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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5.

인생픽션 2021

이 일 또한 5년에 한번씩 행해볼까 한다.
(인생영화시리즈처럼)











2020. 11. 15.

양수검사, 클라인펠터, 이상없음, 새로운 영토


1.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아내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울먹이는 거 같았다. 침착하자고, 우선은 그것이 무언지에 대해 알아보자고, 각자 가만히 생각을 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다독였다. 전화를 끊고 숨을 몇 번 길게 내쉬었다 마셨다 했다. 검색을 시작했다. 많은 정보들이 있지는 않았다. 

2. 양수검사 전까지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럴 것이, 너무도 건강했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형태적으로 더 없이 안정되어 담당의로부터 줄곧 긍정적인 신호 및 언사를 들어왔다. 아이가 정말 건강하고 활달하고 포토제닉하네요. 물론 그 말들이 부모를 기분좋게 하려는 의도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체감에도 이 아이는 안정화 되어 있었으며, 지난 모든 검사 상 건강을 의심해볼 단서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지난 6개월이 흘러 온 것이다. 그 시간 위에 우리는 부푼 마음들과 여러 계획들을 쌓고 있던 참이었다.

3. 그리고 그날, 양수검사를 한 바로 그날, 1차 결과를 듣게 된 것이다. 양수검사 1차 결과 다운증후군, 파타우증후군, 에드워드증후군에 대한 이상 유무는 정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성염색체의 경우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아 2차 결과 때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는 되물었다. 성염색체가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 현재로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양법을 통해 2~3주의 시간이 지나 정확한 확인을 한 후 이상 유무를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염색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산모님 아이의 경우에는 남아이므로 클라인펠터를 의심해보게 될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아내도 나도 그날은 꼴딱 밤을 지새웠던 거 같다. 인터넷으로 찾고 찾고 또 찾았다. 클라인펠터. 이름도 낯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찾아보려고 했다. 각종 경험 사례들은 물론, 외국 학술논문까지 뒤져 사전을 짚어가며 읽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우선은 두어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5. 최종 결과를 받아들기까지 정확하게 19일이라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19일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이토록 애끓는 심정이 되어본 경험이 없었다. 부모가 아프고, 형제가 곤경을 겪을 때, 혹은 심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고통을 겪을 때 함께 아파한 일은 더러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고통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본 것은 거의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적은 이타심과 많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특히나 생경한 일이었고, 그 혼란을 감당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위안을 준 것은 이 상황을 똑같은 무게로 또렷이 직면하고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출근해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6. 우리는 19일간 그 일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견뎠다.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아내도 나도 그 일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하게 자리하는 일을 앞에 두고, 마치 그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건 앞서 말했듯,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일에 관해라면 운명이 결국 결정할 일이었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견디는 일 뿐이었다. 차분을 유지했던 것은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서라기보다 그게 유용해서였다. 침묵을 깨고 그 일에 관해 언급을 하는 일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었다. 그 일에 관해서는 그저 서로 응원의 눈빛을 주고 받는 일이면 충분했다. 그 밖은 넷플릭스로 본 드라마 이야기나, 수원삼성의 시즌 마지막 경기 이야기나, 무무와 함께 떠날 제주도 여행 이야기로 채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7. 19일이 지나 최종 결과를 받아 든 날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의 감격, 안도, 감사는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직감했다. 우리에게 '모든 염색체 수적 구조적 이상 없음'이라는 최종 진단만큼 중요한 것은 지난 19일간을 견디며 우리가 함께 새로이 들어선 어떤 영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아플 수 있고 우리 자신보다 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존재, 어떤 사건과 처음 만난 것이다. 예측 불능한 상황과 더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과도 더 자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 불가피한 영토로 들어섰음을 직감하며 무거워진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 하나의 존재를 감당하는 것으로도 버거워했던 게 바로 얼마 전까지였다. 가까운 미래에 이처럼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리라고는 그때엔 미처 알 수 없었다.   







2020. 9. 13.

루프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 정신없던 한 주였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밀려드는 일들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겨우 하나의 선을 찾아 간신히 붙들었고 그것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나왔다. 미노타우로스 미궁을 헤쳐 나오는 실타래 같은 한 주였다. 

2. 신선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여전히 외출은 줄여야 함에도 이맘때 찾아오는 싱그러움에 속절없이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 오늘은 삼청동과 한남동 전시들을 둘러볼까 했는데, 결국엔 못했다. 오전엔 교회 점검반 일을 해야 했고, 오후엔 주중 못다 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집에 돌아오니 좀 있으면 수원과 서울의 슈퍼매치가 있을 시각이었다.

