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말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소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중에서
 
 나는 예술 그 자체에 관하여 또는 예술의 사명에 관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삶 자체이다. 삶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정말로 본질적인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술가로서의 과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더 중요히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문명이 처한 상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역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 각자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뛰어난 인물들‘, 통치차들, 종교 재판관들이 설치는 역사적 단계는 우리 시대로 끝나간다는 인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행복을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서 우리의 삶을 함께 바꿔내자는 주장을 펴 왔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망각했으며, 이 개성은 보편적 역동성 속에서 상실되어 버렸다. 인간은 인류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이해는 망각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구심점을 이루는 고유한 존재라는 인식, ’나‘ 자신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결심과 막대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는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다. 그에 반해 순전히 물질적인 것들은 제도적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우리들 삶의 근거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의 삶은 경화증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마비 증상의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에 가담하고 발전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인간의 행동과 인간의 운명 사이 상호 연결 관계가 상당히 심각하게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분리가 현대인의 자의식을 불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자기 자신은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스스로를 여긴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환경의 강제를 받아왔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운명에서 결국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는 숙명적인 감정을 가슴 한켠에 품고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하여야만 한다. 고통, 그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자신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악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소유한 힘으로부터 오는 것도 인간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 공동체를 위한 담보도 아니고 사회적 조화의 현상도 아니다. 예술은 일종의 사랑 고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우리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 얽매여 있다는 자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고백이다. 예술은 삶의 본디 의미를 표출해주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며 사랑이고, 희생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