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3.

산책. 2015년 가을


2015년 가을

















2015. 10. 22.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


1. 전 여자친구를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그냥 지나치기 모한 상황이었다. 그이도 나도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일로 함께 시간을 제법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카페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근황을 묻고 대답했다. 차를 다마시고 일어나려는데, 불쑥 그이가 말했다. “난 오빠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그이는 내 정지된 얼굴에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또렷이 말했다. “난 오빠가 정말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2. 좀 다르지만 비슷한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익명의 분으로부터, 전혀 예상치못한 순간에. 내 메일주소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분은 철저히 장막 뒤에 숨어 계셨다. 이 메일을 위해 급히 만든 계정인 듯 했다. 텀블러를 타고 오신 건지 현실 속 내 아는 분인지 혹은 전혀 다른 세계의 분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다만 문체로 보아 남성분은 아닌 듯 싶은데 그 역시 확실치는 않았다. 덕분에 기분이 유쾌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괘념할만한 성질도 아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3. 그분 말씀의 요지는 (워낙 횡설수설이라 겨우 파악했는데) 그냥 내가 싫다는 것이었다. 내 사진도, 글도, 영상도.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4. 피드백은 감사한 일이다. 귀담아 듣겠다. 다만 당신도 태도가 좀 정중했으면 좋겠다. 성인이라면. 비판을 할 땐 논리와 예의를 갖춰야 한다. 당신 같은 식이라면 응석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덧붙여 꼭 알아주셨으면 하는 점이 있다. 여기는 공개된 공간이지만 내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글은 나를 위해 쓰여졌다. 다만 익명의 장에도 열어둠으로써 스스로 다짐을 강화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비평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일개 생활인이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읽어봐도 그 메일은 무례했다. 당신도 알리라 믿는다.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다시 메일 한 번 주시길 바란다. 언제든 당신과 대화하고 싶고 또 그럴 수 있다.

2015. 10. 19.

대리사회


  스스로 해낸 만큼이 결국 자기 자신일텐데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박탈당하고 있다. TV와 스마트폰만 열면 모든 일이 대신 일어난다. 누군가가 대신 여행을 하고, 대신 뷰티를 하고, 대신 연애를 하고, 대신 요리를 하고, 대신 노래를 하고, 대신 농사를 짓고, 대신 군대에 가고, 대신 학교에 가고, 대신 아이를 키운다. 심지어 대신 먹어주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대리 사회. 저 세계로 흡수되면 흡수될수록 우리 손발의 감각은 퇴화하고 꼭 그만큼 각자의 세계들도 축소한다. 존재감이 희미해 갈 밖에. 무력감에 바둥거릴 밖에. 스스로 만지고, 걷고, 느끼고, 보고, 들을 능력도 힘도 한 줌 남지 않게 되어버린 오늘. 우리에겐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만 남았다. 전방위적으로, 완전하게. 그저 돈만 있으면, 본래 스스로 만들고 일구고 쌓던 것들을 모두 상품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됐다. 세상 참 편해졌다. 그래서 돈이 필요한데 돈이 잘 벌리지 않는다. 때가 되면 저절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 그런 생각조차 없었는데. 누굴 원망해야 하나. 한낱 소비자로 전락한 내 자신이 먼저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그러나 화도 난다. 이런 삶을 스스로 택한 것만은 아니다. 억울하다. 이제라도 손발의 감각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 그 감각으로 호흡하고 싶다. 스스로 해내고 싶다. 아마도 브랜드 권력, 공인 권력, 엘리트 권력은 비웃을 것이다. 한낱 아마추어 주제에 쯧쯔. 맞는 말씀이다. 비브랜드, 비공인, 비엘리트 아마추어의 발버둥이다. 그러나 더 이상 소비로만 정체감을 찾는 바보로 남진 않으려 한다. 가깝고 작은 것들을 세심하게 자주 살피며 퇴화된 감각을 하나씩 회복하는 일에 열을 기울이겠다. 그렇게 조용히, 나 자신 하나 생활의 혁명을 일구어 가겠다.

추신. 인천 모백화점에서 일어난 일을 방금 뉴스로 보았다. 안타까운 일이나 드문 사건은 아니다. 이미 여러차례 우리는 목격한 바 있다. 소비자의 정체감 밖에 남지 않은 이들은 오로지 그 수단으로서만 자기존재증명을 할 밖에 모르기에 저렇게 종종 인간의 선을 이탈한다.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괴물은 태어나는 중이다. 서글픈 일이다.

