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30.

사적 리스트의 은밀한 매력


  부산 국제 영화제가 20주년을 맞아 ‘아시아 영화100’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연다고 한다. 보도자료의 내용을 빌자면 이 기획은 ‘아시아영화의 가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보존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리스트는 5년마다 새롭게 업데이트 될’ 예정이고, 앞으로 ‘아시아영화의 미학과 역사 가이드는 물론 아시아의 숨겨진 걸작과 감독을 발굴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순위 선정을 위하여 ‘아시아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전세계 73명의 심사단이 구성’됐는데 여기엔 ‘저명한 각국의 영화평론가들과, 칸영화제 등 세계유수 영화제들의 집행위원장 및 프로그래머, ‘모흐센 마흐말바프’, ‘봉준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등 수준 높은 국내외 아시아영화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그 권위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영화제 측은 기대하고 있다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리스트들-이를 테면 까이에 뒤 시네마, 키네마 준보, 포지티프, AFI 선정 올해의 영화, 싸이트 앤 사운드 선정 100대 영화 등-이 올라오면 우선은 챙겨보는 편이다. 세계 영화의 동향도 나름 살필 수 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영화들과 접할 기회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유용한 DB 지도인 셈이다. 그 지형도의 한 축을 새롭게 만들어 차곡이 구축해 나가겠다는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선언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세계 최고의 아시아 영화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특화된 또 하나의 유용한 DB를 만들어 나간다면 영화 팬으로서도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기사를 읽고 나니 불현듯 과거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한 때는 저런 리스트들이 올라오면 거의 암송하듯 꿰고 다녔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선정 몇 년도 최고의 감독은?” 하면 가령 척하고 대답이 나오는 식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걸그룹(AOA입니다) 멤버 이름도 아직 못 외고 있는 요즘인데 말이다. 전만큼 저런 리스트에 주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발표가 올라오면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훑고 넘어가는 정도가 됐다. 내 영화적 안목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까닭에서일까? 이제 그런 오만을 떨어도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걸까? 아닐 것이다. 여전히 나는 좋은 영화들과 그렇지 못한 영화들, 좋은 영화와 더 좋은 영화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명확한 기준과 원칙 하에 판결 내리듯 올해의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신속히 가려내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럴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다. 여러 번 봐야 하고 여러 번 곱씹어야 한다. 그렇게해도 다섯 편 남짓의 ‘사적인 리스트’를 겨우 뽑아 올릴 수 있을까 말까다.

   그렇다. ‘사적인 리스트’. 저런 일종의 공식화되고 선언화된 리스트들보다 더 관심을 당기는 건 아주 사적인 리스트, 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를테면 웨스 앤더슨 감독이 좋아하는 10편의 영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인생을 바꾼 몇 편의 영화. 영화인이 아니어도 좋다. 이름모를 블로거의 사적인 글, 리스트 또한 못지않게 흥미롭다. 어떤 까닭일까. 앞선 공식화된 리스트들은, (스스로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떤 힘을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영화광이 되고 싶다고? 그럼 우선 이 무시무시한 리스트들부터 읽고 오렴!) 저런 리스트를 반복해 접하다보면 소위 ‘영화 전문가’라는 분들의 선호 패턴이라는 것이 어떤 윤곽으로 가늠되는데, (편견일 수 있으나) 그 패턴은 대개 ‘시네마틱함’ 그 자체에 경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 ‘사적인 리스트’는 권위의 무게보단 그이의 취향과 경험과 세계관이 더 부각돼 드러난다. [타이타닉]을 아끼는 사람에겐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업 다큐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또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 앞에,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민케인], [동경이야기], [게임의 규칙]이 최고의 영화 상위를 굳건히 지키는 저 리스트들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가.  

  지금 나는 비평가, 영화 전문가의 역할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의 죽음’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다. 일반 대중보다 (아무래도) 더 절제되고 냉정한 기준과 안목으로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이들은 아무리 ‘누구나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 하는 오늘날이라 하더라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다.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들-문학, 연극, 회화, 음악, 사진 등-에 비해 그 우월함을 주장할만한 단 하나의 근거도 없는 예술이다.(영화는 종합예술이란 주장이 있지만, 비빔밥이 냉면보다 우월하다는 내적 근거가 없듯 이 경우도 그렇다.) 오히려 영화는 가장 역사가 짧은 후발 예술로서, 그 문화적, 지적, 경험적 자산의 축적이 가장 빈약하다. 게다가 그것은 일정한 시대상황적 바탕-전세계적인 시민사회의 등장과 산업혁명 이래 기술문화와 자본주의의 성장-이 조건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았을 예술이기도 하다.(다른 모든 예술은 고대 이전부터 존재했다.) 결국 어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맞먹을만한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 존재증명을 하는 일뿐이다. 아무 영화나 그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좋은 영화’가 그렇게 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비평가의 역할은 지대하다. 수없이 쏟아지는 영화의 홍수 속에 남들보다 먼저 보고, 깊이 보고, 다시 보고, 그럼으로써 마침내 어떤 영화들이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만한 물건인지 분별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종 불편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평이 외부로부터 이런저런 이론과 담론을 끌어와 스스로를 되려 영화와 유리시키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 정점은 90년대의 잡지 [키노]였고,(그 잡지는 두 페이지로 충분히 전달되고 남을 내용을 스무 페이지로 늘려 담는 일에 각별한 재주가 있었다.) 이후 탄생한 매체들도 지금까지 저 영향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그만큼 [키노] 및 오남용된 포스트 모던철학의 힘이 대단했다는 방증도 된다.) 도저한 공부를 선행하지 않았다면 아예 이 영광스런 영화들의 명단에 접근할 생각도 말라는 듯, 그렇게 고압적이고 허세투성이인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직도 그 시절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론가들이 활약하고 있고, 업계와 학계의 선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이것이 쌍방향 소통시대의 도래와 권위주의 파괴 흐름과 맞물리면서 ‘비평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몰고 오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이며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편집의 애티튜드로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따라서 보는 이가 그 자신의 삶의 감각에 대입해 영화를 사적으로 바라보려는 그 시도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기엔 어떤 현학적 이론이나 비평적 수사도 의무가 아닐 것이다. 어떤 영화가 그 영화를 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가를 들여 볼 수 있는 글이 읽고 싶다. 그런 글과 리스트가 훨씬 값지다고 생각한다. 비평 분야 중에서도 인상비평을 좋아하는 이유이며, 또한 이름 모를 어떤 블로거의 일기 같은 영화 글을 더 선호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