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

순례의 해


 바람이 차가워졌다. 두꺼운 옷을 꺼냈다. 나프탈렌 향이 훅 끼쳤다. 아내가 사준 것이다. 한참 얼어 붙은 심사였던 그때. 불쑥 내 손목을 낚아채고, 매장 한 바퀴를 돌린 다음, 어느 거울 앞에선가 턱하고 걸쳐 입혔던 그 옷이다. 저 일련의 간결한 프로세스는 타래타래 얽힌 당시 내 마음의 모양새와 많이 대비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거기서 작은 위안을 얻었더랬다. 나는 어찌하여 차츰차츰 이겨내었다. 퍽 힘들었고 또 그런대로 해볼만한 계절이었다. 돌이키니 새삼 그랬다.

  프란츠 리스트 [순례의 해]를 찾아 눌렀다. 점퍼 안주머니에 플레이어를 넣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간질이듯 청량한 피아노음이 흘렀다. Lazar Berman이 연주했다. 다른 이가 연주했어도 나는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걸 들으며 걸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정말 예쁜 고양이를 보았다. 길냥이 처지이기엔 아까운 생김새라고 생각했다. 뽀미에겐 미안한 얘기다. 하지만 예쁜 건 어쩔 수 없이 예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오랜 갈망과 투쟁과 상처에 대해 떠올려 보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성가신 일이다. '두 아이를 바꾸어야만 하는 선택 앞에 놓인다면?' 극단의 질문이 난데없이 비집고 떠올랐다. 몸서리가 쳐졌다. 아름다움보다 더한 가치들이 있는 법이다, 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런 생각도 핀 것이다. 정말 압도적인 아름다움,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아름다움 앞에 놓인다면? 그때도 나는 저 법을 수호하려 들게 될까.

  닷새 째 방문이다. 신경치료 사흘, 스케일링 하루, 그리고 씌우기 하루. 그러고도 한 번을 더 가야 한다. 치과는 스무 해 만에 처음 찾는 것이다. 그 사실이 의사와 간호사를 적잖이 놀라게 했던 모양이다. 그들에겐 특별난 일일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닥 불편함이 없는 세월이었다. [순례의 해]를 귀에서 뽑고 치과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첫날이 아니다. 신경치료도 끝났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자리에 누웠다. 옆 자리의 치료기 모터 소리가 [순례의 해]를 강하고 빠르게 몰아냈다. 담당 의사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다. 볼수록 이동진 평론가를 닮았다.(목소리까지!) 그의 차분한 리드 덕에 수월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좋은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은 첫째 기술일테지만, 그만큼 또한 중요한 것이 꼼짝없이 의자에 누워, 숫제 천으로 시선을 차단 당한 채, 제 몸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낼 길이 없는 가련한 이들을 향해, 되도록 차분하고 정확하고 안정적인 어조로, 현 상황의 그저 80프로 정도만이라도 전달해주려 하는, 그런 작은 만남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 선생은 그걸 너무도 잘 알 뿐만아니라 곧이 체현해내는 사람이었다. 그점이 문득 감사했다. 마지막 덧니 씌우는 날엔, 집에 넘쳐나는 고구마라도 몇 개 구워올까 싶다.

  다시 [순례의 해]를 꼽고 병원문을 나섰다. 살근 달아오른 탓에, 올 때 만큼은 춥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새 해가 더 나와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놓고 도란도란 카페에 모여 앉은 여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쇼윈도마다 그랬다. 올초에 본 [너는 착한 아이]의 한 이미지가 그 위에 겹쳤다. 거기서도 젊은 엄마들은 평일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