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9.

탈스마트


1. 스마트폰을 없앴다. 폴더폰을 다시 쥐었다. 많이 불편했다. 7년의 습은 무서운 것이었다. 두 달 째. 아직도 적응은 안됐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2. 비슷한 시기에 두 작품이 개봉했다. 둘 모두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일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참혹에 접근하는 이들 각자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누구나가 아픔을 품고 산다. 나 역시 내 몫의 상처와 함께 산다. 누군가 내 상처를 극화하고 싶다한다면, 나는 원치 않을 것이다. 내 상처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설득에 끝내 넘겼다하더라도, 매끈하거나 낱낱하게 그려지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의 태도에 관해 말했다. 더 거들고 싶지 않다.  

2016. 2. 19.

시를 품은 사람들


시인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시를 가슴에 품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한 번도 시인이 되길 바라본 적은 없지만 시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꿈꿔왔다. 안 되는 일이다. 나는 힘들다. 오래 들여 보는 일. 오래 느껴 보는 일. 터져 흐름을 참지 못하는 일. 그러나 삼켜야 하는 일. 불가능한 언어에 도달하는 일. 아니 아무래도 좋은 일. 결국 실패하고 마는 일. 그 외로운 탐사. 서글픈 산책. 부끄러움. 부끄러워 하는 일. 그렇다. 부끄러움. 세상 모든 것에 부끄러워하기.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일. 부끄러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일. 기꺼이 죽겠노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일. 동주도 몽규도 누구도, 그 부끄러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가슴에 시를 품은 사람들. 바람이 되고 별이 된 사람들.

여자친구


괜한 물음이 하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파고든 품이다. “만약만약에 내가 죽으면 자기 어떻게 할거야?” 그녀는 잠시 생각을 골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같이 따라 죽을거야. 못 살거같아.” 어색한 정적. 나는 속으로 피식거렸다. 이 여자, 오늘 왜 이래.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다. 더 악물고 살았으면 살았겠지. 그녀도 나도 아는 거짓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스르르 녹았다. 이상한 일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 곁에서 잘 때 할아버지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던 그 감각으로 젖어 들었다. 나는 홀아비 냄새로 온 벽지가 눅진 그 방을 몹시 좋아했더랬다. 더 깊숙히 그녀의 품을 파고 들었다. 몸 냄새가 너무 좋았다. 밀크향 베이비 로션 냄새다. 라면 스프 냄새 다음으로 좋아하는 냄새.(이건 아닌가.) 따뜻했다. 익숙하고 기분 좋은 밤이었다.

2016. 2. 14.

이동진, 캐롤


그냥 쓰는 포스팅. (with 부라더소다 한 병)

1. ‘캐롤 논란'에 대한 이동진 씨의 대응은 그가 얼마나 영화를 깊고 성실하게 보아내는 직업 평론가이며 또한 그 자신의 생활을 엄정한 준칙 아래 운영해 나가는 사람인가를 함께 보여주었다.

2. 그건 애당초 논란으로 번질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추이를 지켜보며 누가 이 논란을 주도하고 싶어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특정 대목을 떼어와, 특정 단어(부사 ‘하필’)에 지엽적으로 집착하여 논란을 생산하고 거기에 부나비마냥 뛰어든 이들은 그냥 이동진 씨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3. 물론 듀나 같은 합리적 비판론자가 와중에 없었던 건 아니다.(나는 그이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4. GV를 무슨 창작에 기여한 이들-감독, 배우 등-만 나와서 해야 하는 신성한 자리쯤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오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특히 듣고 싶어하는 자리라면 누구라도 게스트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5. 이른바 ‘문화 권력'의 자리까지 점하게 된 오늘날 이동진 씨 지위의 배경에는 책, 영화 등을 보고 나서 누군가의 정돈된 생각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의 존재ㅡ산업적 수요가 있었다.('읽고’ 싶어했던 지난 시절엔 집집마다 [창비 계간지]와 [키노] 한 권씩이 꽂혀 있었듯.) 이동진 씨는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마케팅하는 일에 다만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욕망이자 직업윤리였을 뿐 그를 저 권력의 자리에 부러 올려 놓도록 촘촘히 설계된 인과 기제가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주어진 힘을 남용하여 타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거나 누군가에 특정 사고를 강제한 일이 없었던 한엔 전혀 문제될만한 일이 아니다. 더이상 이동진 씨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동진 씨의 방송과 GV 행사도 문을 닫을 것이며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6. '나는 그냥 네가 너라서 싫다'는 태도는 이미 너무 만연한데 그 까닭 중 주요한 하나는 그 혐오증을 부추기는 이들이 지난 날 지켰던 심리, 경제, 사회적 자리가 점점 좁아져가고 있는 현상이다.(그리고 그 영역은 만회될 전망이 좀처럼 없다.) 부당한 특권이 아니었다면 그 상실은 위로받아야 마땅한 애잔함이고 표출되어야 마땅할 분노감이다. 하지만 까닭이야 무엇이건, 방향은 언제나 영문없이 멱살잡혀 단두대에 세워질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을 애써 좁히고 왜곡함으로써 모종의 편익을 취해내려는 어떤 세력과 구조를 향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이 힘들다고 애꿎은 사람을 볼모로 잡아선 안된다.

