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5.

산책. 2005년 봄


문학과 사상 조원들과
2005년 봄









2015. 3. 13.

2015. 2. 22.

산책. 2015년 봄


2015년 봄







2015. 1. 14.

사이비


혹 어떤 이가 그릇된 믿음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오직 그 믿음 뿐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난간이자 마지막 안간힘이라 한다면, 더구나 나는 그에게 다른 어떤 마땅한 대안도 제시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일 뿐이라면, 나는 과연 그 믿음을 사이비라 쉽게 부를 수 있을까. 그런 권리가 내게 있을까.

2015. 1. 8.

김훈의 글


  “삶의 불가능, 사랑의 불가능, 가치를 건설하는 일의 불가능은 본래 그러한 것처럼 분명했으나, 그 불가능한 삶을 단념할 수 없는 운명 또한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삶은 곧 기갈인 것인데,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으며 피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 앞에서 멈칫거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배고픔과 목마름이 돌이킬 수 없는 생로병사의 길이라 하더라도, 문학은 저 불가능들의 편이 아니라 기갈의 편이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졸작은, 그 성취는 고하간에, 어쨌든 그 기갈의 편에 서는 글일 것입니다. 
  중생으로 살기 위하여, 생로병사에 밟히기 위하여, 시간이 몰고 오는 온갖 수모를 견디기 위하여, 목마름을 목말라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에게 허용된 말의 범위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저는 기어이 한 글 한 글의 글을 쓰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은 아마도 좁고 가난한 영역 안에 갇히게 될 터인데, 저는 그 부자유를 수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 김훈, 이상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2014. 12. 15.

2014. 12. 1.

밀란 쿤데라의 글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중에서

2014. 11. 21.

메르세데스 소사


남미 민중가요의 여신 메르세데스 소사와 맞는 아침. 쿵쾅거리는 타악기음과 힘차면서 또한 부드러운 그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매우매우매우 감격적임. 란체라 음반 (정품아님. 남미에서 정품음반을 본 적이 없음)은 역시 내 인생 음반 중 하나. 춤을 절로 추게 한다.


2014. 9. 14.

곳간


어떤 이들 감수성의 큰 줄기는 스무살을 전후로 형성되는가보다. 많이 달라진 것 같았는데, 사실 거의 달라진 게 없음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내 경우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이들 그렇더라. 묘하게 안심이 되었더랬다. 그때 들었던 음악, 본 영화들, 읽었던 책, 만났던 사람들, 장소들, 사건들의 인상이 지금도 나를 놓지 않고 있다. 그때 쌓아둔 감수성의 곳간을 조금씩 꺼내 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2014. 8. 15.

2014. 8. 3.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부인은 그 사람에게 애당초 마음을 뺴앗기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미사키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잤죠.”
  (중략)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미사키가 덧붙였다.
  아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후쿠는 침묵을 지켰다.
  “그건 병 같은 거에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중에서

2014. 7. 2.

한마디


땀이 배지 않은 말들은 믿지 않는다. 구체적 삶의 결이 드러나지 않는 말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 자기 존재증명을 위해서건, 시장의 간택을 받아 예쁘게 팔리기 위해서건 소위 인문학을 지식을 위한 지식의 도구로만 소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랬다. 푸코, 데리다, 라캉, 니체를 인용하고 돌아서면 어딘가 뿌듯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저 거장들은 자신들도 알 수 없는 맥락 위에 불시착해야 했고, 나는 갈수록 아리송한 허무감을 맛봐야 했다. 그건 그 말들 속에 내 삶이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아는 나이가 됐다. 인용이 잘못이 아니라 자기 삶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게 잘못일 것이다. 이젠 오직 자기 삶에서 길어올린 말들만을 믿는다. 그게 비문이건, 욕설이건, 감정 배설이건 상관없다. 진실을 담은 한마디, 그것들에만 귀기울이게 된다.

2014. 1. 7.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아직도 말하고 다니는 자랑거리는, 2002년 2월 22일 22시 22분 22초에 정확히 시계를 딱 봤다는 거. 학원 자습실(성지)에서 나는 저 기적의 순간을 맞았다. 교재를 하늘에 날리고 혼자 환호성을 쳤더랬는데. 아무도 내 흥분에 동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저 기적 덕에 우리가 4강에 가게 된 거라고 침을 튀길 땐 오뎅꼬치에 복부를 찔리기도 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며. 하…😢 니들이 기적의 맛을 알아?

