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1





  10년 전 8월 27일, 허우 샤오시엔 감독을 만났다.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서 열린 ‘대만 뉴웨이브 영화제’에서였다. 이날은 영화 상영 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예정되어 있었다.(상영작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이었다.) 나는 상영시간 보다 좀 늦게 도착했다. 입장이 불가한 시간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극장 밖 공터로 나와야 했다. 쭈뼛쭈뼛 맴돌고 있는데 저 편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향해 왔다. 허우 감독과 차이밍량 감독이었다.((지금은 고인이 되신) 에드워드 양 감독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어찌나 가슴이 쿵쾅거리던지. 손과 발까지 다 부르르 떨었던 거 같다. 그들은 저쪽 구석진 곳으로 가 담배를 나눠 물었다. 지는 해를 등진 채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한참 서로 주고 받았다. 역광을 받은 그들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자아냈다. 기자들은 그 장면을 더 잘 담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나는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저만치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날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내겐 유독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조조는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내가 세상에 지겠다. 세상에 내가 복종하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사실 그때 나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렸고, 뜨거웠다. 세상에 맞서고 사람에 맞설 때였다. 나이 든 어른의 다소 비겁한 변명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저 말의 속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건 결국 사람과 세상에 예의를 지키겠다는 말이었다. 세상을 바꾸거나, 나서서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뜨겁게 응시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스스로만을 훈계하겠다는 다짐 같은 거였다. 그의 모든 영화들이 이미 그걸 소리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마스터클래스가 끝나고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었다.(단편 연출부 촬영 헌팅 중이었다.) 어렵사리 사진 촬영을 부탁드렸다. 그는 빙긋 웃었다. 뽑힌 인화지에 사인을 해준 뒤 내 두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내 모습이 아무래도 가여웠던 모양이었다. 뭉툭하고 작았지만 매우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저 사진을 보고 또 들여 보았다. 그리고 아직 내 손에 남은 온기를 되짚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때까지도 얼얼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