진보마초란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있었다. 그럼에도 회의 시스템은 매우 성실히 유지됐다. 그만큼 우리가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할 필요 때문이었다. 나는 회색분자였다. 이것도 옳은 것 같았지만 저것도 옳은 것 같았다. 이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지만 저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앙칼진 답이란게 있었으면.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랬다면 그토록 눈치보며 괴롭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확해야 하고 묵직해야 하고 단호해야 한댔다. 모든 게 실행을 위한 준비이므로. 발을 내딛고, 구호를 외치는 일에 망설임은 최대의 적이었다. 한 번 전선이 세워졌으면 진탕 휩쓸려 싸우고 돌아와야 했다. 그게 우리의 일이었다. 그 시절 써냈던 수많은 성명서, 선언문들.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나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채로 쓰고 썼다. 그게 내 입장이 되었고, 행동의 준칙이 되었고, 삶의 구성이 되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그 단체를 나왔다. 그곳은 나름 신사회운동을 지향하는 곳이었다. 노동가를 부르거나 빨간 조끼를 입지 않아도 되었다. 생태, 여성, 탈핵, 자급자족, 제도교육 거부 등을 지향하는 고상한 곳이었으니. 제3세계 좋은 음악을 들으며 이반 일리치를 읽고, 에른스트 슈마허를 강독했던 곳. 우리는 순수히 현재를 사랑했고 미래를 낙관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미련없이 돌아나왔다.

  운동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운동만으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절실히 깨달았다. 그 믿음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 하나 뿐임을, 나는 처절하게 배웠다. 온갖 멸시 속에서, 시선의 폭력 속에서. 운동은 실행이고, 실행은 부득불 힘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은, 조직적으로 규합될 필요가 있을 때, 결코 다양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작은 소리는 제 영역을 얻기 위해 투쟁 안의 투쟁을 해야 한다. 운동은 태생적으로 마초다. 여성 운동가들은 늦든 빠르든 남성성을 체현하게 된다. 거기엔 거의 예외가 없었다. 더 강한 옷을 입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힘으로 움직이는 모든 집단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유형의 조직뿐 아니라 가상의 조직에서도.

  나는 이 자매들을 사랑한다. 이 자매들은 멋지다. 누구보다 집단과 사회의 근원적 생리를 간파한 사람들이다. 그랬을 뿐 아니라, 거기에 맞는 오직 자신들의 실천을 한다. 이게 섹시한 진보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런가. 그녀들의 발언에 나는 여러차례 고개를 숙였다. 내 안에 지워내지 못한 가부장성, 쓸데없는 권위 의식을 그녀들은 돌아보게 했다. 많이 털어냈다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한참은 더 털어야 한다. 끝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다.



