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31.

침묵과 응시의 예술


1. 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침묵이다, 언젠가 김수영의 이 말에 밑줄을 그으며 떠올렸던 것은 시네마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게 있다면 그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2. 이미 너무 많은 서사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일상대화에도 뉴스에도, 문학에도, 역사에도, 무대에도, 정치에도. 그래왔고, 그럴 것이었다.

3. 허우 샤오시엔, 위라세타쿤 아피찻퐁, 차이밍량, 로베르 브레송, 칼 테오드르 드레이어 등. 몇 이름들만을 남겨두고, 갈수록 나는 영화에서 점점 애정을 거두어 왔는데, 시네마의 본령이란 서사의 실어나름과 거의 무관한 일임에 관한 생각을 얻고부터였던 거 같다.

4. 침묵의 예술. 응시의 예술. 이미지의 운동과 사운드의 진폭만으로, 그저 사태를 '바라보기'만 할 뿐으로 저 깊은 곳에 가닿는 작업들. 관객 스스로가 그 심연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도록 이끄는 예술들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더해갔다.

5. 시네마와 미디어아트의 경계는 점점 흐려가고 있을 것이나, 아직까지 적잖은 수의 시네마와 미디어아트가 서사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6. 국립현대미술관 [수평의 축]展에 다녀와 (시그니처 작품이랄 수 있는) 리사 아틸라의 미디어 작업을 보면서, 깊은 감동으로 이끌린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촬영된 한 그루의 나무를 다채널 분할화면에 담아 동시에 영사하는 방식의 작업이었는데, 무엇보다 나는 이 작업에 담긴 작가의 '무심한 태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7. 앞서 언급한 바,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서사 강박은 주로 인터뷰의 형태, 추상적이고 자기현시적인 내래이션으로 반복 재생산 되어지고 있다. 그런 작업들은 이미 너무 많다. 많기도 하거니와 그 이야기란 걸 잠자코 들어보면 하나마나한 소리이거나 작가 자신의 세계안에서만 수용되고말 뿐인 언어의 나열인 경우가 대부분임을 어렵잖이 알아챌 수 있다.

8. 보는 이가 스스로 그 작업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작가는 그 발들임의 문간에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서사들, 너무 많은 언어의 나열은 (내 생각에) 좋은 예술이 할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그런 예술은 관객과 예술이 관계맺는 과정에서 관객의 자기창조를 가로막고 무력감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9. 그러니 시편이든 시네마든 회화든 설치든, 앞으로도 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침묵하고 있는가'이며 그 침묵과 응시의 사려깊음 만큼이 그 예술의 깊이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 5. 9.

남화연 [마음의 흐름]



1. 남화연은 최승희의 무엇에 그토록 이끌렸던 걸까. 2012년부터 근 10년을 아카이빙 해왔고, 그 흔적의 나열이 이번으로 벌써 수차례라 한다.

2. 나 역시 많은 예술가들을 동경해왔고, 그중엔 여전히 삶의 지침으로 삼는 이들이 몇 있다. 마음이야 그러므로 헤아릴 듯하나, 남화연처럼 한 인물과 그 삶에 대한 꾸준한 들여봄과 수집행위로서 자신의 창작을 이어가는 사례는, 내 경험과 이해가 일천한 탓인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다.

3.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신기했다. 최승희가 누군지, 남화연이 그의 무엇에 그토록 사로잡혔는지는, 실은 내게 그다지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한 작가가 자신의 작업세계를 채워가는 이같은 방식과의 만남이 의미라면 의미가 될 터다.

4. 오브제들을 부러 이쪽저쪽 방향으로, 높낮이를 위아래로 달리해가며 배치한 방식이 재밌었다. 그러니까 작업들을 찬찬히 들여 보려면 몸을 많이 움직여야만 했다. 누군가가 관람객들을 버즈아이뷰로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남화연과 최승희가 봤다면 흡족해했을지 모를 장면이라고도 생각했다.












2020. 5. 6.

너무많은재난들


너무많은재난들. 종이에 연필과 마카, 오일파스텔. 2020

너무 많은 재난들이 속절없이 흘러다닌다. 재난이야 늘 존재했지만, 이토록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며 당사자성을 확인시키는 류는 좀처럼 마주하기 어려운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이 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못할 심리적 재난이라면, 작금의 재난은 그야말로 피부와 호흡, 생식과 감각의 재난이며, 사태의 종식과 무관히 습관으로 새겨질 실존의 재난이다. 삶을 가까스로 버티어 선 사람들이 보이고, 버티어 서려다 대롱대롱 끝내 저 아래로 추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너무 많은 재난들. 이 가운데, 38명의 근로자들이 집단으로 불에 타 죽었는데, 그것쯤은 그냥 흘려보내도 어쩔 것인가의 생각들이 있다. 수십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온라인 강간에 가담했는데 어쨌든 나완 무관한 일이 아닌가 빗어 넘기려는 태도들이 있다. 너무 많은 혐오들, 너무 쉬운 구별짓기.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재난들, 재난들, 재난들. 


2020. 5. 4.

장 르누아르의 말



"그러므로 우리들은 추억의 마법에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변해버린 세계의 지옥 속으로 단호하게 뛰어드는 일이다. 그것은 수평적으로 분할된 세계이고 실용적인 세계이며 열정이 사라진 세계임과 동시에 향수도 사라진 세계이다."

- 장 르누아르,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