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31.

존내 양아치


  학창시절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그건 누구보다 10세 이후의 내 모든 생애주기를 지켜 봐온 M군이 잘 안다. 그는 지금도 나를 그렇게 부른다. ‘쓰레기’ 내지 ‘존내 양아치’. 내가 어쩌다 ‘존내 양아치’가 되었는지 그 원인을 구태여 추적 한다면 몇가지 쓸만한 사연을 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라고 해서 그 야비하고 야만적이었던 내 지난 날들을 충분히 설명해주진 못한다. 우리 집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고, 나는 그 전까지의 삶에 어떤 강한 트라우마도 없었다. 그 시절 무엇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는지 해석할 필요를 못 느낀다. 별의미가 없을테니까. 차라리 감기처럼 찾아왔다고 해야할까. 그저 인정하고 살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존내 양아치'였다는 사실에 대해. 왜 아직까지 내가 그 시절을 지워낼 수 없는지에 대해.

  나는 소위 일진회 멤버였다. 젤로 잔뜩 쳐바른 기생 오라비 머리를 하고(그땐 왁스가 없었다), 교복 바지는 종아리 6.5인치로 바짝 줄인 채, 수돗가에 걸터 앉아 하교하는 아이들을 괜스레 꼬나 보는 일이 내 주 일과였다. 혓바닥엔 페인트 사탕이 물려 있는 일이 많았다. 학생부 지도 교사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을만큼 일진회와 그들 사이에는 모종의 알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아이들은 잘못도 없이 기죽어야 했고 우린 그걸 즐겼다. 눈을 제대로 깔지 않거나, 혹은 (내 기준에 조금이라도) 불경스런 모습을 비치는 아이들이라면 우선 눈도장을 찍어 두었다. 나중에 혹시나 그 아이가 자기 반에서 어떤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건 일진회 출동의 좋은 명분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게 정의고 우리의 일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이 학교의 중심이고, 이 학교의 질서는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식의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싸움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일진회에 가입될 수 있었느냐. 그건 간단했다. 싸움 잘 하는 애들 옆에만 있으면 되었다. 싸움 잘하는 능력은 일진회의 30% 멤버 정도만 갖추면 충분한 것이다. 나머지는 그들을 보조할 기싸움만 잘 해주면 된다. 눈빛, 발걸음, 행동가지 자체에서 풍기는 어떤 불량스러움. 그거면 된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교복을 심히 줄이고, 예쁜 여자애들을 옆에 끼고만 있으면 된다. 이따금 타학교 일진회끼리의 연합행사 때 얼굴 비춰 잔뜩 취해주고, 선배 일진들에게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만 잘하면 된다. 한마디로 야비한 꼬붕짓. 그게 그 시절 내 정체감의 전부였다. 이상하게도 성적이 잘 나왔지만(상위권) 그건 내 정체감의 중요한 바탕은 아니었다.(재수 없지만 사실이다.) 나는 그 시절 무엇보다 가학에 취해 있었다.

  이후에도 망나니 짓은 계속되었지만 중3 여름, 나로선 큰 전환이 된 사건을 만난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일진회 탈퇴를 선언했고 그에 상응하는 보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일진회 내부에선 일종의 계파 갈등 같은 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 싸움짱이 기싸움을 펼치고 있었는데, 나를 비롯한 꼬붕들은 어디에 줄을 설 것인지 곧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복잡한 정치게임이었고,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를 나갔다. 수돗가에 걸터 앉아 아이들을 꼬나 보면서도 눈빛이 전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진작 나는 어느 한 아이의 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아이가 더 셌기도 했고, 인적 네트워크가 넓었으며, 또한 선배 일진들 중 주류의 신임을 보다 얻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말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저쪽 편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항변하는 편지를 작성하기도 했고, 그에게 찾아가 일대일 대화를 요구한 적도 있으나 허사였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나를 왠만해선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저쪽 계파의 내 급 되는 아이와 싸움을 붙는 것이었다. 말도 안되는 일을 구실로 나는 결투 신청을 했다. 거기서 승리함으로써 나는 신임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 결투는 우리 학교 동네에서도 가장 큰 공원에서 펼쳐졌다.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정말 백 수십은 되는 아이들이 빙 둘러 결투를 기다렸다. 나는 이런 식의 상황에 내던져진 건 처음이었기에 많은 긴장을 했다. 내가 싸움을 걸었으면서도 내가 기싸움에서 지고 시작하는 게임이었다. 싸움은 단 5분 만에 끝났다. 완벽한 나의 패배였다. 나는 손가락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고, 호기롭게 웃음짓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걱정스러운 건지 실망한 건지 알 수 없는 여자친구의 얼굴을 봐야했고, 고놈 꼴 참 좋다며 속으로 배시시 거리고 있을 평소에 내가 갈구던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했다. 그러나 거기까진 좋았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싸움을 끝내려면 내가 졌다는 선언을 해야 했는데, 나는 나와 싸운 상대에게 찾아가는 대신 그의 대장에게로 갔다. “나 손가락이 꺾여서 더 못할 거 같은데”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더니 내 얼굴에 연기를 뿌렸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나는 한없이 깊은 굴욕의 늪으로 잠겨야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일진회를 탈퇴했고, 그 대가로 선배와 동기들에게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그런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거의 죽은 존재로 살았다. 한 학기만 버티면 졸업이 다가온다, 그때까지만 유령처럼 살자. 모든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비웃는 것 같았고, 내 존재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 인생의 가장 우습고도 힘겨운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추신 : 나의 악행사(惡行史)를 펼치자면 여기가 아닌 책 한 권의 저술이 필요할 것이므로, 더 긴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지난 날의 부채감으로, 또 지금 내가 먹고 입고 쓰면서 세계에 저지르는 착취에 대한 죄의식으로, 굳이 거창하게 말하면, 거기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이후 많은 시간을 살아간다. 많은 아이들을 괴롭혔고, 그중엔 물리적, 정신적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나를 변호할 생각이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무조건 죄인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그들이 아직까지 어떠한 앙심을 버리지 못한대도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직접 사과할 수 없음에 죄송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이따금 고백하며, 그 괴로움과 계속 살겠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