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2.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


1. 전 여자친구를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그냥 지나치기 모한 상황이었다. 그이도 나도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일로 함께 시간을 제법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카페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근황을 묻고 대답했다. 차를 다마시고 일어나려는데, 불쑥 그이가 말했다. “난 오빠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그이는 내 정지된 얼굴에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또렷이 말했다. “난 오빠가 정말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2. 좀 다르지만 비슷한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익명의 분으로부터, 전혀 예상치못한 순간에. 내 메일주소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분은 철저히 장막 뒤에 숨어 계셨다. 이 메일을 위해 급히 만든 계정인 듯 했다. 텀블러를 타고 오신 건지 현실 속 내 아는 분인지 혹은 전혀 다른 세계의 분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다만 문체로 보아 남성분은 아닌 듯 싶은데 그 역시 확실치는 않았다. 덕분에 기분이 유쾌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괘념할만한 성질도 아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3. 그분 말씀의 요지는 (워낙 횡설수설이라 겨우 파악했는데) 그냥 내가 싫다는 것이었다. 내 사진도, 글도, 영상도.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4. 피드백은 감사한 일이다. 귀담아 듣겠다. 다만 당신도 태도가 좀 정중했으면 좋겠다. 성인이라면. 비판을 할 땐 논리와 예의를 갖춰야 한다. 당신 같은 식이라면 응석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덧붙여 꼭 알아주셨으면 하는 점이 있다. 여기는 공개된 공간이지만 내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글은 나를 위해 쓰여졌다. 다만 익명의 장에도 열어둠으로써 스스로 다짐을 강화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비평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일개 생활인이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읽어봐도 그 메일은 무례했다. 당신도 알리라 믿는다.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다시 메일 한 번 주시길 바란다. 언제든 당신과 대화하고 싶고 또 그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