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4.

불확실한 화해


  예술로 타인의 삶에 근접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멋진 일이다. 나의 세계는 협소하다. 스스로에 머물거나 독단에 잠겼을 일들을, 그들은 멈춰세우고 돌아보게 한다. 알 수 없었거나 보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그들은 기어이 보게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인간의 삶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야.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간접 경험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러니까 세 배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10년 전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적잖은 나의 구성이 좋은 예술에서 왔음을 수긍할밖에 없다.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정말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요즘 나는 영화를 볼수록, 책을 읽을수록,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볼수록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 잡힌다.


  나는 중산층에서 나고 자랐다. 적당한 문화 자본과 교육 자본, 사회적 자본을 취하며 살았다. 내 노력도 없진 않았지만 주어진 것이 훨씬 많았다. 현실에선 그만큼만 생각하고 그만큼만 보는 일이 많다. 주어진 세계의 힘은 과연 세다.

지아장커를, 김기덕을, 어어부 프로젝트를, 프란시스코 고야 등을 보고 듣는 일로 부식됨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통해 폭넓은 이해와 감수성을 기여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오만. 그 나르시시즘.

정말 나는 그들을 이해했을까?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일까? 부끄러움이 엄습해온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그조차도 물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예술들은 되려 나를 기만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이해라니. 내 사람들도, 내 자신도 이해 못하는 내가 하물며.

씨네필과, 다독가와, 미술관 순례객은 내가 정말 되고 싶지 않아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타인의 인생을 수집하듯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성찰의 도구라 둘러 세우긴 했으되 냉정하게 그건 소비였다. 타인의 삶에 대한 소비.

  이창동의 [시]는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다운 영화다. 그러나 딱 한 장면, 양미자가 죽은 소녀에게 추모시를 바치는 장면은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양미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녀가 죽었던 강가로 카메라가 슬금슬금 걷는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했을 풍경들이 스친다. 그리고 갑자기, 양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어 들린다. 잘못 들은 것일까?

가해 학부형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의 말, “시를 쓰세요? 근데 시는 왜 쓰세요?” 이창동은 이에 대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양미자는 무력한 시편으로 그렇게 죽은 소녀와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혹한 세계에 무력한 칼날이나마 들이 겨누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너무 감동해서 자리를 오래 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그렇게 쉽게 합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확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