‘효녀연합’ 홍승희, 홍승은 자매 인터뷰 “진보 마초란 있을 수 없다”고영득 기자 godo@kyunghyang.com 
‘대한민국효녀연합’ 홍승희씨(26)는 최근 ‘여성비하’ 논란으로 시달렸다. ‘사회적 예술가’인 홍씨는 소녀상 시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각에서 그의 활동보다 외모와 여성성을 부각시켰다. ‘얼굴 이쁜 개념녀’라는 여성차별적 시선은 물론 ‘효녀연합’을 지켜주겠다는 ‘오빠연합’까지 등장했다. 이에 대해 강원 춘천에서 ‘인문학카페 36.5도’를 운영중인 언니 홍승은씨(28)는 “내 안의 아베나 어버이연합은 보이지 않느냐”고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동생을 들들볶아 페미니스트 만든다’는 따위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 조롱들 대부분은 진보적 정치 성향의 남성들로부터 나왔다.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홍 자매를 둘러싼 공방전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은 11일 홍 자매와 인터뷰를 했다.
홍 자매는 최근 논란에 대해 “차라리 일베같은 사람들이나 커뮤니티로부터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대승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을 마녀사냥하고, 벌레 취급하는 것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던 진보가 무엇인지 의심하고 회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진보운동을 보수·진보의 양자구도로 바라보는 ‘편의 논리’가 낳는 폭력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진보마초란 있을수 없는 단어다”라며 “성찰없는 진보는 생각없는 보수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 자매는 “스스로 성찰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며 “우선 나부터 내 안의 여성혐오와 자기혐오의 정서를 성찰하고 내 삶을 회복해가려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더 이상 이미지화 되기 싫다”는 인터뷰이들의 요청을 수용해 홍 자매의 얼굴 사진은 게재하지 않았다.
-최근 SNS상에서 자매를 놓고 ‘여성비하’ 논란이 발생했다.
홍승희 “여성혐오 정서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성혐오란 여성들을 대상화·도구화하는 정서를 말한다. 효녀연합을 두고 ‘개념녀’, ‘미소녀’라고 이름붙이고 젠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꼴페미’, ‘메갈충’이라고 이름붙이는 것도 그렇다. 온라인에서는 이것을 마치 놀이문화처럼 즐기고 있다.”
홍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여성이 남성을 위안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온 극단적 성적 대상화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온 효녀연합을 ‘미소녀’, ‘개념녀’로 명명하는 미디어와 일부 여론의 동향은 문제의 본질을 또다시 반복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지적하자 ‘꼴페미’, ‘벌레 같은 페미니스트’라고 조롱당했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한국사회 여성혐오의 한 모습이다. ‘오빠가 허락한 사회운동’,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말처럼 운동진영 내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다. 운동진영 내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표현의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본인들에 대한 비아냥 글들이 게시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을 때 심정은 어땠나.
홍승은 “글을 쓰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인 줄 몰랐다. 원색적이고 조롱섞인 말들을 볼 때마다 ‘묻지마 폭행’을 당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아팠다. 온라인상 폭력이 개인에게 얼마나 큰 인격적 상해를 입힐 수 있는지 체험했다. 차라리 일베같은 사람들이나 커뮤니티로부터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나름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대승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을 마녀사냥하고 벌레 취급하는 것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던 진보가 무엇인지 의심하고, 회의하게 되었다.”
홍승희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 특히 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상식적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언니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언니가 아닌 오빠였다면, ‘동생에게 질투심이 있다, 열등감이 있어서 저런다’라고 말했을 것 같지 않다.”
-일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넘어 ‘표현의 폭력’을 행사하는 심리적 기제는 뭐라고 보나.
홍승은 “온라인의 익명성이 훈련되지 않은 자유의 이름으로 남용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서로 간의 책임이 있어야 하고, 문제가 일어났을 때 시스템상 그것을 제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두 가지 다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도 큰 작용을 했다고 본다. 페미니즘을 휴머니즘과 다른 개념으로 보고, 어떤 이익추구나 편협한 생각 정도로 보는 정서가 만연하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나 생태운동과 같다고 본다.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선택적 정의가 아닌 모두가 젠더 이전에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기를 원하는 보편적 정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불편함을 ‘예민하다’, ‘꼴페미다’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안타깝다.진보운동을 보수·진보의 양자구도로 바라보는 ‘편의 논리’가 낳는 폭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편’에 도움이 되는 말은 적극 수용하지만, 모두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젠더에 대한 문제제기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 편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란 무엇인가.
