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1.

뒷모습


20161015 결혼식전영상


2009 제주걷기여행


20161015 결혼식전영상


선년생일기념 2009


20161015 결혼식전영상


2009 중동여행


20161015 결혼식전영상



2016. 8. 8.

보고싶음요

 
 
얼른 한국으로 돌아오라 그대
 
 

2016. 8. 5.

허우 샤오시엔에게서 배운 것들



결국 실패하고 마는 일. 인간의 양태를 벗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일. 머뭇거리는 일. 속수무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는 일. 불현듯한 무력감. 어찌해볼 수 없는 회한에 젖어드는 일. 다시 그게 삶이라고 고개를 꾸벅이는 일. 매선 눈으로 먼 풍경을 바라보는 일. 응시. 긴 응시. 뛰어들지 못하고, 바꿔내지 못하고 그저 한없이 바라보는 일. 저 긴 호흡, 느린 걸음. 그 속도만이 자신의 것임을 도리없이 수긍하는 일. 허우 샤오시엔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2016. 7. 28.

결혼


  결혼이란 걸 한다. 가장 많이 사랑하고, 가장 많이 싸운 사람. 저 8년의 시간들. 이제까지완 전혀 다른 층위의 무게가 얹어질 것이다. 뜻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많을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길보다 그 반대의 풍경이 더 자주 드리울 것이다. 그 모든 불안과 혼돈과 두려움 속으로 그러나 기어이 걸어들어가려 한다. 이런 일에 날이 선 설계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 일에 그래왔듯 이번도 또렷하지 않은 채로 뛰어든다. 연애와 결혼은 전혀 다른 일일 것이다. 8년 세월이 쌓은 더깨에 그저 기대볼 뿐이다. 아주 무력하게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 시간 우리는 서로에게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것들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애써 바꿔야 할 상대의 결점과 그저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할 상대의 결점을 구분해온 일. 서로에게서 훈련한 것의 거진 전부는 그것이었다. 결혼이라는 선택. 그 대가로 얻게될 책임의 무게는 지금 다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다시 막연한 믿음을 품을 뿐이다.



2016. 7. 7.

할머니

한 세월 많은 고생을 하셨다. 지금쯤 할아버지를 만나셨을까. 내 결혼식을 너무도 보고 싶어 하셨다. 그 불덩이의 육신으로도. 한 발자욱조차 당신 힘으론 어려우셨으면서도. 애미야 나 안죽어. 안죽을거야. 어머니, 어머니가 왜 돌아가셔요. 마지막 길은 결국 어머니가 배웅해드렸다. 지독한 애증. 가장 큰 슬픔은 엄마에게 들어찼다. 숫제 몸으로 반응이 왔다. 가볍잖은 대상포진이 살갗에 피었다. 며칠째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다. 그날 낮, 우리는 가슴이 무너져 흘렀다. 전화를 부둥켜잡고 엉엉 울었다. 수년만의 연락들이었다. 장례 뒤 형제들은 앞날을 논의했다. 타산은 거기에 끼지 않았다. 그의 아이들도 서로를 찾고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 선물을 남기고 가셨다.

2016. 6. 13.

천지유정, 일개인 몰유동류.



  그가 아낀다는 말을 문득 되새김해본다. 천지유정(天地有情). 일개인 몰유동류(一個人,没有同類). 세상 만물에 사랑이 깃들어 있고, 세상 누구도 서로 같은 이는 없다는 말. 근래 부쩍 까닭 없는 서글픔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애초 심어진 우리 사랑과 고유는 시간과, 삶의 관성과, 세상의 편리 앞에 좀처럼 멀리 피어나기 힘들다는 것. 숙명인 줄 알면서도 그런다. 누구도 사랑을 품고 나지 않은 이 없고, 누구도 오직 하나의 존재로 나지 않은 이 없는데. 그저 휩쓸려 살다보니 제각기 다른 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 같아서, 내가 그들 같아서, 화면 속과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그냥 와락 끌어안고 싶어진다. 단란한 외식 한 번 못해본 꼬마도 안고 싶고, 술주정뱅이인 어느 아버지도 안고 싶다. 멍투성이가 된 여자도 안고 싶고, 자기가 미워 눈이 번진 여자도 안고 싶다. 욕심 많은 어느 기름진 노인도, 손발 다 갈라진 검은 어깨의 농부도 안고 싶다. 감당할 줄 몰라 소비로만 채워내는 어느 금수저 인생도, 평생을 바치고도 영문없이 내쫒기는 어느 실업자도 안고 싶다. 그저 꿈이다.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는 내가 사랑을 서글퍼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일들이 다 무슨 소용이며 무슨 헛짓거리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2016. 6. 11.