3. 하지만 오늘도 수원삼성은 보란 듯이 패배하고 말았다.

4. 아, 어제저녁 아내와 에무시네마 루프탑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아내도 그 시간을 고마워했다.

5. 2019년 칸 영화제 내내 기생충과 더불어 가장 뜨겁던 화제작이었고, 지난 1월 개봉했으나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네이버로 다운을 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한 호흡으로 보아지지가 않았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끊어보았고, 어느 간격은 일주일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하는 게 옳을 터였다.

6. 루프탑엔 바람이 살랑였다. 하늘엔 별이 보였다. 비 온 뒤 기온은 조금 차갑기도 했지만, 준비해 간 경량 패딩의 덕을 보았다.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환경이 아니랄 수 없었다. 초록 동글뱅이 모기향이 타는 냄새. 그것이 만드는 작은 불씨와 연기. 그것들 사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7. 마치 작은 기적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타닥이는 불씨와 살랑이는 바람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와 모닥불 아래 오롯이 따스한 공동체가 되는 자매들의 이야기였다가, 거친 파도와 불어 치는 바람 가운데 곧 다가올 이별을 묵묵히 받아 들고 그 운명을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모닥불 주변에 모여든 축제의 여인들이 내던 공명의 화음처럼, 나는 이 영화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물리적 공간 사이 공명에 대해 생각했다.  

8. 또한 오르페우스의 신화의 변용. 이 여인들은 서로를 끝내 저 심연에 두고 나와야 하는, 서로가 서로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에우리디케가 되어야 하는 스산한 운명을 그저 받아 들었다. 누구를 탓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변혁과 저항의 깃대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운명을 받아 들고 서로를 추억하기로 결심한 저 결단들, 감정들, 그 이후의 삶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온도로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 차갑다고도 할 수 없고 따스하다고도 할 수 없는, 가장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저 응시의 태도에 관해 생각했다.   



2020. 7. 12.

[여행자] 그리고 박원순



1.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작동하는가를 알 수 없을 때 내가 줄곧 떠올리는 영화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다. 신분을 바꿔치기한 남자의 스릴러적인 여정을 담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드라마에 관해 영화는 아무런 관심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로크는 어째서 로버슨으로 살아가기로 한 걸까(현명한 아내가 있고,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명망도 있는 그가 어째서? 더구나 그가 바꿔치기한 로버슨이란 인물이 대단히 매력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뭔가 그가 희구했던 삶의 보장을 가졌다 보기 힘든데?). 이 질문은 영화를 본 모두에게 찾아들 것이나, 영화는 끝내 그것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서사의 찜찜함을 남기지는 않았겠지만 이토록 오랜 걸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이 영화는 로크의 동기를 너무나 무심히, 너무나 뻔뻔히 끝까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태도의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끝내 알 수 없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누구도 이 남자의 동기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로크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죽지 않고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면, 아마 단서가 될만한 몇 가지 정황을 내놓았을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으로 결코 진실을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 로버슨으로 살기로 했는지, 왜 목적도 없는 여행을 시작했는지, 우연히 만난 소녀와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아니 처음부터 그런 계획들이 있기나 한 것이었는지, 영화도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 안토니오니 조차도 몰랐(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불가지론의 태도, 부조리의 체념적 수용이야 말로 [욕망], [정사], [붉은 사막], [자브리스키 포인트] 등을 통해 줄곧 견지해왔던 그의 인장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3. 원대한 이상주의자이자 영민한 현실 개혁가였던, 무엇보다 현직 수도 서울의 수장이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그중에서도 [여행자]를 떠올렸다. 그 떠남을 설명할 아무런 동기가 로크에겐 없었지만, 이 남자에겐 (사법상 확정되지는 않았으되) 죽음을 추적할만한 유력한 정황이 있다는 점은 물론 차이로 있다. 아직 장례가 진행 중인 한편, 슬픔과 분노, 추론과 억측, 합리와 비이성이 뒤엉켜 있는 지금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 남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결국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누구에게도 이 사건에 관해 진실로서 단정할 만한 무엇이란 건 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자신, 이 남자의 가족, 이 남자와 함께 했던 사람들, 이 남자로부터 피해를 입었을지 모를 사람들, 이 남자의 가치와 지향을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 했을 그 모두가 패배자로 남게 될 것이란 사실 외엔. 따라서 이런 방식의 죽음은 최악의 방식이란 사실 외엔. [여행자]에서 로크가 인터뷰한 한 아프리카 게릴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을 더 드러낼 뿐, 결코 타자를 더 잘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2020. 7. 5.