2015. 10. 17.

채플린


1. 연주와 함께이던 채플린 상영은 정말 꿈결 같았다. 한 시간 반여 애써 주신 강현주 피아니스트님께 감사를! 그 손이 너무 잡아보고 싶어 악수를 청했다. “실례지만 악수 한번 청할 수 있겠습니까?” “아 네 물론이죠. 제가 영광입니다.” 오래 잊을 수 없는 상영이 될 것 같다.

2. 여자친구는 종각역 지하상가서 귀걸이를 샀다. 정말 잘 어울렸다. 가격도 좋았다. 귀걸이 바늘이 살을 뚫고 예쁘게 자리잡히는 장면을 나는 신기하게 바라봤다. “헐 아프지 않아?” 어찌보면 쓸데없는 질문인데 그 순간엔 정말 그렇게 보였다. 저 두꺼운 바늘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쑥하고 들어갈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2015. 10. 15.

산책. 2015년 가을


산책. 2015년 가을












2015. 10. 14.

두 여자


1. 두 여자를 보았다. 한 여자는 시네마테크 라운지에서. 남자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던 여자. 남자의 긴 영화사 강의를 영혼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여자는 지하철에서. 취기가 오른 남자와 나란히 앉아 있던 여자. 남자의 횡설수설을 여자는 떨치듯 외면하고 있었다. 남자가 말이 많아질 땐 대개 그의 처지가 서글플때다. 그래도 정도껏 해야 한다. 이따금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

2. 허우 샤오시엔 회고전 기념 엽서가 나왔다. 몇 장을 챙겼다.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영화 소개글은 형편 없었다. 간단한 정보문인데도 저렇게 비문이 많아야 할 이유를 몰랐다. 자객 섭은낭이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 표기된 걸 보니 기본적인 팩트 체크도 버거웠나보다. 그걸 또 컨펌해 준 에디터. 둘 다 실력 미달은 아닐테고 너무 바빠서였겠지. 그래도 이런 규모있는 기획전을 준비한다면 좀 더 성의와 신중이 있어야 했다.

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간택하셨다는 것.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 크리스트교 체계 내에선 신앙적, 역사적 사실이다. 저 믿음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걸 오늘날 받아들일 땐 하나의 상징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대 가장 핍박 받는 민족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셨을 것이다. 수천 년도 훨씬 지난 오늘까지 그걸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는 건 그냥 문해력의 부재다. 오늘날 누가 가장 핍박 받고 있을까. 아직도 이스라엘의 가공할 폭력을 지지해야 하는 걸까. 종교가 다르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 무섭다.

2015. 10. 12.

왓챠


1. 왓챠라는 서비스가 있더라. 이제야 알았다. 영화에 별점 주는 이들이 모인, 일종의 SNS인 모양이다. 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맞춤형 추천 영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곧 드라마, 책, 음악까지 사업을 확장한다고 들었다. 벌써 유저가 많은 모양이다.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었다. 나는 쓸 생각이 없다.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 별점 매기기는 하나의 작은 놀이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좋은 자기 기록도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는 내 기억을 남겨 두고 싶지 않다. 차곡이 쌓여가는 DB를 보며 시간을 평균내고 취향을 분석 당하고 내게 최적화가 된 영화가 무언지 알림받고 싶지도 않다. 그런 대차대조표가 필요치 않다. 그냥 길을 잃으면 그만이다. 헤어 나오면 좋고, 아니어도 저 길잃음 속에 또 그런대로의 유희가 있다. 무엇보다 한 번에 별을 내릴 만큼의 능력이 내겐 없다. 몇 번을 보고, 긴 시간 지나 다시 보고, 그렇게 자꾸만 지난 것들을 다시 현재로 끌어 와야 비로소 내 책이 되고 내 영화가 되는 기분이다. 취향과 습관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걸 나도 어쩔 수 없다.

