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31.

2020. 12. 15.

2020. 11. 15.

양수검사, 클라인펠터, 이상없음, 새로운 영토


1.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아내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울먹이는 거 같았다. 침착하자고, 우선은 그것이 무언지에 대해 알아보자고, 각자 가만히 생각을 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다독였다. 전화를 끊고 숨을 몇 번 길게 내쉬었다 마셨다 했다. 검색을 시작했다. 많은 정보들이 있지는 않았다. 

2. 양수검사 전까지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럴 것이, 너무도 건강했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형태적으로 더 없이 안정되어 담당의로부터 줄곧 긍정적인 신호 및 언사를 들어왔다. 아이가 정말 건강하고 활달하고 포토제닉하네요. 물론 그 말들이 부모를 기분좋게 하려는 의도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체감에도 이 아이는 안정화 되어 있었으며, 지난 모든 검사 상 건강을 의심해볼 단서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지난 6개월이 흘러 온 것이다. 그 시간 위에 우리는 부푼 마음들과 여러 계획들을 쌓고 있던 참이었다.

3. 그리고 그날, 양수검사를 한 바로 그날, 1차 결과를 듣게 된 것이다. 양수검사 1차 결과 다운증후군, 파타우증후군, 에드워드증후군에 대한 이상 유무는 정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성염색체의 경우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아 2차 결과 때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는 되물었다. 성염색체가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 현재로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양법을 통해 2~3주의 시간이 지나 정확한 확인을 한 후 이상 유무를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염색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산모님 아이의 경우에는 남아이므로 클라인펠터를 의심해보게 될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아내도 나도 그날은 꼴딱 밤을 지새웠던 거 같다. 인터넷으로 찾고 찾고 또 찾았다. 클라인펠터. 이름도 낯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찾아보려고 했다. 각종 경험 사례들은 물론, 외국 학술논문까지 뒤져 사전을 짚어가며 읽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우선은 두어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5. 최종 결과를 받아들기까지 정확하게 19일이라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19일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이토록 애끓는 심정이 되어본 경험이 없었다. 부모가 아프고, 형제가 곤경을 겪을 때, 혹은 심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고통을 겪을 때 함께 아파한 일은 더러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고통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본 것은 거의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적은 이타심과 많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특히나 생경한 일이었고, 그 혼란을 감당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위안을 준 것은 이 상황을 똑같은 무게로 또렷이 직면하고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출근해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6. 우리는 19일간 그 일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견뎠다.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아내도 나도 그 일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하게 자리하는 일을 앞에 두고, 마치 그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건 앞서 말했듯,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일에 관해라면 운명이 결국 결정할 일이었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견디는 일 뿐이었다. 차분을 유지했던 것은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서라기보다 그게 유용해서였다. 침묵을 깨고 그 일에 관해 언급을 하는 일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었다. 그 일에 관해서는 그저 서로 응원의 눈빛을 주고 받는 일이면 충분했다. 그 밖은 넷플릭스로 본 드라마 이야기나, 수원삼성의 시즌 마지막 경기 이야기나, 무무와 함께 떠날 제주도 여행 이야기로 채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7. 19일이 지나 최종 결과를 받아 든 날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의 감격, 안도, 감사는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직감했다. 우리에게 '모든 염색체 수적 구조적 이상 없음'이라는 최종 진단만큼 중요한 것은 지난 19일간을 견디며 우리가 함께 새로이 들어선 어떤 영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아플 수 있고 우리 자신보다 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존재, 어떤 사건과 처음 만난 것이다. 예측 불능한 상황과 더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과도 더 자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 불가피한 영토로 들어섰음을 직감하며 무거워진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 하나의 존재를 감당하는 것으로도 버거워했던 게 바로 얼마 전까지였다. 가까운 미래에 이처럼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리라고는 그때엔 미처 알 수 없었다.   







2020. 9. 13.

루프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 정신없던 한 주였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밀려드는 일들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겨우 하나의 선을 찾아 간신히 붙들었고 그것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나왔다. 미노타우로스 미궁을 헤쳐 나오는 실타래 같은 한 주였다. 