인생영화 2020



인생영화를 돌아본다. 이 일은 5년에 한 번씩 하기로 한 바 있다. 2015년에 했으니 올해 할 차례가 된 것이다(인생영화2015).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든다. 프랑수와 트뤼포도 그랬고, 마틴 스콜세지도 그랬다. 박찬욱도 그랬고, 봉준호도 그랬다. 감독도 평론가도 아니나, 나에게도 그런 리스트가 있다. 다만 내겐 시대를 초월해 두고두고 여러 삶에 영향을 끼칠 걸작들을 알아볼 눈이 일천하므로, 그저 삶이 어딘가 무력해지거나 잘못되고 있다 싶을 때마다 꺼내보았던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 목록은 걸작의 목록이 아니라, 정서의 치료제 목록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혹은 2020년 오늘, 생활의 지향 내지 지침의 목록이라 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2020. 5. 31.

침묵과 응시의 예술


1. 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침묵이다, 언젠가 김수영의 이 말에 밑줄을 그으며 떠올렸던 것은 시네마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게 있다면 그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2. 이미 너무 많은 서사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일상대화에도 뉴스에도, 문학에도, 역사에도, 무대에도, 정치에도. 그래왔고, 그럴 것이었다.

3. 허우 샤오시엔, 위라세타쿤 아피찻퐁, 차이밍량, 로베르 브레송, 칼 테오드르 드레이어 등. 몇 이름들만을 남겨두고, 갈수록 나는 영화에서 점점 애정을 거두어 왔는데, 시네마의 본령이란 서사의 실어나름과 거의 무관한 일임에 관한 생각을 얻고부터였던 거 같다.

4. 침묵의 예술. 응시의 예술. 이미지의 운동과 사운드의 진폭만으로, 그저 사태를 '바라보기'만 할 뿐으로 저 깊은 곳에 가닿는 작업들. 관객 스스로가 그 심연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도록 이끄는 예술들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더해갔다.

5. 시네마와 미디어아트의 경계는 점점 흐려가고 있을 것이나, 아직까지 적잖은 수의 시네마와 미디어아트가 서사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6. 국립현대미술관 [수평의 축]展에 다녀와 (시그니처 작품이랄 수 있는) 리사 아틸라의 미디어 작업을 보면서, 깊은 감동으로 이끌린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촬영된 한 그루의 나무를 다채널 분할화면에 담아 동시에 영사하는 방식의 작업이었는데, 무엇보다 나는 이 작업에 담긴 작가의 '무심한 태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7. 앞서 언급한 바,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서사 강박은 주로 인터뷰의 형태, 추상적이고 자기현시적인 내래이션으로 반복 재생산 되어지고 있다. 그런 작업들은 이미 너무 많다. 많기도 하거니와 그 이야기란 걸 잠자코 들어보면 하나마나한 소리이거나 작가 자신의 세계안에서만 수용되고말 뿐인 언어의 나열인 경우가 대부분임을 어렵잖이 알아챌 수 있다.

8. 보는 이가 스스로 그 작업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작가는 그 발들임의 문간에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서사들, 너무 많은 언어의 나열은 (내 생각에) 좋은 예술이 할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그런 예술은 관객과 예술이 관계맺는 과정에서 관객의 자기창조를 가로막고 무력감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9. 그러니 시편이든 시네마든 회화든 설치든, 앞으로도 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침묵하고 있는가'이며 그 침묵과 응시의 사려깊음 만큼이 그 예술의 깊이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 5. 9.

남화연 [마음의 흐름]



1. 남화연은 최승희의 무엇에 그토록 이끌렸던 걸까. 2012년부터 근 10년을 아카이빙 해왔고, 그 흔적의 나열이 이번으로 벌써 수차례라 한다.

2. 나 역시 많은 예술가들을 동경해왔고, 그중엔 여전히 삶의 지침으로 삼는 이들이 몇 있다. 마음이야 그러므로 헤아릴 듯하나, 남화연처럼 한 인물과 그 삶에 대한 꾸준한 들여봄과 수집행위로서 자신의 창작을 이어가는 사례는, 내 경험과 이해가 일천한 탓인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다.

3.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신기했다. 최승희가 누군지, 남화연이 그의 무엇에 그토록 사로잡혔는지는, 실은 내게 그다지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한 작가가 자신의 작업세계를 채워가는 이같은 방식과의 만남이 의미라면 의미가 될 터다.

