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18.

비워진 자리에 채워지는 것


지아장커 [산하고인] 중에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이다. 확실히 그랬다. 사랑에 앞서 방법을 고민했을 때, 줄곧 나는 실패했다.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산하고인]을 저평가하는 이들도 결국 이 맥락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식을 먼저 앞세웠다는 것.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 뭐하나. 슬픔을 보여주려는 액자가 먼저 둘러쳐 있는데. 그랬다. 거기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플롯의 측면, 화면 비의 측면. 삶이 어떻게 선형적인 서사로 그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고, 삶이 어떻게 표준화면에서 시네마스코프로 (균등히) 번져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의한다. 확실히 이 영화는 지아장커의 전작들과 다르다. 나는 특히 99년을 다룬 에피소드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아직 돈의 폭력에 물들기 전 저들의 사랑, 우정은 지나치게 매끈한 드라마로 전개된다. 그랬을 뿐 아니라, 전에 볼 수 없던 얕은 심도의 화면과 팬, 트래킹 등 촬영술의 유려함이 전시된다.(이제껏처럼 유릭와이가 찍었다.) 99년, 2014년, 2025년 세 시대를 통과할 때마다 화면 비가 달라진다. 불평들은 충분히 그럴만하다. 나도 낯설었고, 왜 이랬을까 싶었다.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영화의 중반.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던 주인공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이 점이 이상했다. 탄광 노동자 리앙즈.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성공한 친구에게 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탄광 노동자다. 그의 삶은 위태롭다. 탄광은 언제 문을 닫을 지 모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사이 그는 큰 폐병을 얻었다. 수술을 위해 아내, 갓난 아이와 큰 도시로 올라온다. 그는 누워 쉬고, 아내가 돈을 빌리러 나선다. 그녀가 찾은 사람은 리앙즈의 옛 사랑 타오다. 타오는 진솅과의 결혼 이후 제법 큰 사업체를 갖게 됐다. 사연을 전해 듣고 리앙즈를 방문한다. 진솅과의 이혼, 아들 양육권까지 내준 소식을 전한 뒤 그녀는 품에서 돈 뭉치를 꺼낸다. 그는 그 돈을 거절할 수 없다. 살아야 한다. 굴욕감이 들지만 사치를 부릴 순 없다. 고맙다고 넙죽 받는다. 이 장면은 슬프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리앙즈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일이다. 줄곧 영화가 그의 감정선을 따르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타오와 그녀의 아들 달러의 이야기다. 달러는 아버지를 따라 새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호주로 유학 보내졌다. 타오는 달러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부른다.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리앙즈. 그는 왜 그렇게 퇴장해야 했을까. 이 질문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아장커의 전작들은 모두,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나가는가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릴 적 친구를 잃고도, 또한 건강과 앞날까지 잃고도) 리앙즈가 어떤 삶을 이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지아장커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돈으로 수술은 잘 받았는지, 그랬다면 다시 탄광으로 복귀했는지, 아니라면 무슨 일을 얻게 되었을지, 아내, 아이와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이야기가 계속돼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과감히 그를 떠나 보낸다. 그 결단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려온 세계를 닫은 대신 새롭게 열어 젖힌 세계는 무엇일까. 비워내고 그 자리에 대신 채운 것.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시, 타오와 달러. 모자는 함께 장례를 치른다. 달러는 생모 앞에서 자꾸 빌려 온 아이처럼 군다. 그 모습이 타오의 가슴을 후벼 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달러는 이제껏 생모인 타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사흘의 시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구축하기에 너무 짧다. 그 점을 타오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덤덤히 말한다. “달러, 넌 아빠랑 사는 게 나아. 아빠랑 살면 국제학교도 가고 유학도 갈 수 있어.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어.” 이 장면도 슬프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엄마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배경은 2025년 호주가 된다. 달러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 아버지 진솅은 고집불통이 되어버렸고, 새엄마는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온갖 풍요에 둘러싸여 있지만 달러는 공허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다. “어머니 이름은 뭐니?” “전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없다니 그럼 넌 뭐니?” “저는 시험관 아기에요.” “그래도 엄마는 있지.” “그럼 선생님 이름은 뭐에요?” “(사실) 나도 잊었어!” 달러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앞길을 알 수 없지만 대학은 관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에 진솅은 격노한다. 급기야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달러는 집을 뛰쳐나와 선생님과 여행을 떠난다. 가장 낭만적인 순간에, 그는 그녀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 둘은 잠자리를 한다. 달러에게 선생님은 여자이자 엄마다. 오롯이 홀로 서기 위해서는, 친밀한 타인의 도움이 얼마간 필요한 법이다. 선생님은 그러나 둘의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 두렵다.(달러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 아이와 더 깊은 사랑은 안 돼. 그녀는 달러를 친모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달러의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결정에 달러는 실망과 두려움을 느낀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지아장커의 관심이 한결 같다는 데 안도했다. 그는 리앙즈의 남은 이야기를 멈춘 자리에 달러의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 리앙즈는 ‘이미 잃어 버린 자’고, 달러는 ‘앞으로 잃어갈 자’이다. 그간의 세계가 ‘상실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풍요의 자리에 무엇이 비어가는가’를 다룬다. 결국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의 연민은 계속된다. 물론 이 영화는 도식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단점들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는 서정이 있다. 그 서정의 순수성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 서정은 귀한 것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온 지난 영화들과 이 영화와의 관계망 속에서 찾아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모 평론가는 “영화는 개인적 야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며 단죄하듯 이 영화를 폄훼했는데,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가 지키는 야심은 무엇이며 그 삶의 순수성은 어느 수준으로 견지되어 왔나. 그 궤적을 묻고 싶다.) 형식이 앞섰다는 애초의 지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특히 화면 비의 문제. 나는 화면비가 확대돼 나가는 것이, 그의 치기어린 형식주의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감정들과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이 양 옆으로 길어질수록 인물 간의 정서도 이격되어간다고 느꼈다.(허우 샤오시엔이 표준 화면으로 [자객 섭은낭]을 그리지만, 칠현금 장면에서만 비스타 비젼으로 확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만의 까닭’에서 지아장커는 화면 비를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타오, 리앙즈, 진솅이 한 데 모여 집단군무를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때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텅 빈 자리를 그저 응시한다. 진솅은 여전히 놈팽이 짓을 할 것이고, 선생님은 안전한 생활로 복귀할 것이다. 달러는 티켓을 받아들고 고민할 것이고, 타오는 기다림의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리앙즈는, 모르겠다. 살아있다면, 그의 가족들과 행복했으면 좋겠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