홍승은 “여성혐오는 여성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모든 문화를 말한다.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자니까 무엇을 해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감상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등 ‘만들어지는 여성’을 거부한다. 그러한 시각을 통해 성녀와 창녀를 구분 짓고,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 전에 대상화하는 모든 행위를 여성혐오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이 일부 진보성향 남성들의 여성혐오가 본질이라고 보나.
홍승희 “맞다. 여성혐오는 이념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사회를 바꾼다는 이들조차 여성혐오 발언에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할 만큼, 여성혐오의 정서는 은밀하고 구조적이다. 그래서 진보진영에서조차 젠더문제는 대승적인 정치사안보다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진보 내부에서 존재하는 여성혐오 원인은.
홍승희 “진보진영에서 젠더문제는 노동문제, 통일문제, 국제문제 등의 대의보다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문제다. 사소해보이는 일상조차 변혁하지 못하는 운동에 아무리 대의명분에 따라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해도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삶을 등진 혁명’보다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문화혁명’이 더 절실한 이유이다.”
-일부 정치적 사안은 진보성향이라고 해도 여성차별적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진보라고 불러야 하나.
홍승희 “맞다. 진보마초란 있을 수 없는 단어다. 젠더감각은 인권감수성의 기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느끼는 것이 진보의 기본이다.”
홍승은 “소수자, 다양한 사회의 목소리를 귀 기울이지 않고 진보는 없다. 성찰없는 진보는 생각없는 보수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소녀상 지킴이 활동이나 인문학 카페를 운영하면서 여성혐오적인 체험을 한 적이 있나.
홍승희 “효녀연합 활동을 하면서 언론은 ‘개념녀’, ‘미소녀’ 등의 이름을 붙였다. 국정교과서 1인 시위를 했을 때도 ‘광화문녀’, ‘시위녀’ 등으로 기사화된 적이 있었다.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여성성만 부각되어 유통되는 것이 불쾌했다. ‘촛불소녀’도 마찬가지다. 사실 인간으로서 행해왔던 모든 활동에 꼭 ‘녀’의 이름이 붙는다. ‘‘얼굴도 예쁜데 개념도 있네’ 혹은 얼굴은 예쁜데 개념이 없네’ 등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를 항상 포함시키는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다. 최근 오빠연합 같은 경우에는 ‘효녀연합을 지켜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성을 남성에게 지킴을 받는 존재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관점이다.”
홍승은 “인문학카페를 운영하면서 특히 여성리더이기 때문에 마주하는 편견이 있다. 여성은 감상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남자 후배들을 종종 목격한다. 실제로 같은 말을 남자 선배가 이야기하면 수긍하면서 내가 이야기하면 여자니까 만만하게 보거나 비이성적이라고 비난하는 경우를 목격한다. 여성은 사회운동 중 발생하는 경제문제를 나중에 결혼하면 해결할 수 있으니 마음 편히 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도 듣는다. 나는 남편에게 기대면 되니까,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일상적으로 카페에 찾아와서 마담취급을 하거나,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하는 남성들을 자주 접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왜 뿌리깊은가.
홍승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것이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혐오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화되지 못한다. 그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꼴페미’가 되거나 ‘개념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혐오는 잘 해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여성혐오는 여성들 스스로에게 자기부정의 감정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도록 교육받아온 여성들은 여성혐오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여성혐오를 줄일수 있는 대안이 있을수 있는가.
홍승희 “나부터 각성하는 수밖에 없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각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새로운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고민 중이다.”
홍승은 “스스로 성찰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나도 여성으로 교육받으며 가지게 된 코르셋을 벗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다. 그래서 더욱 여성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모든 인간이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한 인격체가 되기를 바라는 페미니즘이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관점에서 모두에게 통용되길 바란다. 페미니즘이라는 언어의 편견을 벗고, 제대로 알아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는 한국사회는 어떤가.
