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3.

진짜 어른




1. 공동체의 유산과 전통을 수호하고 이의 유지 존속에 어떤 길이 옳은 것일까를 고민하는 것. 이를 보수의 본령이라 한다면, 어찌 뿌리 깊은 보수주의자라 하여 젊은이들이 참 배움을 구하려 먼저 찾고 존경을 전하는 누군가가 되지 못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보수주의가 강고하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참된 보수주의자, 참된 어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닐까. 보수의 외피를 두른 기회주의자, 권위주의자, 후안무치인들이 그자리를 대신하고 제멋대로 힘을 휘두르는 세상. 여러 뜻을 들으려도 않고 들을 능력도 없는 꼰대들이 강고하고 두텁게 중심을 차지해 이런저런 가치를 재단하는 세상. 서글프다.

2.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고집불통의 노인이다. 손녀의 피어싱에 강한 혐오의 낯빛을 하고, 갓 성직자 수업을 마친 신부를 어리다는 이유로 모욕한다. 건너 옆 집 사는 흐멍족 가정을 야만족이라고 무시하고, 자식들의 호의(를 가장한 이기심)에는 폭언으로 응수하는 아버지이다. 미연방 국기를 현관 앞에 늘상 걸어두고 사는 속칭 외로운 꼴보수 노인. 그러나 그는 자신을 괴롭혀왔던 어떤 문제를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죄없는 어린 아이들을 열 셋이나 살상했다며 나는 그렇게 더럽고 죄악 많은 인간이라고 스스로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흐멍족 소년 타오와 만남을 갖게 된다. 그리 편치만은 않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 둘은 서서히 정서적 물리적 간격을 좁혀가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타오와 그의 가족은 심각한 외부의 폭력에 노출되고 만다. 매우 다급하고 무거운 폭력 앞에 노인은 고뇌한다. 이 폭력의 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그는 그만의 결단을 한다. 그리고 삶에서 미련없이 퇴장한다.

3.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마도 우리 시대가 보유한 가장 근사한 보수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대한 근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과연 변화하는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 화해할 것인가를 끈질기게 성찰하는 사람. 여든 다섯을 넘긴 육신을 끌고도 그 애씀에는 단절이 없다. 그가 지켜야 한다고 믿어온 것은 졸렬한 자기 이해가 아니라 늘 인간의 얼굴을 한 어떤 가치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녹아듦의 자세로 세계의 균열을 끌어 안으려 부단한 사람. 정말 이런 어른이 그립다. 그의 신작이 보고 싶다. 부디 만수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