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

2019. 3. 22.

라스트 미션



1.
공원을 산책하다 한 무리의 청년들을 보았다. 저들의 기운찬 재잘거림을 아내와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다시 잡을 수 없는 무엇을 바라보듯이. 저들에겐 생기가 넘쳤고, 그 순간 그것은 온전히 저들의 소유였다. 꼭 저들만의 시간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시에 나는, 그러나 우리의 걸음, 이 속도가 좋고 편하다 생각했다. 다시 저 시절에 떨어뜨려 놓는다면, 나는 얼마 못가 다시 지금을 간청하게 되리라. 이 속도, 이 걸음, 이 리듬을 갈구하고 말 것만 같다. 그렇게 되겠지. 하나둘 무언가 들과 악수하고, 익숙함에 망설임 없이 젖어들고, 이미 잡아 둔 것들을 더디 잃으려고 하겠지. 많은 비겁함과 적은 반성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되겠지. 그렇게 살아가면서 지금 나는 어른이 되는 중이라 스스로를 위안하겠지.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어쩌나. 나는 내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간이, 진심으로 편하고 좋은 것을.

2.
또다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품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바침에 한 점 망설임이 없을 그런 작품이었다. 가히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쉬운 방도를 가지고도 그보다 깊은 감동으로 붙잡고 들어가는 감독은 글쎄, 내 얇은 식견으론 없다. [라스트 미션]은 또다시 어른의 영화였다. 정확하게는 노인의 성장영화. 그렇다. 진정한 어른은 노인이 되어서도 성장을 해야 한다고 웅변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자의 저 자기 돌아봄엔 뭉클함을 넘어선 숭고함이 있다. 그는 자신의 죄과를 그대로 수용한다. 하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에 어떤 변명도 달지 않는다.  "유죄입니다. 내가 했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게 될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글픔이 밀려든다. 그의 삶과 영화에 조응해 온 관객이라면 노인이 꽃을 심는 마지막 장면에 같은 감정을 공유했을 것이다.





2019. 3. 16.

산책. 2018 겨울



산책. 2018 겨울










2019. 1. 28.

장 르누아르의 말



“영화는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러하다. “무슨 상관인가?” 여러분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정원을 가꿀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베를렌느의 시나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예술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만약 여러분의 영화나 여러분의 정원이 훌륭하다면, 영화나 원예의 종사자로서 여러분 또한 예술가로 자처할 자격이 있다. 훌륭한 케이크를 만드는 제과요리사도 예술가이다. 낡은 쟁기를 든 농부가 이랑을 파는 순간에도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술은 그 자체로서는 직업이 아니다. 사람들이 직업을 실행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 어떤 인간 활동을 수행하는 방법, 바로 그것이 예술이다. 나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즉 예술은 만드는 활동이다. 시 예술은 시를 만드는 예술이다. 사랑의 예술은 사랑을 만드는 예술이다.

- 장 르누아르, [나의 인생 나의 영화]중에서






2019. 1. 19.

밤의 해변에서 혼자



1. 지나친 식사를 했다. 빠르게 반응이 찾아 들었다. 식은 땀이 흐르고 호흡이 불편해졌다. 환을 마흔 알 삼켰고, 매실 원액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셨다. 문득 내가 이 상황을 초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기가 부쩍 자주 찾아 드는데, 게중 얼마간을 장염으로 치러내다보니 덜컥 겁부터 먹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장염이면 안돼. 하지만 체기나 장염 따위가 진원은 아닐 것이다. 어쩐지 자꾸 서둘게 되는, 정량을 지나치게 되는, 급히 사태를 진화하려 드는 이 모든 성급한 생활 습들. 이것을 먼저 점검할 일이다. 그래야 할 게 아닌가. 어지러움을 부여잡으며 그런 반성을 했다.


2.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다시 보았다. 감독과 여배우의 숨은 연애(가 전부인 건 아니지만)에 관한 이야기이고, 실제 감독과 여배우는 이 영화 이후 숨은 사랑을 세상에 들키고 말았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말들이 만들어졌다. 그 일에 내 입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구태여 사람들 사이에 내 말 하나 더 보탤 필요도 마음도 없어 그간 끼어든 일이 없다. 다만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매우 서글픈 감정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영화 속 육신을 빌려, 저들은 처절히 울부짖고 온몸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더 이상은 힘들다 싶을 정도의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것은 '감독 어머니 재산', '칸 영화제 맞담배' 같은 검색어와는 무관한 것이다. 혹시나 계속될 개인사의 사법적 쟁투와도 무관한 것이다. 오직 두 사람 각자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충만과 공허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가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한 여인의 노래를 들었고, 그 여인의 기도와 뒷모습을 보았다. 모두 너무나 서글픈 것이었다. 여기에 도덕이 어쩌고 같은 말을 들이대는 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2018. 12. 14.

2018. 10. 7.

레볼루셔너리 로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았다. 10년 만이다. 그때나 이제나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하나다. "정말 지독하다." 도저하고 냉엄하게, 한 중산층 가정의 시작과 끝을 들여본다. 차곡차곡, 한톨의 불필요함 없는 축적과 리듬으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서로의 생활을 묻고 아이를 낳고, 회사에 다니고, 집을 사고,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마음이 어긋나고, 각자의 공간을 마련하고, 후회와 번민에 허덕이고, 다시 일을 하고, 섹스를 하고, 그러다, 그렇게 살다가, 이렇게 계속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이별을 선언하고, 다시 마음을 돌려보려하다가, 끝내 내 마지막 삶이 이래선 안되겠다는, 그래서 '어떤 결단'을 내리기까지. 이 모든 지난한 생활의 궤적과 심리의 추이를, 이 영화는 징그럽게 응시한다. 나는 군에서 막 제대한 20대 초반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물론 그때는 머리로 보았다. 반도 흡수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저들의 삶에 대한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 10년의 시간 동안 나는 연애의 부침을 겪었고, 가정 생활의 기초를 터득해가고 있다. 그 두 시간 축의 결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본 이 영화의 뒤에, 나는 어떠한 서툰 주석도 달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할 만한 짓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지난 10년 시간이 내게 남긴 유일한 무엇일 것이다.





2018. 9. 23.

산책. 2018 가을


산책. 2018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