홍승희 “상처가 많은 사회다. 여성혐오 기저에는 열등감과 죄책감이 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너무 많은 폭력을 목격하며 자란다. 이 상처를 이야기할 곳이 없다.”
홍승은 “한국사회 가장 큰 문제는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것이라 생각한다. 질문 없이 열심히 삽질하는 보수 세력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보운동을 하는 우리 역시 언제부턴가 ‘왜’라는 질문 없이, 관성적으로 운동을 해온 건 아니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다. 이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질문과 주저함이 사라지는 순간,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다. ‘핵심적인’ 사회문제가 있고, ‘부차적’ 사회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유는 끝나고 파시즘적인 운동방식으로 변질될 수 있다. 끊임없이 성찰하며 활동을 해야만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뭔가
홍승희 “모든 사람이 직업, 나이, 성별, 인종, 종교, 국가, 학력, 연봉, 주거, 지역 등과 같은 조건에 상관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고 존중받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게 무너졌기 때문에 사회가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한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란 피켓을 들고 어버이연합 회원들과 맞섰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홍승은 “애국, 국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국가를 사랑한다’, ‘민중을 사랑한다’는 말은 매우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권이 사실은 주류계층의 권리에 한정된 개념일 수도 있다는 말을 접했다. 국가나 민족의 동질성이 강조됨으로써 개개인의 정체성과 각자의 당면문제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애국이 아닌, ‘어떠어떠한 인간에 대한 사랑’, 자신의 위치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문제제기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본다.”
홍승희 “예전에는 애국, 인류애 등을 쉽게 말해왔다. 이제 애국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삶을 대한다. 애국이라는 대의와 사명감으로 시작한 애국이 얼마나 자기를 소외시키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는 보수우파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도 보여줬던 위험성이다. 아이들을 구하지도 못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부르짖는 애국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지금 한국사회가 보여주고 있다.”
-홍 자매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홍승희 “폭력이 없어질 수는 없다. 적어도 이 폭력 한가운데서 더 많은 폭력에 기여하거나 타협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누구도 폭력을 고발하는 데에 소외되지 않는 세상, 혼자서 분노하고 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홍승은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모두가 외롭고 불안하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결핍이 자꾸 개인에게 흐른다. 열등감과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문제다. 학벌, 직업, 돈, 성별, 외모, 장애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세상을 꿈꾼다. 스스로가 당장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주위부터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망을 조금씩 확장해가고 싶다.”
-앞으로 무엇에 집중할 생각인가.
홍승은 “인문학카페 36.5도를 운영하며 지난 2년간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다. 이제는 ‘우리의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담론을 확산하고 발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나’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찰하고 글을 쓰며 계속 사유를 점검하고 다듬을 계획이다. 이러한 글쓰기 문화를 확산하고 독립출판 등을 통해 공론화함으로써, 사적인 목소리가 공적으로 전환되는 통로가 되고 싶다.”
홍승희 “효녀연합 퍼포먼스 이후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해온 운동방식을 성찰하게 됐다. ‘정치혁명’ 이전에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승적인 대의명분 이전에 사소하다고 치부해온 폭력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이자 해결방법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온 젠더문제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젠더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기초적인 인권감수성의 회복 문제다. 모든 사람들이 젠더감감을 회복할 때, 세상의 본질적인 변화가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운동, 여성운동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우선, 나부터 내 안의 여성혐오와 자기혐오의 정서를 성찰하고 내 삶을 회복해가려 한다.”

