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3.

당신의 불완전함을 내가 끌어안아줄게요


필립 가렐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중에서

  사랑은 충만해지는 감정이다. 보이지 않던 것은 흔적을 드러내며, 향은 짙어진다. 소리는 멀리 가닿고, 까끌한 것은 보드라워진다. 이 갑작스런, 세계의 완전해짐. 나도 함께 완전해질순 없을까. 같은 리듬이라면 다만 이곳은 천국이 되리라. 부질없는 꿈이 시작되는 건 그때부터다. 돌이킬수록 불완전한 자신뿐이다. 어울리지 않는 침대보, 바닥의 머리카락들, 피부의 잡티가 서글프다. 서글프고 불안하다. 사랑은 언제까지일까. 충만의 세계는 저만치에 있는데. 나는 리듬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인다.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일. 혹은 세계에 거짓으로 뛰어드는 일. 도망치지 않기로했다면, 거짓은 얼마간 불가피하다. 다만 이젠 타인과 자신 둘 다를 속여야 한다.

  사랑에 긴 시간 익숙해진 뒤라면 어떨까. 여기 한 부부가 있다. 마농과 피에르. 그들은 한 레지스탕스에 관한 다큐를 작업하는 중이다. 노인은 나긋하게 고통의 지난 날을 술회하고 부부는 그를 숨죽여 기록한다. 그러다 일이 벌어진다. 피에르에게 갑작스런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묘한 매력을 품었다. 피에르는 가정을 망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새 사랑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한편 마농 또한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중이다. 상대는 젊고 부드럽다. 그녀의 외도는 (하필) 엘리자베스에게 목격된다. 피에르에게 이 사실이 전해진다. 떳떳할 것 없는 처지면서도 그는 격분에 휩싸인다. 급기야 피에르와 마농은 결별하게 된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 단지 그것만으로는 충만해질 수 없음을, 늦든 빠르든 우리는 알게된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사랑에 익숙해진 뒤라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거짓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나른한 권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나름의 결단. 거짓의 양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돈을 감추기도 하고 말을 감추기도 한다. 육체와 마음의 비행을 감추기도 한다. 니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는 질문은 이때 아무런 힘이 없다.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공허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숙명인 것이고, 그것은 다만 자신 대신 타인을 돌보는 일에 더 애를 쓰기로 결심한 이들에게서 더 잘 발견될 뿐,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것이다.(‘인 더 섀도우 오브 패털리티'라는 제목도 좋았을 것 같다.)

  모든 사랑은 그러므로 크고 작은 거짓으로 구성된다. 거짓이 없다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건축의 주된 질료는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거짓, 불안, 상처와 같은 것이다. 상대에 책임을 다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건 사랑하는 이들의 당연한 책무다. 관계의 총체란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또한 작동하는 무엇이다. 원든 원치 않든 제 측량을 벗어나고마는 관계의 속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조금 더 자유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피에르와 마농은 레지스탕스의 장례식장에서 재회한다. 젊은 연인들과는 결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레지스탕스의 삶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레지스탕스이긴커녕 나치의 충직한 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피에르는 촬영분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며 낙담한다. 마농은 그러나 말한다. “다시 편집하면 돼. 가짜 레지스탕스에 대한 삶의 이야기로 만들자.”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둘은 놀랍게도 부둥켜 안고 있다. 나는 여기서 깊은 뭉클함을 느꼈다. 권태로 멀어졌던 두 사람.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두 남녀. 필연의 거짓. 불완전의 수긍.(지난 외도를 정당화하거나 낭만화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건 상징처럼 나른하게 묘사되었다.)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당신의 거짓을 인정할게요. 당신의 불완전함을 내가 받아들일게요.’

  가짜 레지스탕스는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꾸민 것일 것이다. 어마한 죄의 삶을 끌어 안아줄 이는 그의 곁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존재의 유지를 원했고 현실의 직시 대신 거짓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급기야 그를 사실로 믿어버렸다. 나치 피해자들은 통탄해마지 않을 일이겠지만, 한 개인의 실존이라는 문제에서는 얼마간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라도 살고 싶어했다. 우리도 각자의 기만으로 삶을 지탱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