2. 신선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여전히 외출은 줄여야 함에도 이맘때 찾아오는 싱그러움에 속절없이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 오늘은 삼청동과 한남동 전시들을 둘러볼까 했는데, 결국엔 못했다. 오전엔 교회 점검반 일을 해야 했고, 오후엔 주중 못다 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집에 돌아오니 좀 있으면 수원과 서울의 슈퍼매치가 있을 시각이었다.

3. 하지만 오늘도 수원삼성은 보란 듯이 패배하고 말았다.

4. 아, 어제저녁 아내와 에무시네마 루프탑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아내도 그 시간을 고마워했다.

5. 2019년 칸 영화제 내내 기생충과 더불어 가장 뜨겁던 화제작이었고, 지난 1월 개봉했으나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네이버로 다운을 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한 호흡으로 보아지지가 않았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끊어보았고, 어느 간격은 일주일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하는 게 옳을 터였다.

6. 루프탑엔 바람이 살랑였다. 하늘엔 별이 보였다. 비 온 뒤 기온은 조금 차갑기도 했지만, 준비해 간 경량 패딩의 덕을 보았다.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환경이 아니랄 수 없었다. 초록 동글뱅이 모기향이 타는 냄새. 그것이 만드는 작은 불씨와 연기. 그것들 사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7. 마치 작은 기적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타닥이는 불씨와 살랑이는 바람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와 모닥불 아래 오롯이 따스한 공동체가 되는 자매들의 이야기였다가, 거친 파도와 불어 치는 바람 가운데 곧 다가올 이별을 묵묵히 받아 들고 그 운명을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모닥불 주변에 모여든 축제의 여인들이 내던 공명의 화음처럼, 나는 이 영화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물리적 공간 사이 공명에 대해 생각했다.  

8. 또한 오르페우스의 신화의 변용. 이 여인들은 서로를 끝내 저 심연에 두고 나와야 하는, 서로가 서로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에우리디케가 되어야 하는 스산한 운명을 그저 받아 들었다. 누구를 탓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변혁과 저항의 깃대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운명을 받아 들고 서로를 추억하기로 결심한 저 결단들, 감정들, 그 이후의 삶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온도로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 차갑다고도 할 수 없고 따스하다고도 할 수 없는, 가장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저 응시의 태도에 관해 생각했다.   



2020. 9. 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말


칠흑같은 어둠속에도 시는 존재한다. 그대들을 위해서.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20. 8. 17.

아빠가 된다

아빠가 된다. 기쁘고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던데,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기쁨뿐이다.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걸까. 하여간 이 느낌을 어떻게든 정리해두어야겠다. 달리 좋은 방법을 몰라 캠코더를 꺼내들었다. 스스로 얼굴과 음성을 기록했다. 짧은 생각들과 많은 머뭇거림이 레코드되었다. 생각날 때마다 일기장 삼아 꺼내기로 하였다. 말이 하지 못하는 것은 표정이 할 것이다. 표정이 하지 못하는 것은 침묵이 할 것이다.







2020. 7. 12.