2016. 2. 12.

춘절 선물


감독님께서 새해 선물을 보내오셨다.












2016. 2. 10.

소포


소포를 받았다. M에게서 온 것이다. 번쩍이는 은빛깔 서류봉투. 뭐가 이리 두툼한지. 세 달치의 책이 들어있었다. 그는 국내 굴지의 모터바이크 잡지사 기자다. “M기자"라는 호칭을, 그러나 그는 무척 싫어한다. 김꽃비를 좋아하지 않냐며, 그녀가 이번호의 인터뷰이였다고 부러 보내온 것이다. 김꽃비의 기사를 훑고 다른 면들을 뒤적였다. 바이크는 1도 모르므로, 온갖 브랜드와 장비와 소품들로 도배된 그 잡지를 오래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나는 M이 얼마나 가혹한 노동착취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목격했다. 한 권의 책 절반을 그가 써내고 있었다. 기사를 쓰지 않았으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지 않았으면 모델로 출연을 했다. 너무 하잖아 이건. 책을 덮었다.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야, 솔직히 500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는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샹, 그냥 재밌어서 하는거여.“ 재미. 알지. 넌 그랬지. 그는 그랬다. 중학 때 밴드를 만들었고, 스물도 되지 않아 인도를 횡단했고, 시골 할머니 댁 옆에 작업실 겸 와인 하우스를 만들었다. 모두 제 손으로. 지금도 단지 제게 끌리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멋진 새끼. 날 좀 풀리면 텐트나 치러 가자는 말로 전화를 닫았다. 비닐은 어찌나 은색이던지,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냈다. 눈이 시큼했다.

2016. 2. 7.

사람이 보이는 글


  도저한 구조비평, 형식비평을 갈수록 못읽겠다. 기력이 달려서일까. 한때는 정성일 씨의 (수십 페이지짜리) 쇼트 단위 분석비평도 좋아했고(헉헉 대며, 뭥미하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같은 책들도 (괜히 폼잡는답시고) 열심히 품에 끼고 다녔더랬는데. 물론 비평은 여전히 다양해야 하고, 그중 어떤 건 정말 끝간데 없이 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의한 발견을 위해라면 난해함이 아니라 난해함 할아버지라도 기꺼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갈수록 내 영역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에너지의 문제인지, 취향의 문제인지 잘은 모르겠다. 정말 궁금해서 찾게 되는 일 아니고는 거리를 두게 된다. 대신 좋은 인상비평이나 이름모를 블로거의 사적인 글 따위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글쓴이와 작품 간의 관계맺기가 오롯한 흔적으로 남은 글. 그런 글은 거의 웬만하면 환영이다. 서투른 문장이어도, 통찰이 깊지 못해도, 다소 허세가 있어도 사람이 보이는 글이라면 다만 좋다. 김영진 씨는 아마도 영화 인상비평계의 가장 뛰어난 국내 필자일 것이다. 그의 오랜 팬이었다. 이번 글 역시 좋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이라 무단 전재, 배포한다.)

장면의 의미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_ 허우샤오셴 감독의 ‘섭은낭’ (한겨레 2월 3일자)
  한때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꽤 많이 진행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요 몇년간 거의 하지 않았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만 하는 정도였다. 평론가로서 하는 극장에서의 작품해설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인정상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관계의 지인에게 들어온 청탁일 때만 한다. 이 일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더 심해진 경향이라고 느끼는데, 한국의 관객은 유독 영화에서의 의미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장면을 그렇게 찍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는 ‘그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감독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객석의 질문이 상당하다.
  허우샤오셴의 섭은낭은 영화의 서사와 장면의 구성에서 의미의 퍼즐을 찾는 관객에겐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 번 봐서는 또렷이 감지되는 줄거리가 없으며 감독이 그걸 부러 신경쓰지 않고 흐려놨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허우샤오셴 감독과 이창동 감독의 대담 자리에 사회자로 불려나간 건 순전히 두 감독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지방 출장을 갔다가 올라가는 길에 많이 후회했다. 별로 할 말도 없는 자리에 나가 또 쓸데없는 품을 팔겠구나 걱정했다. 무엇보다 필자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해 크게 묻고 싶은 말이 없었다. 섭은낭의 알맹이를 다 알아차렸다는 게 아니라 두 번 보고 난 후에도 언젠가 또 보고 싶은 영화일 뿐,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뭔가 묻고 싶은 건 없었다.
  행사 당일, 허우샤오셴, 이창동 감독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부터 사석에선 사소한 농담들이 오갔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별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 ‘불면증 환자를 위한 건강 영화’로 자신의 영화를 평하면서 주로 자신 주변의 일상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창동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화 미학을 운운하는 어떤 자리보다 공기는 농밀했고 그 두 분의 영화에서 느끼는 삶에 대한 질박한 통찰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처럼 그날 경험은 내 마음에 잔잔한 공감의 무늬를 남겼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관객들이 던진 질문의 수준은 높았고 진지했지만 역시 의미의 협량함에 경도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대체로 품는 의문에 대해 허우샤오셴은 풍부한 예시를 들어 답하곤 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에 갑자기 화면 크기가 변한 까닭에 대해 그는 등장인물이 켜고 있는 악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만화에선 자주 각 화면 크기가 바뀌는데 영화에선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허우샤오셴 감독과 이창동 감독은 필자를 포함한 청중들이 좁은 수도관 파이프 같은 질문을 던지면 측량할 수 없는 강물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이날 얘기의 핵심은 결국 영화가 주는 체험의 너비와 깊이에 관한 것이었다. 섭은낭에서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 창조된 아름다움, 우리의 실제 삶에서 겪기 힘든 아름다움을 초밀도로 경험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럴 때 필자는 보이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그게 또 훌륭한 영화의 조건일 것이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2016. 2. 5.

