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6.

이수경, 구지윤, 프랑수아 트뤼포


1. 모처럼 외출을 했다. 

2. 아트선재센터서 이수경의 <달빛왕관>을 보았고, 이어 아라리오 갤러리서 구지윤의 <혀와 손톱>을 보았다. 이수경과 구지윤 모두 중진작가로서 제법 업계에 이름이 나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이들의 전시를 처음 보았다. 다소 거칠지만, 두 전시를 '흘러내리는 신체에 관한 작업'이란 한 줄로 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3. 이수경의 <달빛왕관>은 외견상 화려하고 과시적인 설치작업들로 구성된 것 같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오브제의 면면은 모두 분절 난 여성 신체 조각들이다. 그 충돌감이 이상한 감흥으로 이끈다. 3층에 이어지는 영상작업을 통해 이수경의 지향을 감히 가늠해볼 수 있었다. 선명한 메시지를 부러 피하려 한 듯하나, 분명한 사회적 운동성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넘칠듯한 긴장과 균형감에 탄복하고 말았다.  

4. 구지윤의 <혀와 손톱>은 캔버스에 유화작업으로만 구성되었다. 2호 사이즈부터 300호(는 족히 되어 보이는 대형) 사이즈까지 다양한 크기의 작업들이 있었다. 형태를 뭉개는 추상회화의 전형들이었고, 전시 제목과 같이 신체기관 및 분비물을 연상케 하는 색채와 형상의 사용이 있었다. 굉장히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수경에게서 느꼈던 긴장감과 같은 것을 얻지는 못했다. 

5. 전시를 보고, 에무시네마에서 프랑수아 트뤼포 <400번의 구타>를 DCP로 보았다. 꼬박 한 두 해마다 한 번씩 트는 영화인데, 절반은 영화에 사용된 음악 때문이고 다른 절반은 앙뜨완 드와넬의 얼굴 때문이다. 에무시네마를 나오면서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임을 알아챘다. 앙뜨완 드와넬이 발자크를 흠모해 방구석 한켠서 작은 제의를 갖는 장면을 언제나 사랑스러워하는데, 커튼 조각에 옮겨 붙었던 불이 그렇게 컸다는 걸(그래서 하마터면 영화고 뭐고 다 타 죽을 뻔했다는 걸) 이전 감상에서는 이리 실감하지 못했었다.    






2021. 6. 26.

중력


1. 시와가 태어난 지 90여 일이 흘렀다. 모두가 그러할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러 변화들이 찾아왔다. 작고 소중한 존재에 대한 '구체적' 감격, 애틋함. 그를 바라보며 샘솟는 '질적으로 새로운' 책임감. 그러나 한편, 현실로부터 10센티 정도 붕 뜬 상태의 생활감으로 줄곧 살아왔던 내게, 출산 및 본격 육아의 지난 90여 일은 현실의 준엄한 중력을 절감케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2. 피로. 우선 육체의 피로. 그로 인한 정신의 아둔함. 마치 '지속-멈춤-다시 지속'이라는 단락과 매듭이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그로 인한 천천한 존재의 균열. 이어지는 시간들. 다시 피로. 육체의 피로. 그로 인한 정신의 아둔함. 존재의 조각들이 하나씩 상실되는 기분. 

3. 말할 필요 없이 내 자식은 아름답다. 나와 아이 사이에 충분한 시간이 축적되지 않았더래도, 이 생명과 마주한 그 최초의 시간부터 우린 흡사 신경망처럼 즉각 연결되어버렸다. 응당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가장 아끼는 것을 당장 내어 놓아야 한대도 전혀 아깝지 않을 존재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문제와 분리되는 이 존재론적 부스러짐이란, 전에 미처 그 폭과 종류를 감히 예상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한동안은 이 당혹감과 살아가야 할 것이다.  






2021. 4. 18.

이시와 탄생

 


2021. 3. 31. 이시와 탄생하다.











2021. 3. 6.

