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0.

기생충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간 후, 장남 기우가 아버지 기택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는 내레이션 장면이 참 좋았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성공하겠다. (악착같이) 돈을 벌고, 어떻게든 이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어코 살아남고야 말겠다. 부자가 되겠다. 그리하여 그 집을 얻고, 당신과 만나겠다.' 우리 시대 청년들은, 80년대처럼 짱돌을 들 수도 없고, 공통의 목적의식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연대하기도 힘들다. 자칫 미끄러져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을, 상당한 불안을, 거의 태어남과 동시에 학습받고 체화하면서 성장해왔으니까. 혹자는 너희들 패기가 왜 없느냐, 이제까지 세상을 바꾼 건 언제나 젊은이들이었는데, 너희들은 왜 개인의 분노로만 수렴되거나, 아니면 그것도 못해 자학에 빠지고, 자기연민에 빠지고, 신경증이나 걸리고 앉았느냐, 라고 힐난한다. 알기는 알까.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아니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이들이 의탁케되는 길은 끝내 제도권 경쟁이라는 사실을.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공채, 수많은 시험들 시험들 시험들.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제도권 밖의 다른 방도를 통과해 '한탕'을 노리는 수밖에. 비트코인 광풍. 집단 최면의 풍경들. 하여간, 어찌되었든,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하여, 생 전체를 송두리째 내던져야 하는 일들이 이들에게는 전혀 심심치 않고, 전혀 과장인 일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구정물에 침수될 뿐인 집. 그런 삶. 그 '엄정한 냉혹'의 세상을 견뎌야하는 청년의 얼굴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최우식의 얼굴로 닫힌다. 그것이 너무나 좋았다. 좋았고, 서글펐다.





2019. 5. 20.

에이프릴의 딸



시사회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투는 하나같았다. 허탈한 웃음.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아내와 나도 그랬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저마다 말들을 이어갔다. 엘리베이터를 두 차례 그냥 흘려보냈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을 무게로 아내가 말했다. 저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나도 알 수 없었기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며칠이 흘렀다. 이해해줄 필요가 있을까. 이제사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저 욕망과 광기가 발현되고 추동되어왔는지, 구태여 헤집을 필요가 있을까. 이해를 구하는 일은 판정을 내리기 위함일 터다. 수용이 가능한지 불가한지 여부를 어서 선 그어내고, 정리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속히 내 안에 안정이 마련되므로. 그러나 그 일이 내게는 필요치 않은 일임을, 불가한 일임을 알아챘다. 저 삶을 그저 응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저런 광기와 욕망이란 게 있다.’ 정도로. 그런 정도로의 응시. 그 광기와 욕망은, 정도와 내용을 달리한 채 내 안에도 도사리는 것일지 모를 것이었다.





2019.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