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

필사적으로 맞잡기



말년병장 챕흘린의 일일 One Fine Day | 이유만 | 2008 | 한국 | DV 

 서울아트시네마서 ‘찰리 채플린 회고전’이 열린다. 기념하는 뜻에서 짤막한 영상 하나를 올린다. 7년 전 봄, 군에서 친구들과 만든 10분짜리 UCC다. 채플린에 대한 나름의 존경과 헌사를 담아 만들었다. 허나 그 수준이 너무 조악하고 서투르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재생을 피하실 것을 권해 드린다.) 당시 8사단 가을 축제 때 상영한 뒤 홈페이지 게시용으로 함께 제출한 영화 연출의 변 전문을 첨부했다. 병장 4호봉쯤 되었기에 저런 뻔뻔하고 개념없는 투의 글을 겁없이 낼 수 있었다.(결국 크게 욕먹고 대거 수정된 버전으로 다시 제출했다.) 이번에도 채플린을 다시 볼 것이다. 우리 곁 가까이를 맴돌았던 방랑의 천사. 그는 늘 함께 울고 웃고 사랑했다. 그 자신의 비련한 운명과, 세상의 모든 힘없고 가련한 것들을. 그 진실함이 중요했던 사람. [키드]의 저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그는 끝내 아이의 손을 놓지 못했다. 환상을 빌어서라도 그 맞잡음을 지키려 애썼다. 자신 삶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그 자리를 벗어난 적은 (내가 알기로)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늘 필사적이었다.(2015)


[말년병장 챕흘린의 일일] 연출의 변
작성자 : 병장 이유만
작성일 : 2008년 9월 26일 금요일
수신자 : 73대대 정보과장 중위 오상철

정보보안 주제로 UCC하나 찍지 않겠냐는 제안에 군에서 이런 기회 어디이며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차, 덥썩 받아들여 찍은 작품. 그게 5월 중순이니 요거 한 4개월쯤 된 거다.
군에서 보안이라면야 ‘니들 이런거 이런거 위반하면 정말 ×돼'라는 내용으로밖에 채워질 수 없는 노릇. 뻔한 내용이라면 형식이라도 특이해보자는 내 제안이었지만 애들은 하나같이 심드렁한 얼굴에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흑백에 무성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러려면 뭔가 명분이 필요했다. 장교들과 부사관도 설득해야 했지만 우리 스스로가 먼저 납득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얘들아, 난 캠코더루 칼라영화 자신없다. 그리구 여긴 군대. 온통 초록빛 영화는 좀 끔찍하지 않겠니? 무성영화가 대사부담도 없고 좋을거야. 제대로 우리의 똘기를 보여주자. 응?”
“정훈장교님. 73대대를 대표해 출품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수상작들을 보니 너무 억지스럽게 쥐어짜듯한 유머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팀은 좀 다르게 웃겨보고 싶습니다. 웃기면서도 독특하면서도 교훈적인 그런 멋진 작품을 들고 오겠습니다.”
멋진 작품은 개뿔. 그럴 능력이 있기나 했나. 그럴 의도가 있기나 했나. 이건 애초부터 작정된 엉터리 영화였다. 군의 해설픈 계몽주의와 꼰대스런 엄숙주의를 향한 일종의 침뱉기쯤 될까. 아니,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진실하다. 우린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놀자는 생각외엔. 우리의 우정을 이렇게 기록해두잔 뜻외엔. (채플린을 향한 노골적 헌사인)주인공을 보고 이건 뭐 웃기지도 않고 좀 어이없잖아 싶으시다면, 그거 맞게 보신거다. 얼굴에 콧수염하나 그려주고 ‘챕흘린'이라고 이름지어주면 대충 알아먹겠거니 했던거다. (채플린의 저 위대한 이름에 흠을 내어 죄송할 따름이다.) 그저 방랑하는 이미지, 웃기면서도 슬픈 얼굴을 차용한 외에는 채플린에 대한 어떤 심오한 대입도 없었다. 정말 나이브했다.
이왕에 이럴거였다면 어째서 해롤드로이드나 버스터키튼, 채플린을 제대로 흉내내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만큼의 액션력도, 표정연기도, 아이디어도, 휴머니즘도, 연출력도, 돈도 없으니 그런 꿈일랑 접어치우고 그냥 노는 수밖엔 없었다. 그래도 무성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은 조금이나마 담고 싶었다.
처음 아이디어 기획 회의에서 편집 마무리까지 딱 일주일밖에 안걸렸다. 촬영은 하필 진지공사주간이라 일과 중엔 안됐고, 17시부터 해지기 전까지 딱 세시간씩 3일간. 편집은 토요일 하루 꼴딱 밤새워서.(그러고도 이튿날 초번초 경계근무나간 오광석 상병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그러니까 일주일 짜리 B무비인셈이다. 제작자-8사단 포병연대-가 원하는 계몽적 내용으로 납품하듯이 초날림으로 찍었으면서, 정교한 각본이나 콘티 없이 현장에 뛰어 들었고, 맘에 안들어도 시간없고 배고프고 귀찮으니까 그냥 OK내고, 편집 땐 앞에 썼던거 잘라다 뒤에 또 쓰고 뭐 등등. B무비 정신만큼은 (의도치는 않았지만) 제대로 구현해낸 셈이다.
엉터리 영화이긴 하지만 찍는 우리끼린 재밌었다. 그걸로 다라고 본다. 포상도 받았고. 그냥 웃자고 만든거지 뭐. 이정도면 B무비가 제 역할은 다 한셈 아니겠는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