하마구치 류스케의 말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과 만나, 자신의 가치관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체험, 전 그 가혹한 체험이야말로 교류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이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힙니다. 그것이 퇴행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 상처와 균열은 또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 하마구치 류스케





2021. 2. 21.

두 아기, 시와 무무


1. 출산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밖을 향해 밀어내는 아기 힘 자국이 이제는 육안으로 보인다.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출산의 불안 또한 비교할 수 없을 무게로 아내 편이 더 감당해 내고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고작 약간 분의 역할만 하고서는 이런저런 말을 붙여 저 불균형을 무마하려 해왔던 것 같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2. 무무가 슬개골 탈구 판정을 받았다. 일하던 중 아내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아내는 수의사가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동안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곧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반면,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아니 도대체 왜?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산책도 무리하게 시키지 않았고, 줄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음식을 주었고, 미끄러질세라 거실에 카펫도 깔아주었는데 왜 탈구가 온 거야? 

3. 아내는 가슴으로 먼저 받아들였고, 나는 머리로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에도.

4. 우선은 무무에게 수술을 가하지 않기로 했다. 장삿속을 최대한 덜어내고 오직 강아지의 의학적 상태만 살펴 재활 또는 수술을 권한다-고 세간에 평이 난-는 병원을 아내가 어디서 알아냈다. 6월 중순에나 진료를 볼 수 있는 병원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무리되지 않는 산책, 생활습관 개선-가령 두발로 일어서기 금지 등-으로 재활과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2021. 2. 20.

정용준의 일기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 둘을 분별할 지혜를 주소서


모든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시되 

어떤 중독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 정용준(소설가), 문예잡지 Axt 34호 중에서





2020. 12. 31.

2020. 12. 15.

2020. 11. 15.

양수검사, 클라인펠터, 이상없음, 새로운 영토


1.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아내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울먹이는 거 같았다. 침착하자고, 우선은 그것이 무언지에 대해 알아보자고, 각자 가만히 생각을 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다독였다. 전화를 끊고 숨을 몇 번 길게 내쉬었다 마셨다 했다. 검색을 시작했다. 많은 정보들이 있지는 않았다. 

2. 양수검사 전까지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럴 것이, 너무도 건강했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형태적으로 더 없이 안정되어 담당의로부터 줄곧 긍정적인 신호 및 언사를 들어왔다. 아이가 정말 건강하고 활달하고 포토제닉하네요. 물론 그 말들이 부모를 기분좋게 하려는 의도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체감에도 이 아이는 안정화 되어 있었으며, 지난 모든 검사 상 건강을 의심해볼 단서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지난 6개월이 흘러 온 것이다. 그 시간 위에 우리는 부푼 마음들과 여러 계획들을 쌓고 있던 참이었다.