2. 어제 호수 한 바퀴를 돌았다. 오후 네 시쯤의 햇살은 아직 노랗고 따뜻했다. 바람엔 제법 쌀쌀함이 감돌았다. 겉옷을 걸쳤다 벗었다 하며 걸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길이었다. 자연과 인공이 두서없이 뒤섞였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우린 대화에 몰입했고 온몸으로 퍼지는 상쾌함을 즐겼다. 몇 킬로쯤 되었을까? 천천한 걸음으로 대략 한 시간이 좀 넘는 거리였다. 차로 돌아오자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산 뒤로 곧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더 자주 허락되었으면 좋겠다고 우린 입을 모아 말했다. 걷기는 참 좋은 운동인 거 같다. 혼자면 혼자인대로 함께면 함께인대로. 부담도 덜하고, 무엇보다 몸과 정신이 함께 스르르 맑아지는 느낌이다. 일에 더 집중이 생기고 생활에 활기도 돋는 것 같다. 작년 이맘땐 몸 만들기에 그야말로 열중 했더랬는데.(지금 내 몸이 웃는다.) 스쾃 세 세트, 푸쉬업 세 세트를 하지 않으면 도무지 좀이 쑤셔 하루를 잘 닫지 못했다. 그 나름대로 괜찮은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건 부담을 주었고 갈수록 횟수가 줄어갔다. (부담이 생기는 순간 그 운동은 결코 오래 못가더라.) 매일 지키던 약속이 깨어지니 그 뒤엔 걷잡을 수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거 같다. 걷기는 부담이 없어 좋다. 하루키는 하루 꼬박 10km를 달려야 한다고 늘 스스로에 주문한단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4시간 이상 걷지 않으면 도무지 찜찜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경지는 내가 넘볼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시 몸과 정신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건가 보다. 순응할 밖에.

3.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다. 어떤 재앙을 가져 올 것인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다 알면서도 기필코 얻어야 할 것이 있기에 끝내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 결기와 간악에 공포를 느끼나 한편으론 거대한 무력감을 느낀다. 마비된 이성과 그를 맘껏 휘두를 힘을 가진 자들을 상대하기란, 힘에 부치는 일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시간 그래왔다. 불가능의 끝에 남아 서서 저항을 잇는 분들을 다만 응원할 뿐이다.

2015. 10. 11.

폭포수


우리 동네 데프콘 닮은 헤어샵 형 좀 짱인듯. 무심한 듯 친절하고 조용한 듯 조목조목하다. 오늘 처음 갔는데 30분 동안 폭풍 수다 떪.😁 주로 타투 이야기였는데, 말하는 눈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아무래도 형이 추천해준 데서 하게 될 듯 싶다.(하지만 그 형 팔뚝 디자인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한 번 맛들이면 자꾸자꾸 하고 싶어질테니 조심하라는 경고. 물론 머리도 맘에 든다. 하일라이트는 샴푸질. 그 굵고 큰 손으로 사정없이 내 뒷통수와 목덜미를 주무르는데, 와 난 폭포수를 보는 줄 알았다.

2015. 10. 10.

샹탈 아커만


  샹탈 아커만 감독의 사인이 자살로 밝혀졌다 한다. 딱 오늘 날씨 같은 기분이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 내가 본 건 [잔느 딜망] 단 한 편이었다. 9년 전 늦겨울이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과 한낮의 시간에 그녀의 영화를 보았다. 3시간 반 여 그저 한 여인의 일상을 따르는 영화. 음식을 만들고, 장을 보고, 아들을 챙기고, 뜨개질 하고, 이웃과 가벼운 식사를 하고, 일(매춘)을 하는 여자를, 도저한 느릿함으로 따르는 영화. 카메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잔인하리만치 느릿하게 바라만 본다. 저 건조한 삶을 함께 견뎌 내라는 듯. 기억에 아마 그때 난 좀 졸았던 거 같다. 학교를 도망쳐 나왔고, 점심을 걸렀고, 얼마간의 거리를 걸어 오느라 피곤해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영화라니.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마지막엔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진다), 등장인물도 거의 없는데다, 그저 지독히도 긴 리듬으로 엿보기만 하는 영화였을 줄이야. 분명 고기 다지는 장면에서 졸았던 거 같은데, 깨고 나서도 여자는 여전히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차라리 우리 엄마를 보는 게 낫겠군.’ 나는 그렇게 극장을 나왔다.