4. 오브제들을 부러 이쪽저쪽 방향으로, 높낮이를 위아래로 달리해가며 배치한 방식이 재밌었다. 그러니까 작업들을 찬찬히 들여 보려면 몸을 많이 움직여야만 했다. 누군가가 관람객들을 버즈아이뷰로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남화연과 최승희가 봤다면 흡족해했을지 모를 장면이라고도 생각했다.












2020. 4. 5.

천변풍경, 함미나 [Idleness]



1. 무무를 데리고 동네 천변 산책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벚꽃은 잘도 흩날리고 있었다. 저들을 (포함한 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결국 고통받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사라진다면) 자연은 언젠가 제 모습으로 회복해갈 것이다. 오직 사람이, 그 안에서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오염으로 신음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더 매정하고 무서운 것이다.

2. 무무의 천연한 눈망울은 그것이 자연의 편에 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3. 함미나 [Idleness] 전에 다녀왔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혼돈의 심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가(가 대변하는 시대의 얼굴들)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널 쏴 죽이겠다'라고 했다가, '깨어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가, '자살의 풍경'을 먼발치서 바라보다가, 다시 '널 쏴 죽이겠다'라고 한다. 도리 없는 분열증의 상황. 타깃은 과연 찾아낼 수 있는 걸까. 좌절과 불안은 고스란히 이들 몫이지만, 그를 생산해낸 건 이들이 아니다. 명징한 적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적은 여전히 특정할 수 없으며, 그 힘은 가공할 수준으로 더욱 비대해간다. 으스러진 머리, 흘러내리는 얼굴은 이미, 쏘려고 총을 든 자의 것이다. 무얼 쏘겠다는 걸까. 무얼 쏠 수는 있는 걸까. 









2020. 2. 23.

코로나19, 강박x강박(강박²)



1. 3년째 다니는 미용실인데 오늘 같은 한산함은 처음이었다. 두 명의 종업원과 한 명의 디자이너 겸 매니저 그리고 나의 머리를 만져주시는 원장님 사이에서, 침묵의 30여분을 보냈다. 코로나의 여파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이는 도구 트레이를 정리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스마트폰을 까딱이고 있었다. 모두 적당히 불안하고 적당히 무료한 얼굴들이었다. 원장님만이 특유의 힘 있는 가위질을 이어갔다. 가위날 부딪히는 쇳소리가 찹찹찹 유난히 크게 들렸고, 노르스름 익은 오후 두시 반의 햇살은 통유리를 통과하며 더 깊고 넓게 퍼져 실내를 적시고 있었다. 

2.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엘 갔다. 대한문 앞에도 사람이 없었고, 인근 상가엔 숫제 영업을 쉬는 점포들이 몇 군데 보였다. 손에는 마끼아또 한 잔이 들려 있었다. 우유 냄새가 너무 진했고, 결국 나는 다 마시지 못한 채로 그것을 휴지통에 던졌다.

3. [강박x강박(강박²)] 전을 보았다. 뉴 미네랄 콜렉티브, 우정수, 오메르 파스트, 차재민, 정연두, 김용관, 이재이, 김인배, 에밀리아 스카눌리터의 순으로 그들의 작업을 둘러보았다.

4. 가장 오래 발길을 머문 곳은 오메르 파스트의 영상 작업 [5,000 피트가 최적이다]에서 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이 작가가 미디어를 다루는 방식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여기에도 여느 미디어아트처럼 인터뷰가 있고, 작가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랐(다고 느꼈)던 것은, 이것이 철저하게 '극영화'의 논리와 문법을 따르고 있었던 부분이다.

5. 그러니까 사건이 있고, 인물이 있었다. 인물의 감정이 있었고, 그 감정을 (우리로 하여금) 살피도록 돕는 부수의 캐릭터들이 있었다. 쇼트를 잘게 나누었고(인터뷰이가 중간중간 휴식차 복도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 장면은 정면-리버스-정면-리버스 쇼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운드의 활용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복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필름라이크'한 화면의 톤으로 찍혔다. 아마도 레드원 같은 기종으로 디지털 촬영을 하였을 테지만, 몇몇 장면은 필름으로 촬영하였다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큼 어떤 특유의 물성과 질감이 보유되고 있었다.

6. 그래서 이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나 스스로에게 들었지만, (허무하게도) 이렇다 할 뾰족한 대답을 찾아내진 못했다.   

7. 다만 하나의 얇은 발견이라면, 근래의 미디어아트들에서 내가 줄곧 느꼈던 피로감을 이 작업에서는 거의 느낄 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연히 들어간 전시실에서 나는 30분짜리 극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기분이 들었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선명히 수용할 수 있었으며, 한동안은 그 질문을 받아들고 나름의 생각을 하느라 다른 작품, 작업들에는 건성의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8. 미디어아트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디어아트 고유의 논리, 그러니까 (극적 구성을 뒤로 두고) 감각과 감정의 원체험으로 단도직입해 들어가는 그 방식이야말로 곧 순수 미술적이며 그것이 미디어아트의 본령과 같다는 생각에는 그다지 흔들림이 없다.