3. 그리고 그날, 양수검사를 한 바로 그날, 1차 결과를 듣게 된 것이다. 양수검사 1차 결과 다운증후군, 파타우증후군, 에드워드증후군에 대한 이상 유무는 정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성염색체의 경우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아 2차 결과 때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는 되물었다. 성염색체가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 현재로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양법을 통해 2~3주의 시간이 지나 정확한 확인을 한 후 이상 유무를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염색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산모님 아이의 경우에는 남아이므로 클라인펠터를 의심해보게 될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아내도 나도 그날은 꼴딱 밤을 지새웠던 거 같다. 인터넷으로 찾고 찾고 또 찾았다. 클라인펠터. 이름도 낯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찾아보려고 했다. 각종 경험 사례들은 물론, 외국 학술논문까지 뒤져 사전을 짚어가며 읽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우선은 두어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5. 최종 결과를 받아들기까지 정확하게 19일이라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19일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이토록 애끓는 심정이 되어본 경험이 없었다. 부모가 아프고, 형제가 곤경을 겪을 때, 혹은 심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고통을 겪을 때 함께 아파한 일은 더러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고통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본 것은 거의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적은 이타심과 많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특히나 생경한 일이었고, 그 혼란을 감당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위안을 준 것은 이 상황을 똑같은 무게로 또렷이 직면하고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출근해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6. 우리는 19일간 그 일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견뎠다.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아내도 나도 그 일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하게 자리하는 일을 앞에 두고, 마치 그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건 앞서 말했듯,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일에 관해라면 운명이 결국 결정할 일이었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견디는 일 뿐이었다. 차분을 유지했던 것은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서라기보다 그게 유용해서였다. 침묵을 깨고 그 일에 관해 언급을 하는 일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었다. 그 일에 관해서는 그저 서로 응원의 눈빛을 주고 받는 일이면 충분했다. 그 밖은 넷플릭스로 본 드라마 이야기나, 수원삼성의 시즌 마지막 경기 이야기나, 무무와 함께 떠날 제주도 여행 이야기로 채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7. 19일이 지나 최종 결과를 받아 든 날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의 감격, 안도, 감사는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직감했다. 우리에게 '모든 염색체 수적 구조적 이상 없음'이라는 최종 진단만큼 중요한 것은 지난 19일간을 견디며 우리가 함께 새로이 들어선 어떤 영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아플 수 있고 우리 자신보다 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존재, 어떤 사건과 처음 만난 것이다. 예측 불능한 상황과 더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과도 더 자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 불가피한 영토로 들어섰음을 직감하며 무거워진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 하나의 존재를 감당하는 것으로도 버거워했던 게 바로 얼마 전까지였다. 가까운 미래에 이처럼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리라고는 그때엔 미처 알 수 없었다.   







2020. 9. 13.

루프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 정신없던 한 주였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밀려드는 일들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겨우 하나의 선을 찾아 간신히 붙들었고 그것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나왔다. 미노타우로스 미궁을 헤쳐 나오는 실타래 같은 한 주였다. 

2. 신선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여전히 외출은 줄여야 함에도 이맘때 찾아오는 싱그러움에 속절없이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 오늘은 삼청동과 한남동 전시들을 둘러볼까 했는데, 결국엔 못했다. 오전엔 교회 점검반 일을 해야 했고, 오후엔 주중 못다 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집에 돌아오니 좀 있으면 수원과 서울의 슈퍼매치가 있을 시각이었다.

3. 하지만 오늘도 수원삼성은 보란 듯이 패배하고 말았다.

4. 아, 어제저녁 아내와 에무시네마 루프탑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아내도 그 시간을 고마워했다.

5. 2019년 칸 영화제 내내 기생충과 더불어 가장 뜨겁던 화제작이었고, 지난 1월 개봉했으나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네이버로 다운을 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한 호흡으로 보아지지가 않았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끊어보았고, 어느 간격은 일주일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하는 게 옳을 터였다.

6. 루프탑엔 바람이 살랑였다. 하늘엔 별이 보였다. 비 온 뒤 기온은 조금 차갑기도 했지만, 준비해 간 경량 패딩의 덕을 보았다.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환경이 아니랄 수 없었다. 초록 동글뱅이 모기향이 타는 냄새. 그것이 만드는 작은 불씨와 연기. 그것들 사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7. 마치 작은 기적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타닥이는 불씨와 살랑이는 바람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와 모닥불 아래 오롯이 따스한 공동체가 되는 자매들의 이야기였다가, 거친 파도와 불어 치는 바람 가운데 곧 다가올 이별을 묵묵히 받아 들고 그 운명을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모닥불 주변에 모여든 축제의 여인들이 내던 공명의 화음처럼, 나는 이 영화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물리적 공간 사이 공명에 대해 생각했다.  

8. 또한 오르페우스의 신화의 변용. 이 여인들은 서로를 끝내 저 심연에 두고 나와야 하는, 서로가 서로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에우리디케가 되어야 하는 스산한 운명을 그저 받아 들었다. 누구를 탓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변혁과 저항의 깃대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운명을 받아 들고 서로를 추억하기로 결심한 저 결단들, 감정들, 그 이후의 삶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온도로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 차갑다고도 할 수 없고 따스하다고도 할 수 없는, 가장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저 응시의 태도에 관해 생각했다.   



