도 또 살아보는 것. 그게 사실 우리 삶의 거진 전부 아닌가? 그렇게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언제나 “예쁘다"고 말하는 이 사람이 좋다.

추신. 이날 강연에서 어떤 여성 청중이 대뜸 마이크에 대고 요청했다. “감독님, 이따 저하고 술한잔 해주실 수 있나요?” 그가 대답했다. “네..뭐 그러죠.”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한 우산을 쓰고 어디론가 향해 갔다.

2015. 7. 19.

산책. 2015년 여름


산책. 2015년 여름









희망 타투


저런 모양으로 새겨보고 싶습니다만..
(점 두 개는 원래 내꺼임)


2015. 7. 17.

있을 유(有), 늦을 만(晩)


  있을 유(有)에 늦을 만(晩)자를 쓴다. 풀이하자면 ‘천천히 살아라’쯤 된다.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였을까. 놀림도 참 다양하게 들었다. 최초의 별명은 만보계, 만세, 만두 따위였다. 퍽이나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쩌다 분식집에 가거나 급식에 만두가 나오는 날이면 괜시리 내가 먼저 움츠러들고 그랬다.(그렇다고 만두를 싫어해 본 적은 없습니다.😂) 만원권, 만득이로 이어지던 별명은 중학교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표의형으로 진화했다. 뭘해도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었기에(군대에서 마저도!) 친구들과 선생님 양 편으로부터 ‘네 이름 참 자알 지었다'는 비아냥을 듣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건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이었고 그닥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못했기에. 그러나 ‘(결과는 없고) 이유만있다’ 식의 통사형 별명은 가장 오래 들어야 했으면서 가장 수긍할 수 없는 놀림이었다. 결과는 없었을지 몰라도 변명을 많이 하며 살진 않았다. 주관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였다. 그건 그저 내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만두나 만득이와 다를 바 없는 유치함으로 회귀한 거다. 하여간 나는 내 이름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며 살아온 거 같다. 아주 어렸을 땐 왜 내 이름을 이따위로 지은거냐며 자주 툴툴거렸다. 공동 책임자인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신문이나 야구중계 따위로 애써 눈을 돌리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늘 내 두 눈을 바로 보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네 이름은 아주 유명한 작명소에서 매우 많은 돈을 주고 지은 귀한 이름이란다. 그러니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단다.“ 할머니에겐 유명하고 비싼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유명하고 비싼 부적들'도 집안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야 했던건가 보다. 흡사 만신 집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베갯잎 속에도 아빠의 양복 속주머니에도 내 유치원 가방에도 곱게 접혀 들어 있었다. 우리가 할머니 집을 나와 독립하게 된 결정적인 사연이 되어 주었다.

  시간이 적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지금 저기 하늘나라에 계시다.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십 년 넘는 세월을 침상에 누워계신다. 그때 그 단호하고 우렁찼던 할머니 모습은 이제 없다. 이따금 할머니 허리 맡에 앉아 잠든 할머니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내 이름의 귀함을 역설하시던 그 눈빛이 떠오른다. 지금은 할머니가 구태여 그리 강조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내 이름을 아끼게 되었다. 있을 유(有), 늦을 만(晩). 천천히 살아가라는 뜻이다. 조금 돌아 가듯 사는 것, 그게 순리란다. 앞서가는 놈이나 뒤쳐져 따르는 놈이나 결국 긴 시간의 풍경 안에선 고만고만한게 아니겠냐, 질끈 그저 제 갈길 가다보면 뭐라도 되어있지 않겠냐. 나직이 내 이름을 발음해 볼 때면 어디쯤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해오는 것만 같다.

2015. 7. 15.

산책. 2015년 여름


2015년 여름












2015. 7. 14.

잊지 않는다는 것





  수년 전, 사회운동단체에 몸을 담았었다. 소위 ‘21세기적 새로운 운동 방향'에 대한 세미나와 열띤 토론이 거의 매일 있었다. 나는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종종 침묵했다.(그러면서도 2년을 있었다). 그들의 단호함, 확실함, 주저없음이 난 그저 신기하게만 보였다. 그 운동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 세상에 얼마간 기여를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여느 날과 같은 날이었다. 맑은 차 한 잔씩이 각자의 앞에 놓였다. 그날의 텍스트는 조성오 씨의 [철학 에세이]였다. 한 원로 선배(?)가 잠시 동석했다. 그 선배는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 “가장 중요한 운동의 무기는 ‘기억'이다. '기억'의 힘은 짱돌보다도, 대자보 한 장 보다도 강하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것에 각자 어떻게 반응했는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기억 투쟁'이다” 나는 저 장엄한 수사에 탄복했다. 놓칠세라 노트에 꼼꼼히 적어두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읊조려 보았다.

