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4.

4등과 걷기왕


1. 경주마의 할 일은 1등으로의 골인이 아니라, 트랙을 뛰쳐 나와 저 초원으로 내지르는 일이다, 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두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걷기왕]과 [4등]. 그들 모두 탈주와 성장을 다룬다. 끝을 맺는 방법은 꽤 큰 차이를 보이는데, 한 편은 탈주 자체의 낭만을 서둘러 판타지화 하고, 다른 한 편은 탈주 이후의 불안과 치사함(그러나 그렇게라도 계속 살아갈밖에 없음)을 이야기 한다. 어느 쪽이 더 생활의 진실에 가까운지는 자명하다. 우리 대개는 비겁함을 알지만 다른 방도를 몰라 그저 살아간다. 혹은 그것이 비겁한 일임을 충분히 헤아리기도 전에 가뿐히 흘러가버리는 삶의 속도 앞에 무력해진다. 그 망연자실을 직시하는 대신 도리어 성급히 판타지화 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낙관을 주는가.

2.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을 못하는 이유는, 그 복잡성을 따라갈만한 인지력과 감수성을 갖지 못했음이 첫번째요, 방대한 소통의 그물망을 감당해내고 거기에 적극 동참할만한 소통력을 갖지 못했음이 두번째다. 저 재기스런 단문과 이미지와 상호 멘션들의 넘실댐이라니. 보고 있자면 압도감, 무력감 마저 드는 것이다. 핑계다. 품과 시간을 들인다면(복잡이고 감수성이고 소통력이고 간에) 얼마간은 끼어들 수 있지 않겠나. 그러나 그러려면 내가 가진 한정된 것들을 상당 부분 초과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리게 될 것들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블로그도 사회 연결망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있는데, 숫제 개인 기억 창고쯤 여기는 편이 그저 낫겠다 생각해 온 지 좀 됐다. 앞으로라고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조용히, 오래오래, 차곡차곡 쌓아두고 이따금 돌아보고 싶다. 아주 작은 것의 역사도 역사는 역사다.

3. 뽀미가 웅크린채 잠을 잔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마도 직접 밥을 주는 일이 적기 때문이 아닌가로 추정하지만) 내게만은 살갑게 굴지 않는 녀석이다. 살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작은 동작들에도 꽤나 기민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을 영상으로 담아 제목을 단다면 '경계 중'이 더없이 적합할 것이다. 서운키도 하고, 욕심 비슷한 게 나기도 한다. 그래도 6년을 넘게 본 사이인데, 넌 내게 아직 그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연이 있니,라고 묻고 싶어지기 까지 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평온히 잠을 자는 모습이 위안을 준다. 부러 그 앞을 살금 지나가기도 하고, 그이 얼굴에 내린 햇살을 가려도 보고 하지만 미동이 없다. 이 사실이 너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