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8.

신념의 선의와 그 실질 윤리




  한 선배와 통화를 했다. 오랜 시간 그를 알아왔고, 그가 천성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나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안다. 그 선배는 수년 째 한 국제구호단체에 기부를 해오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을 바탕하는 중요한 활동이다. 그는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곤 했다.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이 다섯이야.”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자식처럼 부른다.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직접 만날 것이란다. 그 아이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며, 작은 선물들을 감격에 젖은 듯 보여준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앞에서 나와 친구들은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늘 칭송하곤 했다.

  그러나 냉정히, 그건 그를 속이는 일이었다. 아동국제구호 웹페이지에 접속해본 일이 있는지. 그곳이 얼마나 ‘선의로 가득찬 폭력’을 전시하는가 목격한 일이 있는지. 첫 화면부터 마치 상품을 진열하듯,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 사는 곳, 장래희망 따위를 적어놓고, 아래엔 친절히도 후원하기 버튼을 달아 놓았다. 너무나도 경악스런 장면이다. 이젠 선의도 쇼핑을 한단 말인가? 저 아이들의 인격과 자존심은 도대체 생각된 바 있는걸까? 물론 모르는 바 아니다. 이리 각박한 시대임에도, 지구적 온정주의를 품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는 사람들의 선의를. 그를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의 노고를. 한때 관련 단체에 몸을 담았었고 그 일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있으므로, 또 후원자의 선의라는 게 그리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현지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라도 생계를 유지하길 원하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일이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불편하다. 지은 죄는 자기 삶으로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지 주일날 한 장의 헌금 봉투로 탕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빈곤 아동과 국제 소득 불균형, 생태 불균형 문제도 마찬가지다. 적선보다 우선 할 것은 지구적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우리 안의 탐욕과 폭력성에 대한 성찰이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 그들이 처음부터 시혜의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수천년간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구며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삶을 영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위엄을 빼앗은 건 힘있는 자들이었다. 지난 날엔 총칼과 포격이 그 일을 했다. 오늘날엔 전지구적인 천민자본주의가 빠르고 조용하게 그 일을 하고 있다. 거기에 어떻게 나 자신이 예외일 수 있을까. 이미 내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데. 그 반성과 실천의 바탕 위에(실천의 구체적인 방법을 다룬 책들은 시중에 많다.) 물질적, 활동적 나눔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방법만큼은 조심스럽고도 정교해야 할 것이다.

  주요 구호단체들과 그 참여자들은 아직도 이런 식의 적선이 매우 숭고한 행위라 믿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나눔 정신마저 희박한 세상을 살고 있으므로, 얼마간 인정 받을 행위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란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를 마치 어떤 명예라도 되는 양 자기 존재감과 공명심을 보조하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광경을 만들고 있는지 이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믿는 선의와 그 행위의 실질 윤리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015)


추신1. 경험해본 바 저런 돈은 대개 잘생기고 예쁘고 애교의 기술-편지, 선물 등-을 다양히 가진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그것이 현지에서 적잖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추신2. 선배에겐 아직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가 깊이 이 일에 의미를 두는데다 나 자신도 말처럼 옳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