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2.

한여름의 판타지아


  어언 10여년 전 일이다. 나는 학교를 따분해하는 학생이었다. 상업 영화판 막내로 들어갈 기회가 찾아왔고, 덥썩 그 제안을 안았다. 영화 창작의 비밀이 도무지 궁금해서이기도 했지만 역시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여배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팬이었다.(지금도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새얼굴들 또한 눈에 들어온다.) 그녀와 함께 작업 할 수 있다니. 이건 뭐 꿈에서나 있을 (요즘 말로) 개이득이었다. 우리 팀의 첫인상은 좋았다. 사람 좋게 웃으며 나를 앉히고 갈비를 뜯겼다. 당시만해도 막내는 거의 인간 취급을 못 받았더랬는데(요즘은 어떨까?) 이들은 달랐다. 청소도 각자, 빨래도 각자, 어렵고 복잡한 건 선배들이, 야식 결제도 선배들이(아 얼마나 아름다운 원칙인가!). 내가 무슨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건가 싶었다. 흠모란 말이 모자라던 여배우에, 평소 좋아하던 감독님에, 이토록 인격적인 선배들이라니. 그러나 그것은 첫 한 달 동안의 이야기였다. 문턱을 넘어서자 비극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차마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시절 내가 당했던 모욕과 죽어라 내달렸던 뺑이질(이런 표현을 용서하시길.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은 지금 생각해도 저릿저릿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날이 많아 그 좋아하던 여배우 얼굴도 선명히 본 일이 드물었다. 나는 아직 미필이었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인지 군생활은 수월하게 한 편이다.(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첫 한 달만은 그러니까, ‘한여름의 판타지아’였던 셈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첫 전체 회식자리였다. 내성적인 성격이던 그 여배우는 스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고 갈채가 이어졌다. 그녀는 수줍게 푹 고개를 떨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가볍게 살랑거리는 몸짓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르는데, 정말 그녀가 내 맘에 들어오는 것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심히 요동치는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여자친구, 안보고 있지?) 인생의 베스트 장면 중 하나로 아주 잘 간직 중이다. 퍽 고달팠으나 또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덧1 : 그 여배우는 최근에 꽤 잘 생긴 남자배우와 함께 통속 멜로를 하나 찍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덧2 : 다섯 달 동안 그렇게 혹사 당하던 나는 백 만원도 채 받지 못하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지금도 한국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아주 꼼꼼히, 유심하게 살피는데, 그들의 이름은 여전히 오르고 있다. 잘 들 살아가는 모양이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