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7.

추상적으로 구는 일


홍상수 [해변의 여인] 중에서

  이를테면 법, 행정, 사회운동, 학문 따위의 분야에선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할 것이다.(일부 외계어 쓰는 학문 제외.)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감정을 담아내고 관찰하는 분야에서라면 그 언어가 좀 추상적이고, 에둘러 가고, 습기를 머금는다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할 것이다.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자는 것이 아니므로. 가령 홍상수의 인터뷰는 열심히 읽어도 사실 별 도움이 안된다. 그는 읽는 이가 질릴만치 추상적인 어휘만을 사용한다. “예뻐요” “좋아보여요” “둥글고 순수한 거 같아요” 따위의 대답들. 숫제 그마저도 귀찮아한다.(기자들이 인터뷰하기 가장 애먹는 감독.) 뭔가 하나라도 얻어야 할 텐데. 그걸 실어 팔아야 할 텐데. 기자들의 초조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는 그저 내키는대로 기하학의 인터뷰를 할 뿐이다. 처음부터 그래왔다. 어째서일까.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는 문숙을 앉혀 놓고 노트에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먹물출신 답게 그럴싸한 말장난을 동원하지만 기실 간단한 이야기다. 단점(單點)으로 구성된 인간은 세상에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은 수천수만 아니 셀 수 없을만큼의 많은 점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걸 잇는다면 하나의 도형이 될 수 있고 그 도형을 어떤 이의 ‘본질'이라 부를 수 있다면, 몇 가지 점들만을 보고 그걸 연결해 그 사람이라 말하는 건 원래의 복잡한 도형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냐는 거다. 그렇게 우리는 상투성을 생산하고 있지 않느냐는 거다. 중래는 거의 절규하듯 말한다. “이 상투적인 이미지와 싸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똑똑한 듯 하나 백치의 구석도 있는 문숙은 잠자코 듣기만하더니 ‘그렇구나.’ 한 마디하며 그를 멋있다고 한다. 관객은 중래가 전날밤 딴 여자와 잤으며 그걸 덮기 위해 지금 얼마나 졸렬히 굴고 있는지 알고 있다. 키득거릴 수 밖에. 그러나 홍상수는 저런 인물조차 ‘귀엽고 예쁘다’고 한다. 우리 조금씩 다 그렇게 살지 않냐고. 저 몇 개의 점들 간 연결로 제멋대로 어떤 이의 도형을 만들어 말하고 기억하고 전달하며 살지 않냐고. 홍상수의 기하학은 그러니까, 저렇게 추상적인 도형을 그려 놓고 그 위에 되도록 다양한 점을 찍어야만 비로소 실체, 본질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상투성을 완전하게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며 다만 자신은 영화를 만들며 그것과 싸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세상을 감히 판별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래야 사는 게 복잡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어떤 일과 대상에는 필사적으로 그걸 멀리해야만 할 때가 있다. 애써 복잡한 도형을 그리고, 추상적으로 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편견과 독단과 폭력을 피해야만 한다. 좋은 예술들은 대개 그걸 하려고 한다.

   홍상수의 언어가 매우 추상적인 까닭은 그러므로 명징한 개념화의 덫을 피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건 그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상투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맹렬한 의지. 나는 그 애씀을 깊이 존중한다. 대개 반복과 대구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영화들 거의 모두가 저 괴물과 싸우는 듯 보인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언어는 더없이 생동감 넘치고 충만하고 귀엽다. 그들이 서로 섬세한 생활언어를 주고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슬퍼할 때조차, 찌질하게 굴 때 조차, 불현듯 맥락을 끊고 우스꽝스럽게 들어올 때조차, 그의 인물들은 ‘예쁘다’. 상투성에 사로 잡혀 사는 인물들조차 그렇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생을 긍정할 작은 힘을 얻게 된다. 거리의 사람들, 동물들, 바람들은 물론이고, 제멋대로 핀 나무 둥치 아래 잡풀이나, 심지어 구석의 두서없는 쓰레기더미조차 다른 채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진짜 긍정의 힘은 이런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