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8.

영화는 영화가 아닌 곳에서 길어져야 한다


1. 라오슈강이 주편한 허우 샤오시엔 대담집.
   [영화는 영화가 아닌 곳에서 길어져야 한다]

2. 칠십 노인의 불복종 운동.
   (생명 학대 반대, 공동체 파괴 반대)









2016. 3. 20.

칼릴 지브란의 말


그러자 한 늙은 사제가 말했다.
우리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제가 오늘 종교 말고 다른 무엇을 말했던가요?
모든 행위, 모든 사색이 종교 아닌가요?
또한 행위도 사색도 아니지만,
심지어 손으로 돌을 다듬고 베틀로 옷감을 짜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것 역시 종교 아닌가요?
그 누가 자신의 행위와 신앙을,
또는 자신이 하는 일과 믿음을 분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기 시간을 자신 앞에 펼쳐 놓고
‘이건 신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이건 내 영혼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내 육체를 위한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들의 모든 시간은
지금의 나에서 다음의 나를 향해,
퍼덕이며 창공을 날아가는 날개입니다.
도덕을 가장 좋은 옷으로 여기고, 그걸 입고 있는 사람은
차라리 벌거벗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해도 바람과 태양이 그의 살갗에
구멍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윤리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노래하는 새를 새장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철망과 빗장을 통해서는
최고의 자유의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예배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창문처럼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집, 새벽에서 새벽까지 창문이 열려 있는 그 집에
아직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들의 나날의 삶이
그대들의 사원이며 그대들의 종교입니다.

그대들 그 사원에 들어갈 때마다
그대들의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가기를.
쟁기와 풀무와 나무망치와 류트,
필요해서 만든 것이나 즐기기 위해서 만든 것
그 모두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몽상 속에서도 그대들은
그대들이 성취한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고,
그대들이 실패한 것 이하로 내려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찬양 속에서도 그대들은 저들의 희망보다 높이 날 수 없고,
저들의 절망보다 더 낮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를 풀려는 사람처럼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대 자신을 둘러보십시오.
그러면 신께서 그대의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허공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구름 속을 걷고, 번개 속에 팔을 뻗고, 비를 타고 내려오는
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대들은 꽃들 속에서 미소짓고,
위로 올라가 나무 사이에서 손 흔들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 '종교에 대하여' 편

2016. 3. 18.