  영화의 잔상은 이상히도 오래갔다. 꾸준히 그런게 아니라 어쩌다, 가끔, 우연히 그랬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볼 때 주로 그랬던 거 같다. [잔느 딜망]은 페미니즘 영화의 전범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모양이지만, ( ‘사회불평등론’ 과목 땐 어쭙잖게 이 영화로 성불평등 파트를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인만을 향한 영화는 아닌 듯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상은 짙어가고 있다. 무기력에 관한 영화. 내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 나는 이 영화를 많이 떠올렸다. 그러나 역시 엄마를 바라볼 때 자주 잔느의 얼굴이 자주 겹쳐졌더랬다. 다시 봐도 그녀와 삶, 외양 모두 비슷한 거 같다. 잔느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생각보다 오랜시간 나는 엄마에게서 일일 연속극 속 고두심 같은 캐릭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자기 희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여자. 숫제 그를 긍정하며 여전히 억척스레 살아가려는 여자. 그러면서도 예의 묵묵함과 위엄스런 기세로 자식과 남편을 토닥이기까지 할 줄도 아는 여자. 그러나 엄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었다. 평범한 여자였다. 너무 오랜 시간 당신에 대한 착취 위에 우리 가족은 버티어 서 온 걸지도. 이제와 무얼 해드릴지도 모르겠고, 내깐에 뭘 해드리려 해도 당신이 먼저 겁을 내는 것이 보인다. 엄마는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기에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남은 시간이 지금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기를, 그저 바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만 65세의 나이. 아커만 감독은 왜 스스로 목숨을 던진 걸까? 최근까지 영화를 넘어 설치 미술 영역까지 왕성히 활동하던 그녀였는데.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서 [위로공단]과 수상을 가름하기도 했다.) 창작의 고통이 지독했던 걸까. 혹은 이제 자기 존엄이 더이상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잔느처럼 질병같은 무기력에 갑자기 감염된 것일까. 알 수 없다. 서글픈 일이다.



2015. 10. 7.

추상적으로 구는 일


홍상수 [해변의 여인] 중에서

  이를테면 법, 행정, 사회운동, 학문 따위의 분야에선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할 것이다.(일부 외계어 쓰는 학문 제외.)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감정을 담아내고 관찰하는 분야에서라면 그 언어가 좀 추상적이고, 에둘러 가고, 습기를 머금는다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할 것이다.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자는 것이 아니므로. 가령 홍상수의 인터뷰는 열심히 읽어도 사실 별 도움이 안된다. 그는 읽는 이가 질릴만치 추상적인 어휘만을 사용한다. “예뻐요” “좋아보여요” “둥글고 순수한 거 같아요” 따위의 대답들. 숫제 그마저도 귀찮아한다.(기자들이 인터뷰하기 가장 애먹는 감독.) 뭔가 하나라도 얻어야 할 텐데. 그걸 실어 팔아야 할 텐데. 기자들의 초조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는 그저 내키는대로 기하학의 인터뷰를 할 뿐이다. 처음부터 그래왔다. 어째서일까.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는 문숙을 앉혀 놓고 노트에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먹물출신 답게 그럴싸한 말장난을 동원하지만 기실 간단한 이야기다. 단점(單點)으로 구성된 인간은 세상에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은 수천수만 아니 셀 수 없을만큼의 많은 점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걸 잇는다면 하나의 도형이 될 수 있고 그 도형을 어떤 이의 ‘본질'이라 부를 수 있다면, 몇 가지 점들만을 보고 그걸 연결해 그 사람이라 말하는 건 원래의 복잡한 도형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냐는 거다. 그렇게 우리는 상투성을 생산하고 있지 않느냐는 거다. 중래는 거의 절규하듯 말한다. “이 상투적인 이미지와 싸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똑똑한 듯 하나 백치의 구석도 있는 문숙은 잠자코 듣기만하더니 ‘그렇구나.’ 한 마디하며 그를 멋있다고 한다. 관객은 중래가 전날밤 딴 여자와 잤으며 그걸 덮기 위해 지금 얼마나 졸렬히 굴고 있는지 알고 있다. 키득거릴 수 밖에. 그러나 홍상수는 저런 인물조차 ‘귀엽고 예쁘다’고 한다. 우리 조금씩 다 그렇게 살지 않냐고. 저 몇 개의 점들 간 연결로 제멋대로 어떤 이의 도형을 만들어 말하고 기억하고 전달하며 살지 않냐고. 홍상수의 기하학은 그러니까, 저렇게 추상적인 도형을 그려 놓고 그 위에 되도록 다양한 점을 찍어야만 비로소 실체, 본질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상투성을 완전하게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며 다만 자신은 영화를 만들며 그것과 싸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세상을 감히 판별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래야 사는 게 복잡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어떤 일과 대상에는 필사적으로 그걸 멀리해야만 할 때가 있다. 애써 복잡한 도형을 그리고, 추상적으로 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편견과 독단과 폭력을 피해야만 한다. 좋은 예술들은 대개 그걸 하려고 한다.