서울아트시네마 [자객 섭은낭] 대담



  서울아트시네마서 열린 감독님과의 대담행사(16.1.28)에 참석했다. 2005년 낙원동에서 있었던 마스터클래스 이후 10년 만에 뵙는 자리다. 무척 설렜다. 이창동 감독이 특별히 함께 했다. 김영진 평론가가 사회를 진행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대담이 이어졌다. 허우 감독에 대한 이창동 감독의 애정이 컸다. 10년을 기다려왔다고 입을 떼었다. 이 영화에선 서사의 인과성이나 인물 관계의 명료함이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알 듯 모를 듯한 감정들과 그를 둘러싼 풍경들, 소리들에 감각을 여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스러운 영화였다고 말했다. 과연 허우 감독님의 작품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고. 당이라는 시대적 외피, 무협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둘렀을 뿐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어떤 마음 관한 영화가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깊이 공감했다.

  Q&A 시간엔 으레 나올 법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히 여기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봤는데 이 감상이 맞는 것입니까. 허우 감독은 그 모든 질문들에 성심껏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빈틈을 남겨두는 듯한 인상이었다. 과잉 해석과 현학의 분석을 슬며시 경계하고 있었다. 특유의 유머와 익살어린 제스쳐로 대신 그 틈을 채워냈다. 답변은 전작들을 마치고 했던 그간의 인터뷰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은 줄곧 사실주의를 강조해왔다는 말. 함께 자주 작업하게 되는 이들은 결국 그이의 품성과 사람됨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말. 가장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필름에 담기 위해 먼저 그런 상황과 환경,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말. 머리로 하는 대화가 있고 가슴, 발바닥으로 하는 대화가 있다. 허우 감독과의 대화는 언제나 명명한 후자였다. 그는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로 영화를 배운 사람이 아니다. 삶과 생활이 먼저였고 영화는 언제나 방편이었던 사람. 생활을 감각하고 세계를 살아내는 데 다만 영화가 필요했던 사람. 가신공주는 섭은낭에게 말한다. “너의 검술엔 적수가 없으나 마음은 사람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구나.”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거리감'은 인간의 불가피한 어떤 성정으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이뤄내야 하지만 이뤄낼 수 없음을 자각하는 일. 전해야 하지만 끝내 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 [카페 뤼미에르]의 아버지는 딸 요코에게 ‘어떤 방법으로 네가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며 살 것인지'에 대해 끝내 묻지 못한다. 그는 정종을 들이켜거나 뒤돌아 앉아 함께 우동을 먹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그 거리감과 생활묘사는 그저 많은 영화를 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담이 끝났다. 관객들은 로비에서 허우 감독을 기다렸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갔다. 나는 그의 보좌 직원(SPOT 직원이라고 했다)에게 작은 선물을 남긴 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친구가 허기를 호소했다. 종로3가 앞에 늘어선 한 포장마차로 향했다. 막 반죽을 부은 붕어빵과 계란빵이 익기를 기다렸다. 저편에서 허우 감독과 통역사, 스팟 직원이 향해 오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 전했다. 허우 감독이 밝게 화답해주었다. 선물에 고마워하신다고 통역사는 전했다. 붕어빵 가게 앞에서, 그들은 후미지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역으로 갔다. (2016)

2016. 2. 3.

