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1.

산책. 2015년 봄


 2015년 봄











2015. 4. 26.

유감


네팔에선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는데,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아플지 헤아릴 수도 없다는데, 나는 오늘 거리의 꽃을 보았고, 여자친구의 자전거를 닦아 주었고, 불고기 버거를 맛있게 먹었고, 종로에서 필름 몇 롤을 샀고,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를 보고 흠뻑 취한 기분으로 걸어 나왔다.

2015. 4. 19.

1주기


2015년 봄





2015. 4. 12.

5 년의 고독




  그날도 소동이 있었다. 아버지 품엔 작은 고양이가 있었다. 길냥이 임이 분명해 보였다. 어머니는 기함을 하며 말했다.
  ”당장 내보내세요. 아님 함께 나가시든가”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엄마에겐 막아낼 힘이 없었다. 최선의 저항은 그저 ’이혼 불사’를 연신 외치는 것 뿐. 나는 돌아서서 무심한 방문을 닫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내 삶의 짐 하나도 버거운 때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극렬한 애정과 반대 속에, 그리고 무관심 속에, 녀석은 용케도 5년이란 세월을 견뎌냈다. 그 시간은 어쩔 수 없게도 녀석을 향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일정한 시간을 통과하며 살아남은 모든 것은 그것으로 이미 얼마간 아름다운 향이 된다. 이제 녀석에게서도 향기가 난다.

  얼마 전엔 녀석이 내 발 사이로 들어왔다. 이리저리 뒹굴며 몸을 부비다 숫제 스르르 잠에 들기까지 했다. 너는 어쩔 수 없는 길냥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친해질 수 없는 거라고, 그런 주제에 감히 방 한 칸을 떡하니 차지하다니 너 참 파렴치하다고. 그렇게 냉담해했던 지난 시간들을, 그 장면은 떠오르게 했다. (2014)

2015. 4. 11.

산책. 2015년 봄


2015년 봄










2015. 4. 1.

엄마


영원한 숙제이자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 엄마에 관한 다큐를 찍기로 했다. 저 구석장에서 10년은 넘게 방치해 둔 캠코더를 꺼냈다. 중1 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온 집안을 들었다 놨다 하다시피해서 산 캠코더다. 먼지를 불어내고 면봉솜으로 약을 발라 구석구석 닦아내니, 작동이 된다. VDSLR이다 뭐다 영상 찍을 수 있는 장비들이야 요즘 많다.(하다못해 스마트폰 카메라도 엄청난 퀄리티.) 하지만 이 다큐는 이 카메라로 찍어야 할 것만 같다. 그냥, 왠지. DV테잎 한 박스를 주문했다. 언제까지 찍게 될 지 알 수 없다. 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긴 시간을 담고 싶다. 가와세 나오미나 왕빙 처럼 어떤 소명으로 찍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엄마를 더 잘 알고 싶다. 지나온 삶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2015. 3. 29.

산책. 2015년 봄


안녕, 낙원아트시네마
2015년 봄



















2015. 3. 27.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성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인 페트라 켈리의 말이다. 나는 저 말을 20대 중반에 들었다. 몸담던 사회운동 단체에서 한 선배가 전해준 말이다. 이후 늘 맘에 품고 살았다. 누군가는 이론과 제도를 정교히 생산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힘을 얻으려 싸우고 끝내 얻어내 세상에 뜻을 펼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공적 영역이 중심이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출발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타인도 이해할 수 없고 자연과 세상에도 결코 다다를 수 없다. 내가 제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정치인이든 학자든 생활인이든 예술가든 블로거든 그 누구건. 가령 헤겔, 아도르노, 벤야민은 그렇게 줄줄 읊을 줄 알면서(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놀랍도록 무지한 사람들. 박근혜가 어떻고 유신이 어떻고 가자지구 폭격이 어떻고에는 열변이면서 정작 자기 반경 내 폭력엔 깜깜한 사람들. 그런 이들에 신뢰를 놓은지 오래됐다. 오로지 자기 삶에서 길어올린 말들만을 믿는다. 자기에 대한 이해만큼이 세상에 대한 이해만큼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비평도 역시. 반부르주아적 카메라가 어떻고, 아도르노적 편집이 어떻고 하는 말들이 도무지 무슨 외계어들이란 말인가. 그건 자기 존재감 때문이라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벌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가장 쉽고 가장 간결하게, 자기 자신을 느릿이 돌아보는 일에서 출발하면 된다. 가장 공적이고 가장 논쟁적인 것들은 이미 내 삶 속에 모두 들어와 있다.