   홍상수의 언어가 매우 추상적인 까닭은 그러므로 명징한 개념화의 덫을 피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건 그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상투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맹렬한 의지. 나는 그 애씀을 깊이 존중한다. 대개 반복과 대구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영화들 거의 모두가 저 괴물과 싸우는 듯 보인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언어는 더없이 생동감 넘치고 충만하고 귀엽다. 그들이 서로 섬세한 생활언어를 주고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슬퍼할 때조차, 찌질하게 굴 때 조차, 불현듯 맥락을 끊고 우스꽝스럽게 들어올 때조차, 그의 인물들은 ‘예쁘다’. 상투성에 사로 잡혀 사는 인물들조차 그렇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생을 긍정할 작은 힘을 얻게 된다. 거리의 사람들, 동물들, 바람들은 물론이고, 제멋대로 핀 나무 둥치 아래 잡풀이나, 심지어 구석의 두서없는 쓰레기더미조차 다른 채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진짜 긍정의 힘은 이런 데 있다.

2015. 10. 3.

진짜 어른




1. 공동체의 유산과 전통을 수호하고 이의 유지 존속에 어떤 길이 옳은 것일까를 고민하는 것. 이를 보수의 본령이라 한다면, 어찌 뿌리 깊은 보수주의자라 하여 젊은이들이 참 배움을 구하려 먼저 찾고 존경을 전하는 누군가가 되지 못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보수주의가 강고하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참된 보수주의자, 참된 어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닐까. 보수의 외피를 두른 기회주의자, 권위주의자, 후안무치인들이 그자리를 대신하고 제멋대로 힘을 휘두르는 세상. 여러 뜻을 들으려도 않고 들을 능력도 없는 꼰대들이 강고하고 두텁게 중심을 차지해 이런저런 가치를 재단하는 세상. 서글프다.

2.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고집불통의 노인이다. 손녀의 피어싱에 강한 혐오의 낯빛을 하고, 갓 성직자 수업을 마친 신부를 어리다는 이유로 모욕한다. 건너 옆 집 사는 흐멍족 가정을 야만족이라고 무시하고, 자식들의 호의(를 가장한 이기심)에는 폭언으로 응수하는 아버지이다. 미연방 국기를 현관 앞에 늘상 걸어두고 사는 속칭 외로운 꼴보수 노인. 그러나 그는 자신을 괴롭혀왔던 어떤 문제를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죄없는 어린 아이들을 열 셋이나 살상했다며 나는 그렇게 더럽고 죄악 많은 인간이라고 스스로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흐멍족 소년 타오와 만남을 갖게 된다. 그리 편치만은 않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 둘은 서서히 정서적 물리적 간격을 좁혀가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타오와 그의 가족은 심각한 외부의 폭력에 노출되고 만다. 매우 다급하고 무거운 폭력 앞에 노인은 고뇌한다. 이 폭력의 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그는 그만의 결단을 한다. 그리고 삶에서 미련없이 퇴장한다.

3.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마도 우리 시대가 보유한 가장 근사한 보수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대한 근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과연 변화하는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 화해할 것인가를 끈질기게 성찰하는 사람. 여든 다섯을 넘긴 육신을 끌고도 그 애씀에는 단절이 없다. 그가 지켜야 한다고 믿어온 것은 졸렬한 자기 이해가 아니라 늘 인간의 얼굴을 한 어떤 가치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녹아듦의 자세로 세계의 균열을 끌어 안으려 부단한 사람. 정말 이런 어른이 그립다. 그의 신작이 보고 싶다. 부디 만수무강 하시길.

2015. 10. 1.

필사적으로 맞잡기



말년병장 챕흘린의 일일 One Fine Day | 이유만 | 2008 | 한국 | DV 

 서울아트시네마서 ‘찰리 채플린 회고전’이 열린다. 기념하는 뜻에서 짤막한 영상 하나를 올린다. 7년 전 봄, 군에서 친구들과 만든 10분짜리 UCC다. 채플린에 대한 나름의 존경과 헌사를 담아 만들었다. 허나 그 수준이 너무 조악하고 서투르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재생을 피하실 것을 권해 드린다.) 당시 8사단 가을 축제 때 상영한 뒤 홈페이지 게시용으로 함께 제출한 영화 연출의 변 전문을 첨부했다. 병장 4호봉쯤 되었기에 저런 뻔뻔하고 개념없는 투의 글을 겁없이 낼 수 있었다.(결국 크게 욕먹고 대거 수정된 버전으로 다시 제출했다.) 이번에도 채플린을 다시 볼 것이다. 우리 곁 가까이를 맴돌았던 방랑의 천사. 그는 늘 함께 울고 웃고 사랑했다. 그 자신의 비련한 운명과, 세상의 모든 힘없고 가련한 것들을. 그 진실함이 중요했던 사람. [키드]의 저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그는 끝내 아이의 손을 놓지 못했다. 환상을 빌어서라도 그 맞잡음을 지키려 애썼다. 자신 삶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그 자리를 벗어난 적은 (내가 알기로)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늘 필사적이었다.(2015)


