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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0.

칼릴 지브란의 말


그러자 한 늙은 사제가 말했다.
우리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제가 오늘 종교 말고 다른 무엇을 말했던가요?
모든 행위, 모든 사색이 종교 아닌가요?
또한 행위도 사색도 아니지만,
심지어 손으로 돌을 다듬고 베틀로 옷감을 짜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것 역시 종교 아닌가요?
그 누가 자신의 행위와 신앙을,
또는 자신이 하는 일과 믿음을 분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기 시간을 자신 앞에 펼쳐 놓고
‘이건 신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이건 내 영혼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내 육체를 위한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들의 모든 시간은
지금의 나에서 다음의 나를 향해,
퍼덕이며 창공을 날아가는 날개입니다.
도덕을 가장 좋은 옷으로 여기고, 그걸 입고 있는 사람은
차라리 벌거벗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해도 바람과 태양이 그의 살갗에
구멍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윤리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노래하는 새를 새장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철망과 빗장을 통해서는
최고의 자유의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예배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창문처럼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집, 새벽에서 새벽까지 창문이 열려 있는 그 집에
아직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들의 나날의 삶이
그대들의 사원이며 그대들의 종교입니다.

그대들 그 사원에 들어갈 때마다
그대들의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가기를.
쟁기와 풀무와 나무망치와 류트,
필요해서 만든 것이나 즐기기 위해서 만든 것
그 모두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몽상 속에서도 그대들은
그대들이 성취한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고,
그대들이 실패한 것 이하로 내려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찬양 속에서도 그대들은 저들의 희망보다 높이 날 수 없고,
저들의 절망보다 더 낮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를 풀려는 사람처럼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대 자신을 둘러보십시오.
그러면 신께서 그대의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허공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구름 속을 걷고, 번개 속에 팔을 뻗고, 비를 타고 내려오는
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대들은 꽃들 속에서 미소짓고,
위로 올라가 나무 사이에서 손 흔들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 '종교에 대하여' 편

2016. 1. 18.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말



  영화를 찍을 때, 나는 내가 그때 느끼는 것을 많이 반영한다. [열대병]을 찍을 때, 나는 가족, 사랑, 자금문제 등 모든 문제에 대해 우울했고, 영화의 모든 것이 다운된 분위기로 표현했다. 그래서 [열대병]을 보는 당신의 시각과 나의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열대병]의 대화나 로케이션은 모두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다큐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일기 같다. 10년 전을 돌이켜보는 나의 기분을 반영하는. 영화인이라면 자신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관점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젊은 영화감독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관점이 아닐까. 나처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파이낸싱 측면에서도 희생이 필요한 게 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타이에서 다른 일들을 하기 때문에 운이 좋은 편이다. 나는 디자인 컨설팅, 뮤직비디오 제작 같은 일들도 한다. 처음에는 눈치를 봐야 할 일도 많지만 일단 크게 성공을 거두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나. 그때는 치사하게 굴어도 된다. 이런 게 해피엔딩 아닐까.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2016. 1. 2.

장률의 말


정성일: 당신에게 당나라 시대의 시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
장률: 당시를 원래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이태백. 그의 시는 정말, 사람 냄새가 난다. 어떻게 보면 중국 역사에서 가장 휘황찬란했던 시기가 바로 당시대다. 근데 그 휘황찬란했던 시기의 시가 제일 엄격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모든 중국 사람들이 슬프거나 기쁠 때 술이 취해서 한마디 떠올리는 시가 있다면 대부분 이태백의 시다. 엄격한 형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암송이 가능한 것 같다. 당나라 시는 할아버지부터 아이들까지 한수 두수는 꼭 외우고 있다. 모순으로 여겨지는 건, 엄격한 틀은 예술의 적이 아니던가. 예술은 자유분방해야 하는데, 이태백은 왜 그 틀 속에 들어갔을까. 어떻게 보면 예술과 예술가들이 조건없는 자유보다 오히려 어떤 틀 속에 있을 때, 그 자유가 더 힘이 나는 것 같다. 일관성있고, 흐트러지지 않고. [당시]의 주인공은 방과 복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갇혀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복잡하다. 이태백이 그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듯, 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당시를 제목으로 선택했고, 중간중간에도 당시를 자막으로 넣었다.
                                                           
           - 정성일, 장률, [씨네21 545호] 중에서

2015. 11. 12.

에밀 졸라의 글



게다가 그녀는 로랑의 생활에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편안하고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유익하고 필요한 물건처럼 그녀를 받아들였다. 로랑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또 그녀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보다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중에서 

2015. 8. 8.

자끄 러끌레르끄의 말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옛 이야기꾼들이 전해주는 광야나 숲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며, 여러분의 아이들도 더 이상 원시적인 것을 경험해 보고,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몸을 풀거나 환상적 느낌에 몸을 달려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아이들은 저희들 생각대로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놀이 프로그램'이란 교육을 통해서 배우며, 시간이 조금 지나면 경기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게 규격화되어 있어서, 달리고 싶은 곳에서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줄지어 놀이터까지 이끌려 가서, 자격증 소지자의 행동에 따라 체계적으로 몸을 단련하게 됩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졸업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 '자리'가 필요하고 이 자리는 졸업장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를 믿고 있고, 누누히 강조하며 이 생각을 널리 전파하는데, 이래서 졸업장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겨납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 가운데 하나는 창조적 노력이 없이 교육을 받아들인 졸업장 인생들 자신입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해낸 것만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인간은 그저 졸업장 인간일 뿐 그것으로 그가 박식하고 많은 이들이 말한 바를 알고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말한 바를 그가 모두 모아들인다 한들, 그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기를 어떻게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식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좋은 것인데 인간은 지식의 노예, 졸업장의 노예, 혹은 계획의 노예, 방법의 노예가 될 위험을 안고 삽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고, 바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의미하고, 이 인간성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생기요 창조력이며, 노력의 의미이며, 그 개성 자체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 자끄 러끌레르끄, [무지의 찬양]중에서

