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7.

있을 유(有), 늦을 만(晩)


  있을 유(有)에 늦을 만(晩)자를 쓴다. 풀이하자면 ‘천천히 살아라’쯤 된다.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였을까. 놀림도 참 다양하게 들었다. 최초의 별명은 만보계, 만세, 만두 따위였다. 퍽이나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쩌다 분식집에 가거나 급식에 만두가 나오는 날이면 괜시리 내가 먼저 움츠러들고 그랬다.(그렇다고 만두를 싫어해 본 적은 없습니다.😂) 만원권, 만득이로 이어지던 별명은 중학교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표의형으로 진화했다. 뭘해도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었기에(군대에서 마저도!) 친구들과 선생님 양 편으로부터 ‘네 이름 참 자알 지었다'는 비아냥을 듣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건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이었고 그닥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못했기에. 그러나 ‘(결과는 없고) 이유만있다’ 식의 통사형 별명은 가장 오래 들어야 했으면서 가장 수긍할 수 없는 놀림이었다. 결과는 없었을지 몰라도 변명을 많이 하며 살진 않았다. 주관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였다. 그건 그저 내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만두나 만득이와 다를 바 없는 유치함으로 회귀한 거다. 하여간 나는 내 이름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며 살아온 거 같다. 아주 어렸을 땐 왜 내 이름을 이따위로 지은거냐며 자주 툴툴거렸다. 공동 책임자인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신문이나 야구중계 따위로 애써 눈을 돌리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늘 내 두 눈을 바로 보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네 이름은 아주 유명한 작명소에서 매우 많은 돈을 주고 지은 귀한 이름이란다. 그러니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단다.“ 할머니에겐 유명하고 비싼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유명하고 비싼 부적들'도 집안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야 했던건가 보다. 흡사 만신 집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베갯잎 속에도 아빠의 양복 속주머니에도 내 유치원 가방에도 곱게 접혀 들어 있었다. 우리가 할머니 집을 나와 독립하게 된 결정적인 사연이 되어 주었다.

  시간이 적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지금 저기 하늘나라에 계시다.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십 년 넘는 세월을 침상에 누워계신다. 그때 그 단호하고 우렁찼던 할머니 모습은 이제 없다. 이따금 할머니 허리 맡에 앉아 잠든 할머니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내 이름의 귀함을 역설하시던 그 눈빛이 떠오른다. 지금은 할머니가 구태여 그리 강조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내 이름을 아끼게 되었다. 있을 유(有), 늦을 만(晩). 천천히 살아가라는 뜻이다. 조금 돌아 가듯 사는 것, 그게 순리란다. 앞서가는 놈이나 뒤쳐져 따르는 놈이나 결국 긴 시간의 풍경 안에선 고만고만한게 아니겠냐, 질끈 그저 제 갈길 가다보면 뭐라도 되어있지 않겠냐. 나직이 내 이름을 발음해 볼 때면 어디쯤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해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