[말년병장 챕흘린의 일일] 연출의 변
작성자 : 병장 이유만
작성일 : 2008년 9월 26일 금요일
수신자 : 73대대 정보과장 중위 오상철

정보보안 주제로 UCC하나 찍지 않겠냐는 제안에 군에서 이런 기회 어디이며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차, 덥썩 받아들여 찍은 작품. 그게 5월 중순이니 요거 한 4개월쯤 된 거다.
군에서 보안이라면야 ‘니들 이런거 이런거 위반하면 정말 ×돼'라는 내용으로밖에 채워질 수 없는 노릇. 뻔한 내용이라면 형식이라도 특이해보자는 내 제안이었지만 애들은 하나같이 심드렁한 얼굴에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흑백에 무성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러려면 뭔가 명분이 필요했다. 장교들과 부사관도 설득해야 했지만 우리 스스로가 먼저 납득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얘들아, 난 캠코더루 칼라영화 자신없다. 그리구 여긴 군대. 온통 초록빛 영화는 좀 끔찍하지 않겠니? 무성영화가 대사부담도 없고 좋을거야. 제대로 우리의 똘기를 보여주자. 응?”
“정훈장교님. 73대대를 대표해 출품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수상작들을 보니 너무 억지스럽게 쥐어짜듯한 유머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팀은 좀 다르게 웃겨보고 싶습니다. 웃기면서도 독특하면서도 교훈적인 그런 멋진 작품을 들고 오겠습니다.”
멋진 작품은 개뿔. 그럴 능력이 있기나 했나. 그럴 의도가 있기나 했나. 이건 애초부터 작정된 엉터리 영화였다. 군의 해설픈 계몽주의와 꼰대스런 엄숙주의를 향한 일종의 침뱉기쯤 될까. 아니,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진실하다. 우린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놀자는 생각외엔. 우리의 우정을 이렇게 기록해두잔 뜻외엔. (채플린을 향한 노골적 헌사인)주인공을 보고 이건 뭐 웃기지도 않고 좀 어이없잖아 싶으시다면, 그거 맞게 보신거다. 얼굴에 콧수염하나 그려주고 ‘챕흘린'이라고 이름지어주면 대충 알아먹겠거니 했던거다. (채플린의 저 위대한 이름에 흠을 내어 죄송할 따름이다.) 그저 방랑하는 이미지, 웃기면서도 슬픈 얼굴을 차용한 외에는 채플린에 대한 어떤 심오한 대입도 없었다. 정말 나이브했다.
이왕에 이럴거였다면 어째서 해롤드로이드나 버스터키튼, 채플린을 제대로 흉내내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만큼의 액션력도, 표정연기도, 아이디어도, 휴머니즘도, 연출력도, 돈도 없으니 그런 꿈일랑 접어치우고 그냥 노는 수밖엔 없었다. 그래도 무성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은 조금이나마 담고 싶었다.
처음 아이디어 기획 회의에서 편집 마무리까지 딱 일주일밖에 안걸렸다. 촬영은 하필 진지공사주간이라 일과 중엔 안됐고, 17시부터 해지기 전까지 딱 세시간씩 3일간. 편집은 토요일 하루 꼴딱 밤새워서.(그러고도 이튿날 초번초 경계근무나간 오광석 상병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그러니까 일주일 짜리 B무비인셈이다. 제작자-8사단 포병연대-가 원하는 계몽적 내용으로 납품하듯이 초날림으로 찍었으면서, 정교한 각본이나 콘티 없이 현장에 뛰어 들었고, 맘에 안들어도 시간없고 배고프고 귀찮으니까 그냥 OK내고, 편집 땐 앞에 썼던거 잘라다 뒤에 또 쓰고 뭐 등등. B무비 정신만큼은 (의도치는 않았지만) 제대로 구현해낸 셈이다.
엉터리 영화이긴 하지만 찍는 우리끼린 재밌었다. 그걸로 다라고 본다. 포상도 받았고. 그냥 웃자고 만든거지 뭐. 이정도면 B무비가 제 역할은 다 한셈 아니겠는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