2015. 7. 4.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


“나는 사물을 보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무엇인가 자신의 일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물 여덟이다. 그런데도 나의 스물 여덟 해는 거의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카르파치오에 대해서 논문을 썼고 그것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희곡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릇된 관념을 애매한 수단으로 증명하려고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나는 시도 몇 편 썼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시를 쓰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침내 마지막에 겨우 열 줄 정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을 느껴야 하고, 아침에 피어나는 작은 풀꽃의 고개 숙인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또 미지의 나라들의 길, 뜻밖의 해후,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이별, 또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남겨 둔 어린 날의 추억, 모처럼 기쁨을 가져다주었는데도 그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잔혹하게 마음을 슬프게 해드린 양친에 대한 행동, 온갖 중대한 변화를 가지고 이상한 발작을 보이는 소년 시절의 병,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한 방에서 보낸 하루, 바닷가의 아침, 바다 그 자체의 모습, 저쪽 바다, 이쪽 바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덧없이 사라진 여로의 밤들, 그런 것들을 시인은 회상할 수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저 모든 것을 회상할 뿐이라면 사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추억이 많아지면 다음에는 그것을 망각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추억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느 시인의 고백] 중에서

2015. 1. 8.

김훈의 글


  “삶의 불가능, 사랑의 불가능, 가치를 건설하는 일의 불가능은 본래 그러한 것처럼 분명했으나, 그 불가능한 삶을 단념할 수 없는 운명 또한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삶은 곧 기갈인 것인데,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으며 피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 앞에서 멈칫거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배고픔과 목마름이 돌이킬 수 없는 생로병사의 길이라 하더라도, 문학은 저 불가능들의 편이 아니라 기갈의 편이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졸작은, 그 성취는 고하간에, 어쨌든 그 기갈의 편에 서는 글일 것입니다. 
  중생으로 살기 위하여, 생로병사에 밟히기 위하여, 시간이 몰고 오는 온갖 수모를 견디기 위하여, 목마름을 목말라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에게 허용된 말의 범위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저는 기어이 한 글 한 글의 글을 쓰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은 아마도 좁고 가난한 영역 안에 갇히게 될 터인데, 저는 그 부자유를 수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 김훈, 이상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2014. 12. 1.

밀란 쿤데라의 글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중에서

2014. 8. 3.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부인은 그 사람에게 애당초 마음을 뺴앗기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미사키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잤죠.”
  (중략)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미사키가 덧붙였다.
  아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후쿠는 침묵을 지켰다.
  “그건 병 같은 거에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중에서

2013. 11. 8.

천명관의 글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
                                           
                                                                         - 천명관, [고래]중에서

2013. 9. 16.

서머싯 몸의 글



“그때 나는 부인에게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2012. 7. 12.

김종철의 말



  “(상략) 이 청년은 지금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빚으로 버텨나갑니다. 현재 이 청년이 갚아야 하는 빚은 일본 돈으로 840만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자신의 수입이 얼마였냐 하면 10만엔이었다고 합니다. 부채는 840만엔인데 연간 수입은 고작 10만 엔이라는 겁니다. 그 수입도 대개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장학금으로 받은 돈이겠죠. 이런 식으로 가서는 빚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조만간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 교원으로 취직이 된다는 것을 가정해서 지금까지 대출도 받고 생활을 해왔겠지만, 취직할 전망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한해 박사학위 취득자가 1만 5,000명 가까이 된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대학에서 채용하는 신규교원은 연간 5,000내지 6,000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박사학위 취득자 중에서 3분의 1정도만 취직이 되는 거죠. 그 가운데 정규직 교원이라면 몰라도, 비정규직, 즉 일본에서는 비상근 강사라고 부르는 그 비정규직 교원의 봉급으로는 생활도 어려울 지경인데, 빚을 갚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암담할 수밖에요.
  일본 청년의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매일 듣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젊은 분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자식이나 손자들 이야기, 그리고 그 자식과 손자의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한국은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자리 문제를 비롯해서 서민들의 경제생활이 점점 악화했으면 악화했지 근본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진영이든 진보진영이든 관계없이 대부분의 경제나 정책 관련 인사들은 이런 상황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만간 극복될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여러가지 제안이나 계획 혹은 정책 공약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기는 민주적인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여 지금보다 좀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이 상황이 다소나마 개선될 여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근본적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계속해서 양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가 시내 나가서 돌아다니다 보면 제일 한심한 게 뭐냐면 새로운 고층빌딩들이 쭉쭉 올라가는 광경입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가 보아온 장면이지만, 이제는 그런 공사 현장을 보면 단지 얼굴이 찌푸려지는 게 아니라 지금이 어느 때라고 저런 한심한 짓을 계속하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저런 공사를 벌이고 빌딩을 짓는 사람들은 큰 수익을 기대하고 투자를 하고 있겠지만, 곧 후회할 날이 닥칠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는가 싶어요. 여태까지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을 하면서 반복해왔던 과정이 앞으로도 어떻든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세월이 다소 부침은 있겠지만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으니까 저런 무모한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세상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상일 것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거죠.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낯익은 방식의 삶이 좀더 확대된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관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관성처럼 무서운 힘도 없죠.
  결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경험하고 보아왔던 이런 삶, 이런 경제는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실을 좀 냉정하게 보고 직시하자, 그런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 위에서 장래를 설계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라는 겁니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 김종철, [성장시대의 종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