뽀미



우리 뽀미 사랑스럽구요







2016. 6. 10.

근조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빈다. 죄스럽다. 내 안의 여성 혐오를, 나는 충분히 들여 보지 못했다.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여동생과 어머니를 아껴온 것은 오늘의 이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임을, 이번 일로 배웠다. 어리석게도. ‘효녀 연합'의 홍승은 씨는 말했다. “혐오는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취급하지 않는 모든 문화를 말한다.” 뛰어난 여성, 치열한 여성을 나는 흔쾌히 받아 들여왔던가. 예쁜 여자, 착한 여자, 얘기가 잘 통하는 여자, 섹시한 여자, 혹은 삶의 경륜이 쌓인 여자 - 범주 밖의 여성들을 나는 진정으로 애정하거나 존경한 일이 있었던가.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반성은 모래에 쓴 글자와 같아서 쉽게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이 다짐 뒤로는 말을 멈추어야 한다. 대신 자꾸 스스로를 응시해야 한다.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수고없이 얻은 것들. 무감하게 취한 편리들. 그들 가운데 나. 남성인 나. 다시 한 번 희생되신 분의 명복을 빈다.

2016. 5. 21.

노파의 향


한낮. 노파가 저만치 앞질러 갔다. 따를 수 없는 잰걸음이었다. 무슨 일일까. 걸음을 따라 특유의 향이 이어졌다. 코끝이 매캐했다. 죽음에 가까워진 냄새로구나. 불경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말도 아니었다.

모든 아이는 달큰한 향을 풍기며 태어난다. 어미 젖의 향, 제 품은 순결의 향. 생각해보면 향이 없는 것은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향이 있다. 시절에 걸맞은 향내를 바꿔 풍기다, 다만 언젠가 병들고, 언젠가 떠난다. 향. 육신의 향. 심령의 향. 나는 어떤 향을 풍기고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땀내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백 번의 관념보다 한 번의 노동이 새겨지기를. 되도록 거친 손과 그을은 살결을 갖게 되기를. 그렇게 시큼한 노동의 향내가 내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나 구호를 삼는 일은 그것이 턱없이 부족할 터이기 때문이다. 노파의 향을 따르며, 나는 내게서 땀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러웠다. 그것도 몹시. 저 향도 언젠가는 내것이 될 것이다. 그때라면 좀 덜 부끄러운 일이 될까. 노파의 향은 매캐했으되, 불쾌하지 않았다. 떳떳한 죽음의 냄새였다.


2016. 5. 20.

여자친구


그녀는 여행을 갔고 나는 남았다. 창 너머 앉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나도 그녀도 먼 거리를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버스는 떠났다. 청소를 하고, 짐을 꾸리고, 투표를 하고, 그리고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우리 둘 중 우리가 잠들어버렸다는 걸 인지한 이는 없었다.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서야 잠을 깨었고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어떡해,를 읊어댔다. 나는 우리에게 단 1초라도 줄일 방법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답은 없었다. 무조건 뛰었다. 신호를 무시했고 경적 소리도 무시했다. 저 편에 기적처럼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버스는 그녀를 날름 삼키고는 문을 닫았다. 저만치 사라졌다. 허리를 굽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한 시간 쯤 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속을 밟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잘 다녀올게. 사진 많이 찍어와. 전화를 닫았다. 한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탔다. 그 중엔 중국인 가족이 있었다. 너 댓살 쯤 먹은 막내가 엄마 허리춤을 끌어 당기며 칭얼댔다.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는 스마트폰 게임에 몰두해 들었다. 不出, 可入 따위 글자들이 화면에 큼지막이 떠올랐다. 한동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궤도 소리가 둔중했다. 풍경이랄 것도 없는 어두운 것들이 스쳐 흘렀다.