비워진 자리에 채워지는 것


지아장커 [산하고인] 중에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이다. 확실히 그랬다. 사랑에 앞서 방법을 고민했을 때, 줄곧 나는 실패했다.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산하고인]을 저평가하는 이들도 결국 이 맥락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식을 먼저 앞세웠다는 것.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 뭐하나. 슬픔을 보여주려는 액자가 먼저 둘러쳐 있는데. 그랬다. 거기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플롯의 측면, 화면 비의 측면. 삶이 어떻게 선형적인 서사로 그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고, 삶이 어떻게 표준화면에서 시네마스코프로 (균등히) 번져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의한다. 확실히 이 영화는 지아장커의 전작들과 다르다. 나는 특히 99년을 다룬 에피소드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아직 돈의 폭력에 물들기 전 저들의 사랑, 우정은 지나치게 매끈한 드라마로 전개된다. 그랬을 뿐 아니라, 전에 볼 수 없던 얕은 심도의 화면과 팬, 트래킹 등 촬영술의 유려함이 전시된다.(이제껏처럼 유릭와이가 찍었다.) 99년, 2014년, 2025년 세 시대를 통과할 때마다 화면 비가 달라진다. 불평들은 충분히 그럴만하다. 나도 낯설었고, 왜 이랬을까 싶었다.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영화의 중반.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던 주인공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이 점이 이상했다. 탄광 노동자 리앙즈.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성공한 친구에게 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탄광 노동자다. 그의 삶은 위태롭다. 탄광은 언제 문을 닫을 지 모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사이 그는 큰 폐병을 얻었다. 수술을 위해 아내, 갓난 아이와 큰 도시로 올라온다. 그는 누워 쉬고, 아내가 돈을 빌리러 나선다. 그녀가 찾은 사람은 리앙즈의 옛 사랑 타오다. 타오는 진솅과의 결혼 이후 제법 큰 사업체를 갖게 됐다. 사연을 전해 듣고 리앙즈를 방문한다. 진솅과의 이혼, 아들 양육권까지 내준 소식을 전한 뒤 그녀는 품에서 돈 뭉치를 꺼낸다. 그는 그 돈을 거절할 수 없다. 살아야 한다. 굴욕감이 들지만 사치를 부릴 순 없다. 고맙다고 넙죽 받는다. 이 장면은 슬프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리앙즈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일이다. 줄곧 영화가 그의 감정선을 따르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타오와 그녀의 아들 달러의 이야기다. 달러는 아버지를 따라 새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호주로 유학 보내졌다. 타오는 달러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부른다.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리앙즈. 그는 왜 그렇게 퇴장해야 했을까. 이 질문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아장커의 전작들은 모두,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나가는가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릴 적 친구를 잃고도, 또한 건강과 앞날까지 잃고도) 리앙즈가 어떤 삶을 이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지아장커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돈으로 수술은 잘 받았는지, 그랬다면 다시 탄광으로 복귀했는지, 아니라면 무슨 일을 얻게 되었을지, 아내, 아이와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이야기가 계속돼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과감히 그를 떠나 보낸다. 그 결단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려온 세계를 닫은 대신 새롭게 열어 젖힌 세계는 무엇일까. 비워내고 그 자리에 대신 채운 것.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시, 타오와 달러. 모자는 함께 장례를 치른다. 달러는 생모 앞에서 자꾸 빌려 온 아이처럼 군다. 그 모습이 타오의 가슴을 후벼 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달러는 이제껏 생모인 타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사흘의 시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구축하기에 너무 짧다. 그 점을 타오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덤덤히 말한다. “달러, 넌 아빠랑 사는 게 나아. 아빠랑 살면 국제학교도 가고 유학도 갈 수 있어.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어.” 이 장면도 슬프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엄마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배경은 2025년 호주가 된다. 달러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 아버지 진솅은 고집불통이 되어버렸고, 새엄마는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온갖 풍요에 둘러싸여 있지만 달러는 공허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다. “어머니 이름은 뭐니?” “전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없다니 그럼 넌 뭐니?” “저는 시험관 아기에요.” “그래도 엄마는 있지.” “그럼 선생님 이름은 뭐에요?” “(사실) 나도 잊었어!” 달러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앞길을 알 수 없지만 대학은 관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에 진솅은 격노한다. 급기야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달러는 집을 뛰쳐나와 선생님과 여행을 떠난다. 가장 낭만적인 순간에, 그는 그녀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 둘은 잠자리를 한다. 달러에게 선생님은 여자이자 엄마다. 오롯이 홀로 서기 위해서는, 친밀한 타인의 도움이 얼마간 필요한 법이다. 선생님은 그러나 둘의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 두렵다.(달러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 아이와 더 깊은 사랑은 안 돼. 그녀는 달러를 친모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달러의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결정에 달러는 실망과 두려움을 느낀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지아장커의 관심이 한결 같다는 데 안도했다. 그는 리앙즈의 남은 이야기를 멈춘 자리에 달러의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 리앙즈는 ‘이미 잃어 버린 자’고, 달러는 ‘앞으로 잃어갈 자’이다. 그간의 세계가 ‘상실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풍요의 자리에 무엇이 비어가는가’를 다룬다. 결국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의 연민은 계속된다. 물론 이 영화는 도식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단점들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는 서정이 있다. 그 서정의 순수성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 서정은 귀한 것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온 지난 영화들과 이 영화와의 관계망 속에서 찾아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모 평론가는 “영화는 개인적 야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며 단죄하듯 이 영화를 폄훼했는데,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가 지키는 야심은 무엇이며 그 삶의 순수성은 어느 수준으로 견지되어 왔나. 그 궤적을 묻고 싶다.) 형식이 앞섰다는 애초의 지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특히 화면 비의 문제. 나는 화면비가 확대돼 나가는 것이, 그의 치기어린 형식주의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감정들과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이 양 옆으로 길어질수록 인물 간의 정서도 이격되어간다고 느꼈다.(허우 샤오시엔이 표준 화면으로 [자객 섭은낭]을 그리지만, 칠현금 장면에서만 비스타 비젼으로 확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만의 까닭’에서 지아장커는 화면 비를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타오, 리앙즈, 진솅이 한 데 모여 집단군무를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때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텅 빈 자리를 그저 응시한다. 진솅은 여전히 놈팽이 짓을 할 것이고, 선생님은 안전한 생활로 복귀할 것이다. 달러는 티켓을 받아들고 고민할 것이고, 타오는 기다림의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리앙즈는, 모르겠다. 살아있다면, 그의 가족들과 행복했으면 좋겠다. 부디.

2016. 3. 12.

이세돌


승부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세돌의 얼굴이었다. 한 수 한 수 혼을 담아 올리듯, 무게있지만 가늘게 떨리던 손도. 대국이 끝나고 냉철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또한 상대의 높은 실력을 겸허히 수용하며 멋쩍게 웃어보일 땐, 심쿵했다. 바둑은 모르지만, 실력에 비례에 인성도 함께 오르는 드문 스포츠가 아닌가 생각했다. 저 깨끗함, 저 안간힘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자기 일을 다 했다. 남은 대국도 몸관리하며 잘 치러냈음 좋겠다. 저 태도까지는 인공지능이 가져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6. 3. 5.

언덕길


한 친구를 보았다.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등지는 방향으로 내려 걸었다. 거리가 좁혀오자, 아뿔사, 짐칸에 또래의 여학생이 걸터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대단했다. 혼자 오르는 것도 난 힘들었을거다. 좀 벌겋긴 하나 큰 힘겨움이 배진 않은 얼굴.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모아진 여학생의 다리. 그녀는 마이쮸 같은 것을 까 남자의 입에 가져갔다. 덥썩 낚아 물고 그는 페달질에 더욱 열을 가했다. 예뻤다. 한 조각 꽃망울을 본 듯 했다. 마음에 오래 새겨두고 싶은 장면이었다. 

