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0.

샹탈 아커만


  샹탈 아커만 감독의 사인이 자살로 밝혀졌다 한다. 딱 오늘 날씨 같은 기분이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 내가 본 건 [잔느 딜망] 단 한 편이었다. 9년 전 늦겨울이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과 한낮의 시간에 그녀의 영화를 보았다. 3시간 반 여 그저 한 여인의 일상을 따르는 영화. 음식을 만들고, 장을 보고, 아들을 챙기고, 뜨개질 하고, 이웃과 가벼운 식사를 하고, 일(매춘)을 하는 여자를, 도저한 느릿함으로 따르는 영화. 카메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잔인하리만치 느릿하게 바라만 본다. 저 건조한 삶을 함께 견뎌 내라는 듯. 기억에 아마 그때 난 좀 졸았던 거 같다. 학교를 도망쳐 나왔고, 점심을 걸렀고, 얼마간의 거리를 걸어 오느라 피곤해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영화라니.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마지막엔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진다), 등장인물도 거의 없는데다, 그저 지독히도 긴 리듬으로 엿보기만 하는 영화였을 줄이야. 분명 고기 다지는 장면에서 졸았던 거 같은데, 깨고 나서도 여자는 여전히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차라리 우리 엄마를 보는 게 낫겠군.’ 나는 그렇게 극장을 나왔다.

  영화의 잔상은 이상히도 오래갔다. 꾸준히 그런게 아니라 어쩌다, 가끔, 우연히 그랬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볼 때 주로 그랬던 거 같다. [잔느 딜망]은 페미니즘 영화의 전범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모양이지만, ( ‘사회불평등론’ 과목 땐 어쭙잖게 이 영화로 성불평등 파트를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인만을 향한 영화는 아닌 듯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상은 짙어가고 있다. 무기력에 관한 영화. 내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 나는 이 영화를 많이 떠올렸다. 그러나 역시 엄마를 바라볼 때 자주 잔느의 얼굴이 자주 겹쳐졌더랬다. 다시 봐도 그녀와 삶, 외양 모두 비슷한 거 같다. 잔느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생각보다 오랜시간 나는 엄마에게서 일일 연속극 속 고두심 같은 캐릭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자기 희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여자. 숫제 그를 긍정하며 여전히 억척스레 살아가려는 여자. 그러면서도 예의 묵묵함과 위엄스런 기세로 자식과 남편을 토닥이기까지 할 줄도 아는 여자. 그러나 엄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었다. 평범한 여자였다. 너무 오랜 시간 당신에 대한 착취 위에 우리 가족은 버티어 서 온 걸지도. 이제와 무얼 해드릴지도 모르겠고, 내깐에 뭘 해드리려 해도 당신이 먼저 겁을 내는 것이 보인다. 엄마는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기에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남은 시간이 지금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기를, 그저 바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만 65세의 나이. 아커만 감독은 왜 스스로 목숨을 던진 걸까? 최근까지 영화를 넘어 설치 미술 영역까지 왕성히 활동하던 그녀였는데.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서 [위로공단]과 수상을 가름하기도 했다.) 창작의 고통이 지독했던 걸까. 혹은 이제 자기 존엄이 더이상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잔느처럼 질병같은 무기력에 갑자기 감염된 것일까. 알 수 없다. 서글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