2016. 5. 1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말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소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중에서
 
 나는 예술 그 자체에 관하여 또는 예술의 사명에 관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삶 자체이다. 삶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정말로 본질적인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술가로서의 과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더 중요히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문명이 처한 상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역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 각자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뛰어난 인물들‘, 통치차들, 종교 재판관들이 설치는 역사적 단계는 우리 시대로 끝나간다는 인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행복을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서 우리의 삶을 함께 바꿔내자는 주장을 펴 왔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망각했으며, 이 개성은 보편적 역동성 속에서 상실되어 버렸다. 인간은 인류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이해는 망각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구심점을 이루는 고유한 존재라는 인식, ’나‘ 자신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결심과 막대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는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다. 그에 반해 순전히 물질적인 것들은 제도적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우리들 삶의 근거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의 삶은 경화증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마비 증상의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에 가담하고 발전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인간의 행동과 인간의 운명 사이 상호 연결 관계가 상당히 심각하게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분리가 현대인의 자의식을 불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자기 자신은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스스로를 여긴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환경의 강제를 받아왔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운명에서 결국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는 숙명적인 감정을 가슴 한켠에 품고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하여야만 한다. 고통, 그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자신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악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소유한 힘으로부터 오는 것도 인간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 공동체를 위한 담보도 아니고 사회적 조화의 현상도 아니다. 예술은 일종의 사랑 고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우리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 얽매여 있다는 자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고백이다. 예술은 삶의 본디 의미를 표출해주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며 사랑이고, 희생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

2016. 5. 11.

곡성


[다우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장 수녀는 흐느껴 운다. “아직도 의심이 들어요. 의문이 든다고요.” 순백한 젊은 수녀는 함께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감싼다. 사태는 이미 종결됐다. 그녀가 그토록 의심하던 플린 신부는 쫒겨났다. 그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곡성]이 공포스런 이유는 거기에 광기나, 피칠갑이나, 좀비, 악마, 혼령이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차라리 가장 깊은 곳에서 스멀대는 도저한 무력감 때문이다. 이 지옥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을 기어코 직시시키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도, 판단하지 않고도, 이론과 종교와 과학 따위에 의탁하지 않고도, 인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않고도 이 세계를 견뎌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질문을 던진 채 끝을 맺지만, 관객은 한 켠에 묵시록적인 대답을 안고 돌아간다. ‘아니, 전혀.’ 오늘만도 나는 한 동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다. 그에 대한 평판이 있었고, 나는 그 평판 위에서 그의 작은 실책을 보았다. 확대경에 찍힌 사진처럼 그 장면은 머리에 남았다. 이토록 얄팍한 인식과 감정, 그리고 믿음이라니. ‘당신들은 아마도 계속하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곡성]은 말하고 있다. 

곡성


1. [곡성]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기 전 막연히 [소서러], [지옥의 묵시록] 류의 괴이한 처절함과 [사이비], [안개마을], [이어도] 류의 폐쇄 공동체적 광기와 음산함이 적당히 뒤섞인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다. 보기 좋게 희롱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레퍼런스를 쉬 대입하기 어려운 영화다. 강력하고 심오하며 정직한 영화다. 활짝 열린 창과 같은 영화다. 우리 사고와 행위가 추동되는 바탕인 믿음의 실체에 관해 질문하는 영화다. 자기 현시적 테크닉으로 일관하고 언뜻 심오해보이는 주제를 얄팍히 분칠한 어떤 경향의 영화들은 [곡성]을 보고나면 생각할 지점들이 많아질 것이다. 기분좋은 희롱을 경험한 관객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2(추가). 역대급의 해석들과 갑론을박이 쏟아질 작품임은 극장문을 나선 이라면 누구나 직감했을 터다.(물론 이 영화를 더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 한 해. 상당히 많은 수가 객석을 퉁명스레 털고 일어났다.) 개봉 첫 날임에도 반응은 역시 뜨겁다. 누가 누구의 편이냐, 누가 누구와 대립했느냐가 주된 논쟁의 양상인 거 같다. 감독이 ‘특정인과 특정인이 한 패'라는 식의 유권해석을 어디선가 흘린 모양인데(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누구와 누구가 진짜 악마였어,로 (아직까진) 논쟁이 쉽게 귀결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를 넘어선 매우 다층적인 고민거리를 안긴다. 누가 악마여도 좋고 누가 악마가 아니어도 좋은 지경까지 간다. 모두가 악마가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믿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 그 자체에 관한 징그러운 탐구. 그 끝에 도달한 곳은 거대한 무력감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영문도 없는 불행과 무력감. 영화 전체가 거대한 현혹(환각)이라고 느꼈다. 그 느낌에 관해 언젠가 정리해보고 싶다.   

2016. 4. 16.

노란 리본


1. 많은 것은 없는 것이고, 어디나 향하는 것은 아무 곳도 향하지 않는 것이다. 돌볼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곁으로 들이자. 그 밖의 것들은 과감히 쳐내는 것이다. 상처를 주게 되더라도, 도리어 제가 아프게 되더라도. 관계도, 소유도, 다른 모든 일들도. 스스로에 주문하는 말.