2013. 12. 15.

2013. 11. 12.

어떤 노래


   초등학교 졸업 후 이듬해였나. 몇 명의 동창생과 그의 어머니들이 한 식당에 모였다. 이따금 엄마들끼리만 따로 만남을 가져온 티가 확연한 모임이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흘끔거리며, 지금 둘러 앉은 우리의 이 조합이 얼마나 어색한지를 저마다 헤아려보고 있었다. 엄마들의 높은 톤, 바쁜 수다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아이들은 그만큼의 바쁜 젓가락질을 그러나 조용히 해댔다.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한 어른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 우리 손엔 만원씩이 쥐어졌다. 엄마들은 저만치 커피 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거리에 남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끔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 집에나 갈까. 모든 게 괜한 시간낭비 같았다. (잘하면 만원이 공돈 되겠는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또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우리 노래방 안 갈래?”

   돌아 보니 신 모양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짐짓 웃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놀란 얼굴을 했다. 노래방이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노래방 아니면 영화관이었다. 중1짜리 아파트 촌 아이들이 달리 무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 애가 그렇게 맹랑해서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 애는 그래서는 안 됐다. 학교를 무슨 수녀원 다니듯 늘 조용하고 엄숙했던 아이였으니까. (그걸 섹시하게 여긴 녀석들도 더러 있었지만.) 더구나 저 여유에 찬 미소라니.
  그런데 다들 순순히 동의의 눈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색함과 무료함을 일거에 퇴치해 준 구세주의 등장이 반가운 모양들이었다. 한 자리로 주섬주섬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신모양은 머뭇거림도 없이 앞장을 섰다. 잠깐을 바라보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깔끔한 공기,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책 장을 넘기는 손들만 저마다 바빴다. 순식간에 예약 번호가 쌓여갔다. 나는 괜시리 음료수를 홀짝대며 어서 내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오늘이 그간 연마해 온 김민종의 찢기 창법을 공개할 시간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연습한대로 불렀다. (그랬으므로 당연히) 환호 내지는 감탄의 얼굴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뜻밖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몇몇의 비웃는 얼굴들이 언뜻 감은 눈 사이로 비쳤다. 나머지 녀석들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노래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예약번호를 찍고 있었다. (아, 한 놈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잘못 본 건 아닐까. 그 채로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만 싶었다.
  굴욕감에 한동안 젖어 있어야 했다.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그러느라 신 모양의 차례가 온 줄도 몰랐다. 누군가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고 있었다. 저 애는 과연 무슨 노래를 부를까. 그것만이 (내 노래 다음으로) 기실 이 시간의 유일한 흥미거리일 것이었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아니라면 달리 무얼지, 사뭇 기대가 되던 참이었다.
 장필순의 [방랑자]. 그게 그 애의 선곡이었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제목만으로 충분히 우스웠다. 방랑과는 제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이가 하필 고른 노래라니.