2020. 9. 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말


칠흑같은 어둠속에도 시는 존재한다. 그대들을 위해서.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20. 8. 17.

아빠가 된다

아빠가 된다. 기쁘고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던데,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기쁨뿐이다.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걸까. 하여간 이 느낌을 어떻게든 정리해두어야겠다. 달리 좋은 방법을 몰라 캠코더를 꺼내들었다. 스스로 얼굴과 음성을 기록했다. 짧은 생각들과 많은 머뭇거림이 레코드되었다. 생각날 때마다 일기장 삼아 꺼내기로 하였다. 말이 하지 못하는 것은 표정이 할 것이다. 표정이 하지 못하는 것은 침묵이 할 것이다.







2020. 7. 12.

[여행자] 그리고 박원순



1.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작동하는가를 알 수 없을 때 내가 줄곧 떠올리는 영화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다. 신분을 바꿔치기한 남자의 스릴러적인 여정을 담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드라마에 관해 영화는 아무런 관심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로크는 어째서 로버슨으로 살아가기로 한 걸까(현명한 아내가 있고,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명망도 있는 그가 어째서? 더구나 그가 바꿔치기한 로버슨이란 인물이 대단히 매력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뭔가 그가 희구했던 삶의 보장을 가졌다 보기 힘든데?). 이 질문은 영화를 본 모두에게 찾아들 것이나, 영화는 끝내 그것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서사의 찜찜함을 남기지는 않았겠지만 이토록 오랜 걸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이 영화는 로크의 동기를 너무나 무심히, 너무나 뻔뻔히 끝까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태도의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끝내 알 수 없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누구도 이 남자의 동기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로크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죽지 않고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면, 아마 단서가 될만한 몇 가지 정황을 내놓았을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으로 결코 진실을 그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 로버슨으로 살기로 했는지, 왜 목적도 없는 여행을 시작했는지, 우연히 만난 소녀와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아니 처음부터 그런 계획들이 있기나 한 것이었는지, 영화도 모르고 관객도 모른다. 안토니오니 조차도 몰랐(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불가지론의 태도, 부조리의 체념적 수용이야 말로 [욕망], [정사], [붉은 사막], [자브리스키 포인트] 등을 통해 줄곧 견지해왔던 그의 인장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3. 원대한 이상주의자이자 영민한 현실 개혁가였던, 무엇보다 현직 수도 서울의 수장이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그중에서도 [여행자]를 떠올렸다. 그 떠남을 설명할 아무런 동기가 로크에겐 없었지만, 이 남자에겐 (사법상 확정되지는 않았으되) 죽음을 추적할만한 유력한 정황이 있다는 점은 물론 차이로 있다. 아직 장례가 진행 중인 한편, 슬픔과 분노, 추론과 억측, 합리와 비이성이 뒤엉켜 있는 지금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 남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결국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누구에게도 이 사건에 관해 진실로서 단정할 만한 무엇이란 건 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자신, 이 남자의 가족, 이 남자와 함께 했던 사람들, 이 남자로부터 피해를 입었을지 모를 사람들, 이 남자의 가치와 지향을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 했을 그 모두가 패배자로 남게 될 것이란 사실 외엔. 따라서 이런 방식의 죽음은 최악의 방식이란 사실 외엔. [여행자]에서 로크가 인터뷰한 한 아프리카 게릴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을 더 드러낼 뿐, 결코 타자를 더 잘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2020. 7. 5.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



1. 아인이와 재인이를 만났다. 재인이가 세상에 난 지 한 달쯤 못되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8개월 만이다. 그 사이 세상은 거대한 전기를 맞아 둘로 나뉘었다. 이 천진한 것들은 몸집이 약간 불고 자기표현을 좀 더 분명한 쪽으로 내뱉을 수 있게 되었으되, 둘로 나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예쁘고 티 없는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실에 깊은 유감이 들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밥을 다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나서는 길에 아이들은 제게 어울리는 귀여운 마스크를 착용했다.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나는 이 얼굴들을 여러 장 사진에 담았다. 하여간 이 근원적 체제를 생성하고 유지하고 떠받드는 무수한 생활 가운데 있는 한 어른으로서 깊은 죄책감이 들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조용한 바다]를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서였는데, 아인 재인과의 식사가 일찍 끝나, 그 전회차 상영 시각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하게 되었다.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에토레 스콜라)이란 (내게는 듣보잡의) 영화가 상영될 참이었다. 볼까 말까 하다가 열감지 카메라를 통과한 김에 그냥 보기로 했다.