[여행자] 그리고 박원순



1.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작동하는가를 알 수 없을 때 내가 줄곧 떠올리는 영화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다. 신분을 바꿔치기한 남자의 스릴러적인 여정을 담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드라마에 관해 영화는 아무런 관심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로크는 어째서 로버슨으로 살아가기로 한 걸까(현명한 아내가 있고,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명망도 있는 그가 어째서? 더구나 그가 바꿔치기한 로버슨이란 인물이 대단히 매력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뭔가 그가 희구했던 삶의 보장을 가졌다 보기 힘든데?). 이 질문은 영화를 본 모두에게 찾아들 것이나, 영화는 끝내 그것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서사의 찜찜함을 남기지는 않았겠지만 이토록 오랜 걸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이 영화는 로크의 동기를 너무나 무심히, 너무나 뻔뻔히 끝까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태도의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끝내 알 수 없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누구도 이 남자의 동기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로크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죽지 않고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면, 아마 단서가 될만한 몇 가지 정황을 내놓았을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으로 결코 진실을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 로버슨으로 살기로 했는지, 왜 목적도 없는 여행을 시작했는지, 우연히 만난 소녀와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아니 처음부터 그런 계획들이 있기나 한 것이었는지, 영화도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 안토니오니 조차도 몰랐(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불가지론의 태도, 부조리의 체념적 수용이야 말로 [욕망], [정사], [붉은 사막], [자브리스키 포인트] 등을 통해 줄곧 견지해왔던 그의 인장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3. 원대한 이상주의자이자 영민한 현실 개혁가였던, 무엇보다 현직 수도 서울의 수장이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그중에서도 [여행자]를 떠올렸다. 그 떠남을 설명할 아무런 동기가 로크에겐 없었지만, 이 남자에겐 (사법상 확정되지는 않았으되) 죽음을 추적할만한 유력한 정황이 있다는 점은 물론 차이로 있다. 아직 장례가 진행 중인 한편, 슬픔과 분노, 추론과 억측, 합리와 비이성이 뒤엉켜 있는 지금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 남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결국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누구에게도 이 사건에 관해 진실로서 단정할 만한 무엇이란 건 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자신, 이 남자의 가족, 이 남자와 함께 했던 사람들, 이 남자로부터 피해를 입었을지 모를 사람들, 이 남자의 가치와 지향을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 했을 그 모두가 패배자로 남게 될 것이란 사실 외엔. 따라서 이런 방식의 죽음은 최악의 방식이란 사실 외엔. [여행자]에서 로크가 인터뷰한 한 아프리카 게릴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을 더 드러낼 뿐, 결코 타자를 더 잘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2020. 7. 5.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



1. 아인이와 재인이를 만났다. 재인이가 세상에 난 지 한 달쯤 못되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8개월 만이다. 그 사이 세상은 거대한 전기를 맞아 둘로 나뉘었다. 이 천진한 것들은 몸집이 약간 불고 자기표현을 좀 더 분명한 쪽으로 내뱉을 수 있게 되었으되, 둘로 나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예쁘고 티 없는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실에 깊은 유감이 들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밥을 다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나서는 길에 아이들은 제게 어울리는 귀여운 마스크를 착용했다.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나는 이 얼굴들을 여러 장 사진에 담았다. 하여간 이 근원적 체제를 생성하고 유지하고 떠받드는 무수한 생활 가운데 있는 한 어른으로서 깊은 죄책감이 들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조용한 바다]를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서였는데, 아인 재인과의 식사가 일찍 끝나, 그 전회차 상영 시각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하게 되었다.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에토레 스콜라)이란 (내게는 듣보잡의) 영화가 상영될 참이었다. 볼까 말까 하다가 열감지 카메라를 통과한 김에 그냥 보기로 했다.

3. 에밀 쿠스투리차 [집시의 시간]과 배창호 [꼬방동네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공간의 설정과 등장하는 캐릭터(도시빈민들)의 인상 때문이다. 앞선 두 영화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그냥 취향에 안 맞아서), 이 영화는 그냥저냥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일단 한정된 공간(도시 중심과 유리된 언덕배기 빈민가)에서 모든 사건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야말로) 혼돈의 가족(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들)만이 등장하여 이 모든 소란을 이끌어간다.

4. [집시의 시간]에 있는 것이 여기도 있었다.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것이랄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정서가 하여간 여기에도 있다. 복잡한 가계도(라 쓰고 개족보라 부른다)도 그것이거니와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서 터지는 B코드 유머(분명 죽었어야 마땅한 아버지가 살아났다!)에 더해 반복되는 몽환적인 음악(지나치게 반복적이어서 한동안 귓전에 맴돈다)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모든 불협화음과 동시에 '사실적'이다. 그래 저럴 수도 있지.

5. 극장을 나서 삼청동으로 걸었다. 학고재 전시를 보고 싶었는데 7시가 넘어 도착해 문을 닫았다. 바로 옆 블루보틀에서 머그잔을 사고 핫초코를 마셨다. 자신들이 생산하는 음료에 자부심이 높은 점원은 나더러 뚜껑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까닭으로 우유와 함께 마셔야 제대로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논거를 달았다.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한 잔의 음료일지언정 저 정도의 단호함과 떳떳함이라면 충분히 그 의지를 따라야 하는 게 맞는 처사일 것이었다.





