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30.

미도리와 나오코


하연수를 보니 미도리가 떠올랐다. 엉뚱하고, 소소함을 사랑하며, 저래도 되나 싶게 해맑은 사람. 그러나 또 속엔 알 수 없을 상처가 자리할 것만 같은 사람.(제멋대로 상상 죄송합니다.) 끌린다. 전엔 달랐다. 이상형을 질문 받으면 줄곧 ‘사연있어 보이는 여자'라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나오코같은. 보고만 있어도 슬픔이 질척거리는 여자. 가슴에 무한대의 블랙홀이 심어졌을 것 같은 사람. 홍상수의 김민희를 보니 나오코가 떠올랐다. 나오코보단 역시 미도리군. 하고 생각했다. 이젠 나도 변한 것이다. 1부와 2부의 그녀는 같은 여자일 것이다. 마음과 시선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 관찰해도 서로 다른 우연의 빛이 틈입해 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므로. 나는 거기에 매우 동의하므로. 2부의 김민희는 그럼에도 너무 예뻤다. 속에 상처 품지 않은 사람 어딨을까. 저마다의 사연쯤 모두 품고 산다. 다만 드러나는 모양이 예쁜 사람. 그런 얼굴빛을 가진 사람이 점점 좋다.



2015. 9. 28.

싸이월드


  싸이월드를 백업 받았다. 대충 훑어 보았다. 차마 정면으로 볼 용기는.. 그 세월의 저들과 내가 있었다. 좋기도 하였고 우습기도 하였고 슬프고 오글거리기도 하였다. 하여간 그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 흩어졌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나, 얼마간 나나 당신이 서로 도망친 탓도 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알 수 없다. 영문 몰라 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왜 멀어지는 거냐고. 왜 나타나지 않는거냐고. 거기에 나도 당신들도 뚜렷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서 사라졌다. 지금은 누구도 관심갖지 않을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갑자기 사라져간 무엇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이야기.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오랜 시간 품어 온 의문. 또는 상처. 그의 운전사가 말한다. 거기엔 아무 답이 없는 것이라고. 무언가 두려워 도망친 것이든, 또한 어떤 불가피한 상황이 닥쳐온 때문이든, 어떤 병이 시킨 일이든(가슴 속의 블랙홀). 하여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머리 쥐어 짜 본들 끝내 거대한 물음표 앞에 다시 주저 앉게 될 뿐이라고. 젊은 여자는 나이 지긋한 남자에게 진짜로 그렇게 말한다. ‘사라진 건 사라진 것이다.’ 그 대목이 내게 힘을 주었더랬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많은 걸 두려워했다.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방법 말고는 달리 무얼 몰랐다. 무작정 사라졌다. 옳은 방법이 아님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 떠나간 당신들에게 상처를 입었더랬다. 저 흔적들이 그 시간을 보여 주었다. 뭔가를 말한 시간 보다, 도망쳐 빈 여백이 된 시간들이 더 잘 나와 당신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우린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움에 남은 자들은 그저 꿀꺽 삼키고 살아갈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2015. 9. 22.

산책. 2015년 가을


산책. 2015년 가을











2015. 9. 6.

기적


한 손엔 채집통을 들고 어깨엔 잠자리채를 걸친 채 설렌 발걸음을 걷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무 작대기 하나씩을 나눠 들고 힘껏 카페트 먼지를 털어내며 깔깔 거리는 한 가족을 보았다. 서로의 입에 방울 토마토를 넣어주고 볼록해진 볼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장난치는 남매를 보았다. 공사장 한켠에서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일꾼들을 보았다. 그들 중 한사람 어깨의 문신이 맘에 들었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이젠 제법 가벼워진 바람을 맞으며 지나가는 연인들, 가족들, 혼자들을 바라봤다. 저마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쳇 베이커의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문승욱의 [망대]라는 영화를 보았다. 신비롭고 슬프고 아름다웠다. 삶은 기적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2015. 9. 5.

같이 늙어가자


장마철이면 책과 사진들이 쭈글해지는 게 맘에 걸리곤 했었는데(정작 볼 땐 험하게 다루면서!), 올해도 제습기 구입의 망설임을 잘 떠나 보냈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가을, 겨울엔 다시 펴지니까 여름엔 좀 쭈글해져도 괜찮겠지. 흔적이야 남겠지만 나도 나이 먹으며 변해가는데 아끼는 물건들이라고 언제나 그 모양일 필요는 없지 않겠나. 되려 그게 이상할 것 같다. 같이 늙어가자.💤

2015 대만 여행.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10주년 및 자객 섭은낭 대만 개봉 기념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10주년 및
자객 섭은낭 대만 개봉 기념

2015년 여름







































2015. 9. 4.

차이밍량, 아피찻퐁




1. 저리들 시원하게 한 번 밀어보고 싶다. 태어나 한 번도 저 길이여 본 적이 없다. 군에서 마저도.

2. 저기가 차이밍량이 운영한다는 그 카페인가?

3. 어젯밤엔 [징후와 세기]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안개같다. 병원 한공간을 자욱이 채우던 그 안개. 겨우 진공관으로 빨려 나가던 안개. 짧지만 강렬한 질식감을 주던 그 안개.

4. 아피찻퐁에게 정글만큼 중요한 공간은 병원인 듯싶다. 그의 인물들은 늘 어딘가 아프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그 둘 모두가 아프거나.

5. 차이밍량과 아피찻퐁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공유하지 않나 싶다. 마르케스 문학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인물과 로케와 사물을 그린다. 그런데 결국엔 원시성과 환상성으로 퍼져 나가고 만다. 아피찻퐁이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노는 방식은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한다. 보는 이가 오인하도록 유도한 다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방향을 확 틀어버린다. 차이밍량은 그의 인물들을 자꾸만 사람이기보다 유령처럼 그리려 한다. 밥을 먹게하고 눈물을 흘리게하고 섹스를 하게 하고 잠을 재우는데도. 그 기이함을 도무지 모르겠다.

6. 어릴적 할머니 손을 붙잡고 동굴로 들어가는 배를 탔던 기억이 난다. 그 어두컴컴한 속에서 조잡한 인형들이 야한 빛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모형 동물들은 녹음된 울음소리를 기묘히 울어댔다. 호랑이의 눈에서 빛이 새나오는 것만 같았다. 밤에 홀로 숲길을 산책할 때면 그때 그 기억으로 붙들려 간다. 아피찻퐁의 정글을 볼 때도 어김없이 그런다.

7. 검열을 피해 더는 태국에서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아피찻퐁은 선언했다. 남미로 갈거라고. 안타까우면서도 한편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기대된다. 그의 앞날에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