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7.

사람이 보이는 글


  도저한 구조비평, 형식비평을 갈수록 못읽겠다. 기력이 달려서일까. 한때는 정성일 씨의 (수십 페이지짜리) 쇼트 단위 분석비평도 좋아했고(헉헉 대며, 뭥미하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같은 책들도 (괜히 폼잡는답시고) 열심히 품에 끼고 다녔더랬는데. 물론 비평은 여전히 다양해야 하고, 그중 어떤 건 정말 끝간데 없이 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의한 발견을 위해라면 난해함이 아니라 난해함 할아버지라도 기꺼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갈수록 내 영역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에너지의 문제인지, 취향의 문제인지 잘은 모르겠다. 정말 궁금해서 찾게 되는 일 아니고는 거리를 두게 된다. 대신 좋은 인상비평이나 이름모를 블로거의 사적인 글 따위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글쓴이와 작품 간의 관계맺기가 오롯한 흔적으로 남은 글. 그런 글은 거의 웬만하면 환영이다. 서투른 문장이어도, 통찰이 깊지 못해도, 다소 허세가 있어도 사람이 보이는 글이라면 다만 좋다. 김영진 씨는 아마도 영화 인상비평계의 가장 뛰어난 국내 필자일 것이다. 그의 오랜 팬이었다. 이번 글 역시 좋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이라 무단 전재, 배포한다.)

장면의 의미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_ 허우샤오셴 감독의 ‘섭은낭’ (한겨레 2월 3일자)
  한때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꽤 많이 진행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요 몇년간 거의 하지 않았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만 하는 정도였다. 평론가로서 하는 극장에서의 작품해설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인정상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관계의 지인에게 들어온 청탁일 때만 한다. 이 일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더 심해진 경향이라고 느끼는데, 한국의 관객은 유독 영화에서의 의미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장면을 그렇게 찍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는 ‘그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감독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객석의 질문이 상당하다.
  허우샤오셴의 섭은낭은 영화의 서사와 장면의 구성에서 의미의 퍼즐을 찾는 관객에겐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 번 봐서는 또렷이 감지되는 줄거리가 없으며 감독이 그걸 부러 신경쓰지 않고 흐려놨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허우샤오셴 감독과 이창동 감독의 대담 자리에 사회자로 불려나간 건 순전히 두 감독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지방 출장을 갔다가 올라가는 길에 많이 후회했다. 별로 할 말도 없는 자리에 나가 또 쓸데없는 품을 팔겠구나 걱정했다. 무엇보다 필자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해 크게 묻고 싶은 말이 없었다. 섭은낭의 알맹이를 다 알아차렸다는 게 아니라 두 번 보고 난 후에도 언젠가 또 보고 싶은 영화일 뿐,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뭔가 묻고 싶은 건 없었다.
  행사 당일, 허우샤오셴, 이창동 감독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부터 사석에선 사소한 농담들이 오갔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별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 ‘불면증 환자를 위한 건강 영화’로 자신의 영화를 평하면서 주로 자신 주변의 일상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창동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화 미학을 운운하는 어떤 자리보다 공기는 농밀했고 그 두 분의 영화에서 느끼는 삶에 대한 질박한 통찰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처럼 그날 경험은 내 마음에 잔잔한 공감의 무늬를 남겼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관객들이 던진 질문의 수준은 높았고 진지했지만 역시 의미의 협량함에 경도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대체로 품는 의문에 대해 허우샤오셴은 풍부한 예시를 들어 답하곤 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에 갑자기 화면 크기가 변한 까닭에 대해 그는 등장인물이 켜고 있는 악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만화에선 자주 각 화면 크기가 바뀌는데 영화에선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허우샤오셴 감독과 이창동 감독은 필자를 포함한 청중들이 좁은 수도관 파이프 같은 질문을 던지면 측량할 수 없는 강물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이날 얘기의 핵심은 결국 영화가 주는 체험의 너비와 깊이에 관한 것이었다. 섭은낭에서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 창조된 아름다움, 우리의 실제 삶에서 겪기 힘든 아름다움을 초밀도로 경험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럴 때 필자는 보이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그게 또 훌륭한 영화의 조건일 것이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