당신의 불완전함을 내가 끌어안아줄게요


필립 가렐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중에서

  사랑은 충만해지는 감정이다. 보이지 않던 것은 흔적을 드러내며, 향은 짙어진다. 소리는 멀리 가닿고, 까끌한 것은 보드라워진다. 이 갑작스런, 세계의 완전해짐. 나도 함께 완전해질순 없을까. 같은 리듬이라면 다만 이곳은 천국이 되리라. 부질없는 꿈이 시작되는 건 그때부터다. 돌이킬수록 불완전한 자신뿐이다. 어울리지 않는 침대보, 바닥의 머리카락들, 피부의 잡티가 서글프다. 서글프고 불안하다. 사랑은 언제까지일까. 충만의 세계는 저만치에 있는데. 나는 리듬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인다.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일. 혹은 세계에 거짓으로 뛰어드는 일. 도망치지 않기로했다면, 거짓은 얼마간 불가피하다. 다만 이젠 타인과 자신 둘 다를 속여야 한다.

  사랑에 긴 시간 익숙해진 뒤라면 어떨까. 여기 한 부부가 있다. 마농과 피에르. 그들은 한 레지스탕스에 관한 다큐를 작업하는 중이다. 노인은 나긋하게 고통의 지난 날을 술회하고 부부는 그를 숨죽여 기록한다. 그러다 일이 벌어진다. 피에르에게 갑작스런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묘한 매력을 품었다. 피에르는 가정을 망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새 사랑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한편 마농 또한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중이다. 상대는 젊고 부드럽다. 그녀의 외도는 (하필) 엘리자베스에게 목격된다. 피에르에게 이 사실이 전해진다. 떳떳할 것 없는 처지면서도 그는 격분에 휩싸인다. 급기야 피에르와 마농은 결별하게 된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 단지 그것만으로는 충만해질 수 없음을, 늦든 빠르든 우리는 알게된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사랑에 익숙해진 뒤라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거짓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나른한 권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나름의 결단. 거짓의 양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돈을 감추기도 하고 말을 감추기도 한다. 육체와 마음의 비행을 감추기도 한다. 니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는 질문은 이때 아무런 힘이 없다.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공허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숙명인 것이고, 그것은 다만 자신 대신 타인을 돌보는 일에 더 애를 쓰기로 결심한 이들에게서 더 잘 발견될 뿐,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것이다.(‘인 더 섀도우 오브 패털리티'라는 제목도 좋았을 것 같다.)

  모든 사랑은 그러므로 크고 작은 거짓으로 구성된다. 거짓이 없다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건축의 주된 질료는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거짓, 불안, 상처와 같은 것이다. 상대에 책임을 다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건 사랑하는 이들의 당연한 책무다. 관계의 총체란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또한 작동하는 무엇이다. 원든 원치 않든 제 측량을 벗어나고마는 관계의 속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조금 더 자유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피에르와 마농은 레지스탕스의 장례식장에서 재회한다. 젊은 연인들과는 결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레지스탕스의 삶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레지스탕스이긴커녕 나치의 충직한 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피에르는 촬영분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며 낙담한다. 마농은 그러나 말한다. “다시 편집하면 돼. 가짜 레지스탕스에 대한 삶의 이야기로 만들자.”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둘은 놀랍게도 부둥켜 안고 있다. 나는 여기서 깊은 뭉클함을 느꼈다. 권태로 멀어졌던 두 사람.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두 남녀. 필연의 거짓. 불완전의 수긍.(지난 외도를 정당화하거나 낭만화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건 상징처럼 나른하게 묘사되었다.)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당신의 거짓을 인정할게요. 당신의 불완전함을 내가 받아들일게요.’

  가짜 레지스탕스는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꾸민 것일 것이다. 어마한 죄의 삶을 끌어 안아줄 이는 그의 곁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존재의 유지를 원했고 현실의 직시 대신 거짓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급기야 그를 사실로 믿어버렸다. 나치 피해자들은 통탄해마지 않을 일이겠지만, 한 개인의 실존이라는 문제에서는 얼마간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라도 살고 싶어했다. 우리도 각자의 기만으로 삶을 지탱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