인생영화 2020



인생영화를 돌아본다. 이 일은 5년에 한 번씩 하기로 한 바 있다. 2015년에 했으니 올해 할 차례가 된 것이다(인생영화2015).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든다. 프랑수와 트뤼포도 그랬고, 마틴 스콜세지도 그랬다. 박찬욱도 그랬고, 봉준호도 그랬다. 감독도 평론가도 아니나, 나에게도 그런 리스트가 있다. 다만 내겐 시대를 초월해 두고두고 여러 삶에 영향을 끼칠 걸작들을 알아볼 눈이 일천하므로, 그저 삶이 어딘가 무력해지거나 잘못되고 있다 싶을 때마다 꺼내보았던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 목록은 걸작의 목록이 아니라, 정서의 치료제 목록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혹은 2020년 오늘, 생활의 지향 내지 지침의 목록이라 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2020. 6. 22.

수원 또 패배


수원삼성의 대역전패를 지켜보면서 매우 참담한 심경이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니지만 패배는 늘 똑같이 쓰리다. 쓰리고, 서글프고, 억울하다. 내가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이 팀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주고 있는가. 불현듯 승패가 없는 세계에 몸을 누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가까이 보이는 무무를 끌어안는 일 외엔 그 즉시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일이 작은 안정을 주었다. 그랬으되 상쇄가 되지는 못했다. 




2020. 6. 7.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2016)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스테레오 영상, 단채널, 약3분, 2016




2020. 6. 3.

드로잉들


George Floyd. 종이에 연필. 2020

명상. 종이에 연필. 2020

그녀의 그녀. 종이에 연필. 2020

그리는 남자. 종이에 연필. 2020

바라보는 남자. 종이에 연필. 2020

봄 나들이 장소 고민하는 아내. 종이에 연필. 2020

소. 종이에 연필. 2020

소녀. 종이에 연필. 2020

바라보는 남자2. 종이에 연필. 2020

2020. 5. 31.

침묵과 응시의 예술


1. 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침묵이다, 언젠가 김수영의 이 말에 밑줄을 그으며 떠올렸던 것은 시네마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게 있다면 그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2. 이미 너무 많은 서사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일상대화에도 뉴스에도, 문학에도, 역사에도, 무대에도, 정치에도. 그래왔고, 그럴 것이었다.

3. 허우 샤오시엔, 위라세타쿤 아피찻퐁, 차이밍량, 로베르 브레송, 칼 테오드르 드레이어 등. 몇 이름들만을 남겨두고, 갈수록 나는 영화에서 점점 애정을 거두어 왔는데, 시네마의 본령이란 서사의 실어나름과 거의 무관한 일임에 관한 생각을 얻고부터였던 거 같다.

4. 침묵의 예술. 응시의 예술. 이미지의 운동과 사운드의 진폭만으로, 그저 사태를 '바라보기'만 할 뿐으로 저 깊은 곳에 가닿는 작업들. 관객 스스로가 그 심연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도록 이끄는 예술들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더해갔다.

5. 시네마와 미디어아트의 경계는 점점 흐려가고 있을 것이나, 아직까지 적잖은 수의 시네마와 미디어아트가 서사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6. 국립현대미술관 [수평의 축]展에 다녀와 (시그니처 작품이랄 수 있는) 리사 아틸라의 미디어 작업을 보면서, 깊은 감동으로 이끌린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촬영된 한 그루의 나무를 다채널 분할화면에 담아 동시에 영사하는 방식의 작업이었는데, 무엇보다 나는 이 작업에 담긴 작가의 '무심한 태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7. 앞서 언급한 바,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서사 강박은 주로 인터뷰의 형태, 추상적이고 자기현시적인 내래이션으로 반복 재생산 되어지고 있다. 그런 작업들은 이미 너무 많다. 많기도 하거니와 그 이야기란 걸 잠자코 들어보면 하나마나한 소리이거나 작가 자신의 세계안에서만 수용되고말 뿐인 언어의 나열인 경우가 대부분임을 어렵잖이 알아챌 수 있다.

8. 보는 이가 스스로 그 작업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작가는 그 발들임의 문간에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서사들, 너무 많은 언어의 나열은 (내 생각에) 좋은 예술이 할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그런 예술은 관객과 예술이 관계맺는 과정에서 관객의 자기창조를 가로막고 무력감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9. 그러니 시편이든 시네마든 회화든 설치든, 앞으로도 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침묵하고 있는가'이며 그 침묵과 응시의 사려깊음 만큼이 그 예술의 깊이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 5. 9.