  지금도 이따금 저 말을 되짚는다. 기억. 잊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저항이 될 수 있다는 것. 삶의 테가 더해갈수록 그 말의 무게도 더해간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살면서, 부대끼면서 느껴가고 있다.

2015. 7. 12.

한여름의 판타지아


  어언 10여년 전 일이다. 나는 학교를 따분해하는 학생이었다. 상업 영화판 막내로 들어갈 기회가 찾아왔고, 덥썩 그 제안을 안았다. 영화 창작의 비밀이 도무지 궁금해서이기도 했지만 역시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여배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팬이었다.(지금도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새얼굴들 또한 눈에 들어온다.) 그녀와 함께 작업 할 수 있다니. 이건 뭐 꿈에서나 있을 (요즘 말로) 개이득이었다. 우리 팀의 첫인상은 좋았다. 사람 좋게 웃으며 나를 앉히고 갈비를 뜯겼다. 당시만해도 막내는 거의 인간 취급을 못 받았더랬는데(요즘은 어떨까?) 이들은 달랐다. 청소도 각자, 빨래도 각자, 어렵고 복잡한 건 선배들이, 야식 결제도 선배들이(아 얼마나 아름다운 원칙인가!). 내가 무슨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건가 싶었다. 흠모란 말이 모자라던 여배우에, 평소 좋아하던 감독님에, 이토록 인격적인 선배들이라니. 그러나 그것은 첫 한 달 동안의 이야기였다. 문턱을 넘어서자 비극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차마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시절 내가 당했던 모욕과 죽어라 내달렸던 뺑이질(이런 표현을 용서하시길.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은 지금 생각해도 저릿저릿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날이 많아 그 좋아하던 여배우 얼굴도 선명히 본 일이 드물었다. 나는 아직 미필이었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인지 군생활은 수월하게 한 편이다.(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첫 한 달만은 그러니까, ‘한여름의 판타지아’였던 셈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첫 전체 회식자리였다. 내성적인 성격이던 그 여배우는 스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고 갈채가 이어졌다. 그녀는 수줍게 푹 고개를 떨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가볍게 살랑거리는 몸짓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르는데, 정말 그녀가 내 맘에 들어오는 것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심히 요동치는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여자친구, 안보고 있지?) 인생의 베스트 장면 중 하나로 아주 잘 간직 중이다. 퍽 고달팠으나 또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덧1 : 그 여배우는 최근에 꽤 잘 생긴 남자배우와 함께 통속 멜로를 하나 찍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덧2 : 다섯 달 동안 그렇게 혹사 당하던 나는 백 만원도 채 받지 못하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지금도 한국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아주 꼼꼼히, 유심하게 살피는데, 그들의 이름은 여전히 오르고 있다. 잘 들 살아가는 모양이다.  (2015)

2015. 7. 4.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


“나는 사물을 보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무엇인가 자신의 일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물 여덟이다. 그런데도 나의 스물 여덟 해는 거의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카르파치오에 대해서 논문을 썼고 그것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희곡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릇된 관념을 애매한 수단으로 증명하려고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나는 시도 몇 편 썼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시를 쓰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침내 마지막에 겨우 열 줄 정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을 느껴야 하고, 아침에 피어나는 작은 풀꽃의 고개 숙인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또 미지의 나라들의 길, 뜻밖의 해후,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이별, 또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남겨 둔 어린 날의 추억, 모처럼 기쁨을 가져다주었는데도 그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잔혹하게 마음을 슬프게 해드린 양친에 대한 행동, 온갖 중대한 변화를 가지고 이상한 발작을 보이는 소년 시절의 병,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한 방에서 보낸 하루, 바닷가의 아침, 바다 그 자체의 모습, 저쪽 바다, 이쪽 바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덧없이 사라진 여로의 밤들, 그런 것들을 시인은 회상할 수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저 모든 것을 회상할 뿐이라면 사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추억이 많아지면 다음에는 그것을 망각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추억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느 시인의 고백] 중에서

2015. 7. 2.

산책. 2015년 여름


산책. 201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