2. 그 분이 떠나셨다. 인사를 남기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 분을 좋아했다. 그 분은 솔직했고, 유머러스했다. 그 유머는 그 분의 것이었다. 내가 느낀 그 분은 그랬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고,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다. 비대면 관계를 불신하는 옛 사람이나, 그 분의 흔적을 기다리는 일에는 낯섦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떠나셨다. 뜻하는 생활 이어가셨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할 때도 너무 힘들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감사했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3. 작년 여름의 일이다. TV를 보다가였나.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의 옆 침상을 쓰고 있던 그 분은 상인이었다. 그 분은 저 놈의 세월호 때문에 장사 다 망해버렸다면서, 쫄쫄 굶게 생겼다면서, 제발 좀 저 특별법인지 지랄인지 하는 일들 좀 싹 다 관둬버렸으면 좋겠다고, 수분이나 목청을 높였다. 나는 무얼 했을까. 어떻게 반격을 해야하나 생각했을까. 아니. 병실 가득 그 분의 침이 차오르는 동안, 나는 내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바라보았다. 저 리본을 저 분이 보게 될까를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이튿날 재차 병실을 방문할 때, 가방엔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세월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내게 추모의 날이 아니다. 이 날의 비겁함과 나에의 혐오를 다시 떠올리는 날이다.


2016. 4. 10.

타인의 진심은 타인의 것


1. 타인의 진심을 함부로 의심할 권리가 제게 있다는 이상한 믿음에서 세상의 많은 폭력은 빚어진다. 나의 진심이 나의 것이듯, 타인의 진심은 타인의 것이다. 표현된 진심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방에서 따져볼 일이다. 그 입증 책임을 타인더러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다. 

2. 사랑에 관해라면 어설픈 카운슬링 백 번 듣는 것보다 [아노말리사] 한 번 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3. 테라스에 앉아 꽃을 본다. 벌들이 꿀을 빤다. 꿀 빨고 앉아 있다. 이 꽃, 저 꽃을 쉴새없이 오간다. 잠깐 머무는 꽃, 오래 머무는 꽃. 참도 부지런하다. 꿀 빨고 앉아있다,는 말을 듣기에 저들은 너무 필사적으로 산다.


2016. 4. 3.

불면의 밤



차례대로 [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


  기자가 물었다. “아직까지 거리를 지키시는 이유가 뭐죠?” 여인이 대답했다. “제 영혼 하나만큼은 지킬 수 있으니까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가 일었다. 세계 경제를 파탄에 몰아 넣고도 저들은 숨어 배당금 잔치를 했다. 하지만 분노는 영원할 수 없었다. 동력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갔다. 하나 둘 거리를 떠났다.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단지 한 줌의 사람들만이, 그러고도 한동안 거리를 지켰다.

아무리 싸워도 승산이없다 직감할 때,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어 줄 수 없다 의지케 되는 한가지는 ‘자기 영혼'이다. 그래 이거라도 지켜내자. 이 간신한 불씨마저 사그라진다면 내 삶도 함께 끝장나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과 한둘로 특정할 수 없는 일상의 적들 앞에, 우리는 마지막 구원처로 '내 안의 평화'를 희구한다. 그렇게 회사를 견디고, 연애를 감당하며, 아이를 키운다. 이 길의 궁극엔 타인마저 불필요하다. 결국 '내가 있고, 남이 있다’. 단지 삶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수행을 찾고 닦아야 하는 길을 걷는다. 모두는 얼마간 구도자가 된다.

  차이밍량의 승려 3부작-[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은 구도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붉은 천을 두른 승려가 있다. 그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걸음이 매우 느리다. 아주 간신히 한 걸음씩을 뗀다. 어찌나 그 속도가 느린지 단 열 개의 계단을 밟는 데 5분의 시간이 걸린다. 저 이름 각오했다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얼이 빠질 무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승려의 곁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그를 흘끔거리거나 무시한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열차가 지나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려는 한결같다. 시종 정지화면에 가까운 한 걸음을 겨우 내딛는다.

