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3.

코로나19, 강박x강박(강박²)



1. 3년째 다니는 미용실인데 오늘 같은 한산함은 처음이었다. 두 명의 종업원과 한 명의 디자이너 겸 매니저 그리고 나의 머리를 만져주시는 원장님 사이에서, 침묵의 30여분을 보냈다. 코로나의 여파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이는 도구 트레이를 정리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스마트폰을 까딱이고 있었다. 모두 적당히 불안하고 적당히 무료한 얼굴들이었다. 원장님만이 특유의 힘 있는 가위질을 이어갔다. 가위날 부딪히는 쇳소리가 찹찹찹 유난히 크게 들렸고, 노르스름 익은 오후 두시 반의 햇살은 통유리를 통과하며 더 깊고 넓게 퍼져 실내를 적시고 있었다. 

2.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엘 갔다. 대한문 앞에도 사람이 없었고, 인근 상가엔 숫제 영업을 쉬는 점포들이 몇 군데 보였다. 손에는 마끼아또 한 잔이 들려 있었다. 우유 냄새가 너무 진했고, 결국 나는 다 마시지 못한 채로 그것을 휴지통에 던졌다.

3. [강박x강박(강박²)] 전을 보았다. 뉴 미네랄 콜렉티브, 우정수, 오메르 파스트, 차재민, 정연두, 김용관, 이재이, 김인배, 에밀리아 스카눌리터의 순으로 그들의 작업을 둘러보았다.

4. 가장 오래 발길을 머문 곳은 오메르 파스트의 영상 작업 [5,000 피트가 최적이다]에서 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이 작가가 미디어를 다루는 방식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여기에도 여느 미디어아트처럼 인터뷰가 있고, 작가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랐(다고 느꼈)던 것은, 이것이 철저하게 '극영화'의 논리와 문법을 따르고 있었던 부분이다.

5. 그러니까 사건이 있고, 인물이 있었다. 인물의 감정이 있었고, 그 감정을 (우리로 하여금) 살피도록 돕는 부수의 캐릭터들이 있었다. 쇼트를 잘게 나누었고(인터뷰이가 중간중간 휴식차 복도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 장면은 정면-리버스-정면-리버스 쇼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운드의 활용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복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필름라이크'한 화면의 톤으로 찍혔다. 아마도 레드원 같은 기종으로 디지털 촬영을 하였을 테지만, 몇몇 장면은 필름으로 촬영하였다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큼 어떤 특유의 물성과 질감이 보유되고 있었다.

6. 그래서 이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나 스스로에게 들었지만, (허무하게도) 이렇다 할 뾰족한 대답을 찾아내진 못했다.   

7. 다만 하나의 얇은 발견이라면, 근래의 미디어아트들에서 내가 줄곧 느꼈던 피로감을 이 작업에서는 거의 느낄 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연히 들어간 전시실에서 나는 30분짜리 극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기분이 들었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선명히 수용할 수 있었으며, 한동안은 그 질문을 받아들고 나름의 생각을 하느라 다른 작품, 작업들에는 건성의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8. 미디어아트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디어아트 고유의 논리, 그러니까 (극적 구성을 뒤로 두고) 감각과 감정의 원체험으로 단도직입해 들어가는 그 방식이야말로 곧 순수 미술적이며 그것이 미디어아트의 본령과 같다는 생각에는 그다지 흔들림이 없다.

9. 내 안에는 줄곧 (나름의 논리와 근거로) 미디어아트와 시네마 사이의 어떤 구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만 이제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이 작업에 발길을 두는 동안 무겁게 찾아들었다. 

10. 돌담길을 따라 시청역으로 되돌아 나왔다. 담벽에 묻은 햇살을 2g폰카로 찍었다. 요즘 카메라를 따로 들고 다니지 않고 2g폰카로 찍어두는 일이 늘었는데, 생각보다 이 느낌이 괜찮기 때문이다. 선예도가 떨어지고, 빛도 살짝 바랜듯한 화상이, 어쩐지 똑딱이 필름의 느낌을 닮은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