3. 에밀 쿠스투리차 [집시의 시간]과 배창호 [꼬방동네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공간의 설정과 등장하는 캐릭터(도시빈민들)의 인상 때문이다. 앞선 두 영화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그냥 취향에 안 맞아서), 이 영화는 그냥저냥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일단 한정된 공간(도시 중심과 유리된 언덕배기 빈민가)에서 모든 사건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야말로) 혼돈의 가족(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들)만이 등장하여 이 모든 소란을 이끌어간다.

4. [집시의 시간]에 있는 것이 여기도 있었다.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것이랄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정서가 하여간 여기에도 있다. 복잡한 가계도(라 쓰고 개족보라 부른다)도 그것이거니와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서 터지는 B코드 유머(분명 죽었어야 마땅한 아버지가 살아났다!)에 더해 반복되는 몽환적인 음악(지나치게 반복적이어서 한동안 귓전에 맴돈다)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모든 불협화음과 동시에 '사실적'이다. 그래 저럴 수도 있지.

5. 극장을 나서 삼청동으로 걸었다. 학고재 전시를 보고 싶었는데 7시가 넘어 도착해 문을 닫았다. 바로 옆 블루보틀에서 머그잔을 사고 핫초코를 마셨다. 자신들이 생산하는 음료에 자부심이 높은 점원은 나더러 뚜껑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까닭으로 우유와 함께 마셔야 제대로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논거를 달았다.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한 잔의 음료일지언정 저 정도의 단호함과 떳떳함이라면 충분히 그 의지를 따라야 하는 게 맞는 처사일 것이었다.





인생영화 2020



인생영화를 돌아본다. 이 일은 5년에 한 번씩 하기로 한 바 있다. 2015년에 했으니 올해 할 차례가 된 것이다(인생영화2015).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든다. 프랑수와 트뤼포도 그랬고, 마틴 스콜세지도 그랬다. 박찬욱도 그랬고, 봉준호도 그랬다. 감독도 평론가도 아니나, 나에게도 그런 리스트가 있다. 다만 내겐 시대를 초월해 두고두고 여러 삶에 영향을 끼칠 걸작들을 알아볼 눈이 일천하므로, 그저 삶이 어딘가 무력해지거나 잘못되고 있다 싶을 때마다 꺼내보았던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 목록은 걸작의 목록이 아니라, 정서의 치료제 목록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혹은 2020년 오늘, 생활의 지향 내지 지침의 목록이라 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2020. 6. 22.

수원 또 패배


수원삼성의 대역전패를 지켜보면서 매우 참담한 심경이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니지만 패배는 늘 똑같이 쓰리다. 쓰리고, 서글프고, 억울하다. 내가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이 팀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주고 있는가. 불현듯 승패가 없는 세계에 몸을 누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가까이 보이는 무무를 끌어안는 일 외엔 그 즉시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일이 작은 안정을 주었다. 그랬으되 상쇄가 되지는 못했다. 




2020. 6. 7.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2016)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스테레오 영상, 단채널, 약3분, 2016




2020. 6. 3.

드로잉들


George Floyd. 종이에 연필. 2020

명상. 종이에 연필. 2020

그녀의 그녀. 종이에 연필. 2020

그리는 남자. 종이에 연필. 2020

바라보는 남자. 종이에 연필. 2020

봄 나들이 장소 고민하는 아내. 종이에 연필. 2020

소. 종이에 연필. 2020

소녀. 종이에 연필. 2020

바라보는 남자2. 종이에 연필.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