  그러나 첫소절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멈칫했다. 어수선했던 방 안의 기운도 일순 차분히 가라 앉았다. 뭐지 이건. 아이들은 저마다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 되어갔다. 그 애의 목소리만이 흡사 진공상태처럼 되어버린 방 안을 홀로 채워 나갔다.
  들을수록 묘한 목소리였다. 그건 노래라기 보다 읊조림에 가까웠다. 온 몸의 힘을 다 뺀 채로 무심하게, 그러나 뭔가 아주 중요한 진실을 전하려는 듯한 목소리. 차라리 어딘가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사람의 단말마래도 좋았다. 떨어질 듯 간신히 호흡이 이어졌다. 호흡과 휴식 사이, 다시 호흡과 음성 사이에 무언가 아주 깊고 거대한 것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듣는 내내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신 모양은 그 뒤로도 몇 곡을 (더 불렀지만 내 기억에는 방랑자만 남아있다) 모두 이렇게 불렀다. 한 곡 한 곡이 끝나고 마이크를 내려 놓을 때마다, 무거운 전율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 애가 새롭게 보였다. 제 삶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사람 같았다. 불현듯 아까 밖에서 당돌했던 그 애의 얼굴이 생각났다. 표정에 베어있던 묘한 오만함. 그건 아마 ‘이제까지 너희가 알던 나는 잘못이고, 곧 진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일 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 얼마나 따분하다는 눈으로 그 애를 바라 봤을까. 그 모든 시선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 나중에 커서 뭐 할꺼니. 나? 가수가 되고 싶어. 가수? 정말? 응. 가수할거야. 난 노래 잘하는 가수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가수가 될 거야. 정말? 노래를 잘 못해도 가수가 될 수 있어? 그럼. 물론이야. 마음 속 깊은 것만 전해지면 돼.
  이 영특한 소녀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전에 모르던 모습을 발견한 날, 공교롭게도 그건 그 애의 마지막 얼굴이 되었다. 바라던 가수가 되었는지 아닌지 이후 그 애의 소식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언젠가 호기심에 몇 번 검색질을 해봤지만 곧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게 마주하는 건 어쩐지 두려운 일이었다. 나름 나도 열심히 음악을 들으며 사니 언젠가 때가 되면 인연이 닿을 것이고, 아니어도 그 애는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이었다. 그날 그 노래의 무심함처럼.

   어떤 노래는 단 한번으로도 누군가의 귓가에 평생 맴돈다. 내게는 어릴적 고수부지 뚝방에서 할아버지가 부르던 취한 노래가 그랬고, 벌거벗은 내 몸을 씻기며 엄마가 부르던 허밍소리가 그랬고, 그리고 그 날 그 아이의 노래가 그랬다. 이 노래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한 소절 듣는 것만으로도 탁하고 마음이 내려앉는 그런 목소리를 가질 순 없을까. 글쎄 나는 한참 먼 것 같다. (2013)

2013. 11. 8.

천명관의 글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
                                           
                                                                         - 천명관, [고래]중에서

2013. 10. 17.

어떤 불가피함


그게 그 사람이 존재의 불안과 세계와의 불화에 대응하는 방식일테다. 달리 살아왔으므로 내 눈엔 거슬려보이는 게 어쩔 수 없겠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말할 일도 아닌 것이다. 내가 무슨 노자도 아니고 마호메트도 아닌데 화도 나고 욕도 해주고 싶을 때야 물론 있겠지. 그럴 땐 정 참을 수 없을만큼 기다렸다 사이다처럼 쏴주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큰 품의 연민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저 이도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다보니 불가피하게 저리 되어버렸다고. 안그런다면, 일일이 대응하며 소진한다면, 아마도 내 편이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러모로 살아간다는 건 짙은 피로를 동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또한 짊어지고 버티어 서야 할 어떤 불가피함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2013. 9. 16.

서머싯 몸의 글



“그때 나는 부인에게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2013. 8. 7.

졸라 섹시하다


작지만 지속적인 성취로 자존감을 두터이 해나가는 사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느라 삶을 허비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발가 벗겨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자기 성찰에 부단하지만 자아 중심성에 함몰되지는 않는 사람. 타인을 동정할 줄 알지만 결코 시혜적으로 굴지는 못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가 타인, 세계의 문제와 연결 되어있으며 그 반대 역시도 공히 성립됨을 온 감각으로 이해하는 사람. 저 한 몸뚱이가 아무리 기써본들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아무리 작고 여린 것이라도 함부로 어찌해선 안된다 믿는 사람. 오직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말하고 행동하고 소비하는 사람. 이 지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끝내 살아남음으로써 무언가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사람. 그런 사람. 졸라 섹시하다.

2013. 4. 23.

긴 호흡 느린 걸음


너무 많은 아름다움, 너무 많은 욕망의 부추김들이 사방 도처에 부비트랩처럼 널려 있다. 가히 자본의 과욕망과 포스트 모던의 오남용이 힘합쳐 만든 비극적 살풍경이다. 두 눈 밝게 뜨지 않으면 저들이 설계한 노름판 안으로 시시각각 포섭 당하게 생겼다. 아름다움을 가려볼 줄 아는 눈이 그 어느 시절보다 긴요해진 것 같다. 긴 호흡 느린 걸음으로, 가깝고 작은 것을 세심하게 자주 살피며 그걸 찾아가고 싶다. 그래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