남화연 [마음의 흐름]



1. 남화연은 최승희의 무엇에 그토록 이끌렸던 걸까. 2012년부터 근 10년을 아카이빙 해왔고, 그 흔적의 나열이 이번으로 벌써 수차례라 한다.

2. 나 역시 많은 예술가들을 동경해왔고, 그중엔 여전히 삶의 지침으로 삼는 이들이 몇 있다. 마음이야 그러므로 헤아릴 듯하나, 남화연처럼 한 인물과 그 삶에 대한 꾸준한 들여봄과 수집행위로서 자신의 창작을 이어가는 사례는, 내 경험과 이해가 일천한 탓인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다.

3.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신기했다. 최승희가 누군지, 남화연이 그의 무엇에 그토록 사로잡혔는지는, 실은 내게 그다지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한 작가가 자신의 작업세계를 채워가는 이같은 방식과의 만남이 의미라면 의미가 될 터다.

4. 오브제들을 부러 이쪽저쪽 방향으로, 높낮이를 위아래로 달리해가며 배치한 방식이 재밌었다. 그러니까 작업들을 찬찬히 들여 보려면 몸을 많이 움직여야만 했다. 누군가가 관람객들을 버즈아이뷰로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남화연과 최승희가 봤다면 흡족해했을지 모를 장면이라고도 생각했다.












2020. 5. 6.

너무많은재난들


너무많은재난들. 종이에 연필과 마카, 오일파스텔. 2020

너무 많은 재난들이 속절없이 흘러다닌다. 재난이야 늘 존재했지만, 이토록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며 당사자성을 확인시키는 류는 좀처럼 마주하기 어려운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이 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못할 심리적 재난이라면, 작금의 재난은 그야말로 피부와 호흡, 생식과 감각의 재난이며, 사태의 종식과 무관히 습관으로 새겨질 실존의 재난이다. 삶을 가까스로 버티어 선 사람들이 보이고, 버티어 서려다 대롱대롱 끝내 저 아래로 추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너무 많은 재난들. 이 가운데, 38명의 근로자들이 집단으로 불에 타 죽었는데, 그것쯤은 그냥 흘려보내도 어쩔 것인가의 생각들이 있다. 수십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온라인 강간에 가담했는데 어쨌든 나완 무관한 일이 아닌가 빗어 넘기려는 태도들이 있다. 너무 많은 혐오들, 너무 쉬운 구별짓기.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재난들, 재난들, 재난들. 


2020. 5. 4.

장 르누아르의 말



"그러므로 우리들은 추억의 마법에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변해버린 세계의 지옥 속으로 단호하게 뛰어드는 일이다. 그것은 수평적으로 분할된 세계이고 실용적인 세계이며 열정이 사라진 세계임과 동시에 향수도 사라진 세계이다."

- 장 르누아르,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중에서



2020. 4. 5.

천변풍경, 함미나 [Idleness]



1. 무무를 데리고 동네 천변 산책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벚꽃은 잘도 흩날리고 있었다. 저들을 (포함한 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결국 고통받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사라진다면) 자연은 언젠가 제 모습으로 회복해갈 것이다. 오직 사람이, 그 안에서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오염으로 신음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더 매정하고 무서운 것이다.

2. 무무의 천연한 눈망울은 그것이 자연의 편에 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3. 함미나 [Idleness] 전에 다녀왔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혼돈의 심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가(가 대변하는 시대의 얼굴들)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널 쏴 죽이겠다'라고 했다가, '깨어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가, '자살의 풍경'을 먼발치서 바라보다가, 다시 '널 쏴 죽이겠다'라고 한다. 도리 없는 분열증의 상황. 타깃은 과연 찾아낼 수 있는 걸까. 좌절과 불안은 고스란히 이들 몫이지만, 그를 생산해낸 건 이들이 아니다. 명징한 적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적은 여전히 특정할 수 없으며, 그 힘은 가공할 수준으로 더욱 비대해간다. 으스러진 머리, 흘러내리는 얼굴은 이미, 쏘려고 총을 든 자의 것이다. 무얼 쏘겠다는 걸까. 무얼 쏠 수는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