9. 내 안에는 줄곧 (나름의 논리와 근거로) 미디어아트와 시네마 사이의 어떤 구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만 이제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이 작업에 발길을 두는 동안 무겁게 찾아들었다. 

10. 돌담길을 따라 시청역으로 되돌아 나왔다. 담벽에 묻은 햇살을 2g폰카로 찍었다. 요즘 카메라를 따로 들고 다니지 않고 2g폰카로 찍어두는 일이 늘었는데, 생각보다 이 느낌이 괜찮기 때문이다. 선예도가 떨어지고, 빛도 살짝 바랜듯한 화상이, 어쩐지 똑딱이 필름의 느낌을 닮은 것도 같다. 









2020. 1. 9.

[도래할 공동체](세종문화회관 미술관)를 보고, 짧은 생각



1. '민주주의자 故 김근태 선생 8주기 추모전' [도래할 공동체]라는 이름이 붙은 전시를 지난 주말 보고 왔다.

2. 백현주, 안규철, 안상수, 양아치, 니콜레타 마르코비치, 이은서, 안드레이 미르체프, 이부록, 임민욱, 임흥순, 정정엽의 작업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추모를 하는 중이었다.

3. 어느 한 작업에 꽃혀 오래 머물거나 가까이 들여다보진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각각의 작업이 품고 있는 개별적 미적 지향이 아니었다. 이런 방식으로도 가능한 '추모의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4. '故 김근태 선생'이라는 표현으로 그 삶과 존재를 칭할만큼 나는 그에 대한 기억과 감정과 이해를 갖고 있지 않다. 전시를 보고 돌아와 인터넷 검색으로 글줄을 몇 개 따라 읽어 보았지만 거기까지가 내 의지가 뻗어 닿을 수 있는 전부였다. 따라서 나는 저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뭉뚱그려진 부채감, 그러니까 나와 내 주변 이들이 누리는 오늘날의 자유와 평화를 얻어내기 위해 피흘려간 이들에 대한 빚진 감정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이 날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5. 그것이 내가 이 전시를 보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일인 것 같았다.












2019. 12. 9.

[사이키델릭 네이처] 짧은 소감



1. 지난 일요일 오후 두 시, 통의동 보안여관 지하에서 열린 <사이키델릭 네이처 Psychedelic Nature> 아티스트&큐레이터 토크에 다녀왔다.

2. 작업들을 보지 못한 상태로 대담장에 입장했다. 

3. 니콜라스 펠처, 류성실, 양승원, 정희민, 최하늘, 그룹 '업체' 그룹 전이었지만, 패널로 참석한 이는 류성실, 양승원 작가, 송고은 큐레이터뿐이었다.

4. 작업만 관람하고 이 대담을 듣지 않았다면, 아 참 조악하고 조악하구나, 하며 돌아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보안여관 구관이라는 공간의 정서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5. 오늘날 자연을 감각하는 우리의 방식은 소비적이거나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하기 어렵다. 미디어를 통해 간접의 형태로 이뤄지거니와, 직접 만나는 경우에도 '상품의 구매'라는 틀을 거친 경우가 상당하다. 거기서 생산되는 감정은 '아름답다', '멋지다', '경탄스럽다'이거나 혹은 반대로, '매섭다', '혹독하다', 잔혹하다' 정도일 것이다. 응당 그 감정은 소중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억압에 맞서는 '염려'와 '저항' 또한 아주 귀한 것이다.

6. 하지만 부족하다. 일차원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소비자로서의 자족에 머물지 않고, 미디어의 이미지에 즉자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더 다각의 통로로, 더 개별적이면서, 더 깊이 들어간 '자연과의 만남'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사이키델릭 네이처 Psychedelic Nature>는 이 질문에 대한 여섯 개의 응답이었고, 솔직히 말한다면, 전시의 결과물들보다 내 마음을 더 움직인 것은 이 기획 자체였다. 이 기획 자체를 하나의 퍼포먼스이자, 퍽 의미있는 작업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9. 11. 28.

밤과 육체의 후예들



2019 난지창작단지 오픈스튜디오를 관람하고 나서 (멋대로) 쓰고, (멋대로) 올리는 글.
최유나, 이은새, 프란시스 베이컨을 통과해 (무려) 프란시스코 고야에까지 이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