그는 지금 수행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왜 하필 타이페이 한복판이란 말인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도시의 일상과 붉은 천의 승려를, 지독한 차이로 대비해 보여줄 뿐이다. 이게 [행자]라는 영화의 전부다. HDV캠으로 찍었고, 조명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폰으로 찍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서유]는 배경만 달라질 뿐(프랑스) [행자]와 똑같은 영화다. 똑같은 승려가 똑같은 걸음을 걷는다. 서양 사람들이라서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똑같이 무시당하고 이따금 흘깃거림을 당한다. 군중 속의 (광대 같은) 수행자. 차이밍량은 무슨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군. 세상의 선호와 가치와 속도가 무엇이건 자기의 걸음을 걷는 사람의 이야기. 간편한 해석이기도 했고, 손쉬운 교훈이기도 했다. 다르게 볼 여지가 크게 없는 영화이기도 했다. (정말 위에 나열한 장면들이 전부인 영화다.) 동시에 일상의 수행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보였다. 지독한 세계를 살아내야 하는 건 당신들입니다. 이 승려를 스치지만 마시고 얼마간 무언가를 느껴보십시오. 차이밍량의 주문이 들리는 듯했다. 말하자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김민희가 말했던 ‘루틴’같은 것. 그녀는 매일 화실에 나간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곧 망해버릴 것 같”다고 했다. 승려의 걸음은 곧 나의 루틴을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러나 [무무면]을 보고 말았다. 이 영화에도 역시 똑같은 승려가 나온다. 똑같은 붉은 천, 똑같은 느린 걸음. 그러나, 세 번째 장면부터, 앞선 두 영화와는 전혀 새로운 영화가 된다. 화면 가득 지하철의 창 밖이 차오른다. 타이페이의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쉴새없이 스쳐 흐른다. (이 연작에선 물론이고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에서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속도감이 몇 분 간 지속된다. 화면 밖에선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일상음도 들려온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승려의 시점쇼트일 것이다. 승려는 그 긴 수행을 마치고 지금 ‘퇴근’하는 길이다. 무려 세 번째 영화 만에!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모두 24시간 사우나에서 벌어진다. 승려는 발가벗고 탕에 지친 몸을 누였다가 사우나로 들어간다. 스키니한 몸매의 한 청년이 나오지만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여자가 사우나 수면실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고,(이 장면은 물론 뜬금없다. 그러나 어찌나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길게 담아내는지, 보는 사람이 다 긴장이 되는 지경이 된다.) 드디어 승려가 수면실로 들어온다. 몸을 누이고 이불을 끌어 당긴다. 그도 잠에 들지 못한다. 무무면(無無眠). 영어제목은 No No Sleep이다. 눈은 감았으되 잠에 들지 못하는 승려. 그는 끝내 잠들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앞선 두 영화([행자], [서유])에서 나는 희망과 교훈을 읽었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빛을 지키는 일. 이 지독한 세계에서 우리가 죽거나 아주 나쁘지 않고 그런대로 살아나가는 일이, 저마다의 수행과 구도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보았다. 두 편을 보고 났을 때는 뭔가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고, 일상에 복귀해서도 그 에너지를 나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무무면]은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앞의 희망들을 처음부터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세계는 이토록 시시각각 어두워지는데, 우리는 정말 어디까지 싸워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였다. 승려가 지하철 창 밖으로 보았던 세계는 그의 지난 수행을 완벽히 무력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가공할 힘의 세계였다. 수행은 그토록 지난하고 어려운데, 폭력은 너무도 빠르고 간편하다. 언젠간 편한 잠에 들 수 있을까? 내 영혼 하나만이라도 건져낼 수 있을까?


추신 : 세 영화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2016. 4. 2.

허우 샤오시엔의 말






 작품의 형식, 스타일에만 골몰하지 마세요. 예술엔 정도가 없습니다. 주변의 일상 관찰을 통해,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만의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독창성의 근원입니다. 독창성은 다른 무엇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고 무엇보다 자기의 힘으로 느껴야 합니다. 통찰을 얻게 되면 내가 본 것과 느껴온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독창성은 그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큰 예산은 필요가 없습니다. 뭐든 정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장비란 아무거나 써도 괜찮습니다. 뭐든지요. 우리 주변의 누구나가 할 수 있어요. 지금의 영화는 과거와는 달라요. 제도권, 비제도권을 나눌 필요도 없어요. 할리우드 같은 거대한 시스템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건 정말 괜찮아요.
  영화는 내가 자라고 생활하는 곳에서 나옵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애착을 갖는 사회, 사람, 사물, 관계, 분위기 같은 것으로부터요. 대만은 특히 생동감이 넘치는 사회잖아요? 대립 세력 간의 마찰 같은 뒤틀린 이야기도 많고,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젊은 세대들 뿐아니라 부모들에게도요. 어떤 이야기든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 분쟁, 패배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극적이어야 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대만은 굉장히 독특한 곳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표현하려는 창작자들의 노력이 줄고 있죠.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 허우 샤오시엔, [자객 섭은낭] 칸 영화제 수상 후 귀국 기자회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