2015. 3. 15.

산책. 2005년 봄


문학과 사상 조원들과
2005년 봄









2015. 3. 13.

2015. 2. 22.

산책. 2015년 봄


2015년 봄







2015. 1. 14.

사이비


혹 어떤 이가 그릇된 믿음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오직 그 믿음 뿐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난간이자 마지막 안간힘이라 한다면, 더구나 나는 그에게 다른 어떤 마땅한 대안도 제시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일 뿐이라면, 나는 과연 그 믿음을 사이비라 쉽게 부를 수 있을까. 그런 권리가 내게 있을까.

2015. 1. 8.

김훈의 글


  “삶의 불가능, 사랑의 불가능, 가치를 건설하는 일의 불가능은 본래 그러한 것처럼 분명했으나, 그 불가능한 삶을 단념할 수 없는 운명 또한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삶은 곧 기갈인 것인데,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으며 피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 앞에서 멈칫거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배고픔과 목마름이 돌이킬 수 없는 생로병사의 길이라 하더라도, 문학은 저 불가능들의 편이 아니라 기갈의 편이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졸작은, 그 성취는 고하간에, 어쨌든 그 기갈의 편에 서는 글일 것입니다. 
  중생으로 살기 위하여, 생로병사에 밟히기 위하여, 시간이 몰고 오는 온갖 수모를 견디기 위하여, 목마름을 목말라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에게 허용된 말의 범위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저는 기어이 한 글 한 글의 글을 쓰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은 아마도 좁고 가난한 영역 안에 갇히게 될 터인데, 저는 그 부자유를 수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 김훈, 이상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2014. 12. 15.

2014. 12. 1.

밀란 쿤데라의 글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중에서

2014. 11. 21.

메르세데스 소사


남미 민중가요의 여신 메르세데스 소사와 맞는 아침. 쿵쾅거리는 타악기음과 힘차면서 또한 부드러운 그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매우매우매우 감격적임. 란체라 음반 (정품아님. 남미에서 정품음반을 본 적이 없음)은 역시 내 인생 음반 중 하나. 춤을 절로 추게 한다.


2014. 9. 14.

곳간


어떤 이들 감수성의 큰 줄기는 스무살을 전후로 형성되는가보다. 많이 달라진 것 같았는데, 사실 거의 달라진 게 없음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내 경우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이들 그렇더라. 묘하게 안심이 되었더랬다. 그때 들었던 음악, 본 영화들, 읽었던 책, 만났던 사람들, 장소들, 사건들의 인상이 지금도 나를 놓지 않고 있다. 그때 쌓아둔 감수성의 곳간을 조금씩 꺼내 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2014. 8. 15.

2014. 8. 3.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부인은 그 사람에게 애당초 마음을 뺴앗기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미사키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잤죠.”
  (중략)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미사키가 덧붙였다.
  아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후쿠는 침묵을 지켰다.
  “그건 병 같은 거에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중에서

2014. 7. 2.

한마디


땀이 배지 않은 말들은 믿지 않는다. 구체적 삶의 결이 드러나지 않는 말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 자기 존재증명을 위해서건, 시장의 간택을 받아 예쁘게 팔리기 위해서건 소위 인문학을 지식을 위한 지식의 도구로만 소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랬다. 푸코, 데리다, 라캉, 니체를 인용하고 돌아서면 어딘가 뿌듯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저 거장들은 자신들도 알 수 없는 맥락 위에 불시착해야 했고, 나는 갈수록 아리송한 허무감을 맛봐야 했다. 그건 그 말들 속에 내 삶이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아는 나이가 됐다. 인용이 잘못이 아니라 자기 삶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게 잘못일 것이다. 이젠 오직 자기 삶에서 길어올린 말들만을 믿는다. 그게 비문이건, 욕설이건, 감정 배설이건 상관없다. 진실을 담은 한마디, 그것들에만 귀기울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