2016. 3. 4.

불확실한 화해


  예술로 타인의 삶에 근접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멋진 일이다. 나의 세계는 협소하다. 스스로에 머물거나 독단에 잠겼을 일들을, 그들은 멈춰세우고 돌아보게 한다. 알 수 없었거나 보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그들은 기어이 보게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인간의 삶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야.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간접 경험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러니까 세 배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10년 전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적잖은 나의 구성이 좋은 예술에서 왔음을 수긍할밖에 없다.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정말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요즘 나는 영화를 볼수록, 책을 읽을수록,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볼수록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 잡힌다.


  나는 중산층에서 나고 자랐다. 적당한 문화 자본과 교육 자본, 사회적 자본을 취하며 살았다. 내 노력도 없진 않았지만 주어진 것이 훨씬 많았다. 현실에선 그만큼만 생각하고 그만큼만 보는 일이 많다. 주어진 세계의 힘은 과연 세다.

지아장커를, 김기덕을, 어어부 프로젝트를, 프란시스코 고야 등을 보고 듣는 일로 부식됨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통해 폭넓은 이해와 감수성을 기여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오만. 그 나르시시즘.

정말 나는 그들을 이해했을까?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일까? 부끄러움이 엄습해온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그조차도 물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예술들은 되려 나를 기만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이해라니. 내 사람들도, 내 자신도 이해 못하는 내가 하물며.

씨네필과, 다독가와, 미술관 순례객은 내가 정말 되고 싶지 않아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타인의 인생을 수집하듯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성찰의 도구라 둘러 세우긴 했으되 냉정하게 그건 소비였다. 타인의 삶에 대한 소비.

  이창동의 [시]는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다운 영화다. 그러나 딱 한 장면, 양미자가 죽은 소녀에게 추모시를 바치는 장면은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양미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녀가 죽었던 강가로 카메라가 슬금슬금 걷는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했을 풍경들이 스친다. 그리고 갑자기, 양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어 들린다. 잘못 들은 것일까?

가해 학부형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의 말, “시를 쓰세요? 근데 시는 왜 쓰세요?” 이창동은 이에 대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양미자는 무력한 시편으로 그렇게 죽은 소녀와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혹한 세계에 무력한 칼날이나마 들이 겨누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너무 감동해서 자리를 오래 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그렇게 쉽게 합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확신이 없다.

2016. 3. 3.

한국이 싫어서


  2년 반여의 제주 생활을 마감했다. 좀 된 이야기다. 그간 느낀 단 한가지는,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도시 또한 무척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일층 지하 일층] 단편집에 김중혁 작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계속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도시가 주는 어떤 소란스러움, 모종의 흥분을 나는 떨쳐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깨우침은 귀중했다. 지금 나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에 살고 있다. 서울을 떠나와 이곳에 정착한지도 5년이 넘어간다. 나는 우리 동네를 무척 사랑한다. 틈날 때면 동네 구석구석을 산책하고 다큐를 위한 클립을 모은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이상적으로 도시와 자연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필요하면 큰 서점에 가 책을 보고, 답답하면 조금 나가 텐트를 친다. 그러나 그 균형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다. 이 역시 좀 된 이야기다. 브랜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대형 마트가 상상 못할 크기로 땅을 집어 삼키고 있다. 각종 편의시설들, 문화시설들, 체육시설들이 그야말로 날이 멀다하고 세워지고 있다. 그래서 괴롭기만 하냐고? 아니. 나도 얼마간 속물이다. 영화관이 코앞에 닿아 좋고 대형마트가 자정 영업을 해서 편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좋기만 하냐면 물론 그건 역시 아니다. 맘 비우고 걸을 숲과 아름드리 익어가는 노란 들녘이 누군가들에게 꾸준히 팔아 넘겨지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제 살던 자리서 원치 않는 밀려남을 당하고 있다. 그걸 지켜보는 건 유쾌한 일이 못 된다. 그렇게 늘 양가의 마음을 품고 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카메라를 드는 일이다. 무엇이 부서지고 그 위에 무엇이 세워지는지 지켜 보는 일. 그것으로 나는 일말의 속죄를 대신하려 한다. 비겁한 일이다.

낙담한 청년들이 이민 행렬을 줄잇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새꿈을 품고 혹은 또다른 불안을 안고 떠나는 것이다. 응원을 보낸다. 여행을 다니며, 저마다의 사연과 꿈으로 한국을 떠나 온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도 내 자신이 그 중 하나이기도 했거니와 제주 이민족(이라 스스로 칭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들과 복닥이며 한철을 살았다.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할 것이다. 어디에도 낙원은 없었으며 어디라고 지옥이란 법도 없었다. 사는 곳이 어디건 자신의 내면에 먼저 평화가 깃들어야 함을 나는 뒤늦게 배웠다. 부디 그러기를 소망한다. 다만 기사의 한 대목에서는 참 가슴이 저릿했다. 한 청년의 말이다. “한국 밖으로 나가서도 차별받을 거란 걸 알아요. 그치만 이곳에서 겪는 멸시보단 그게 그나마 나을 거 같아요.” 아찔했다. 어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