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22.

수원 또 패배


수원삼성의 대역전패를 지켜보면서 매우 참담한 심경이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니지만 패배는 늘 똑같이 쓰리다. 쓰리고, 서글프고, 억울하다. 내가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이 팀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주고 있는가. 불현듯 승패가 없는 세계에 몸을 누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가까이 보이는 무무를 끌어안는 일 외엔 그 즉시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일이 작은 안정을 주었다. 그랬으되 상쇄가 되지는 못했다. 




2020. 6. 7.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2016)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스테레오 영상, 단채널, 약3분, 2016




2020. 6. 3.

드로잉들


George Floyd. 종이에 연필. 2020

명상. 종이에 연필. 2020

그녀의 그녀. 종이에 연필. 2020

그리는 남자. 종이에 연필. 2020

바라보는 남자. 종이에 연필. 2020

봄 나들이 장소 고민하는 아내. 종이에 연필. 2020

소. 종이에 연필. 2020

소녀. 종이에 연필. 2020

바라보는 남자2. 종이에 연필. 2020

2020. 5. 31.

침묵과 응시의 예술


1. 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침묵이다, 언젠가 김수영의 이 말에 밑줄을 그으며 떠올렸던 것은 시네마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게 있다면 그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2. 이미 너무 많은 서사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일상대화에도 뉴스에도, 문학에도, 역사에도, 무대에도, 정치에도. 그래왔고, 그럴 것이었다.

3. 허우 샤오시엔, 위라세타쿤 아피찻퐁, 차이밍량, 로베르 브레송, 칼 테오드르 드레이어 등. 몇 이름들만을 남겨두고, 갈수록 나는 영화에서 점점 애정을 거두어 왔는데, 시네마의 본령이란 서사의 실어나름과 거의 무관한 일임에 관한 생각을 얻고부터였던 거 같다.

4. 침묵의 예술. 응시의 예술. 이미지의 운동과 사운드의 진폭만으로, 그저 사태를 '바라보기'만 할 뿐으로 저 깊은 곳에 가닿는 작업들. 관객 스스로가 그 심연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도록 이끄는 예술들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더해갔다.

5. 시네마와 미디어아트의 경계는 점점 흐려가고 있을 것이나, 아직까지 적잖은 수의 시네마와 미디어아트가 서사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6. 국립현대미술관 [수평의 축]展에 다녀와 (시그니처 작품이랄 수 있는) 리사 아틸라의 미디어 작업을 보면서, 깊은 감동으로 이끌린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촬영된 한 그루의 나무를 다채널 분할화면에 담아 동시에 영사하는 방식의 작업이었는데, 무엇보다 나는 이 작업에 담긴 작가의 '무심한 태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7. 앞서 언급한 바,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서사 강박은 주로 인터뷰의 형태, 추상적이고 자기현시적인 내래이션으로 반복 재생산 되어지고 있다. 그런 작업들은 이미 너무 많다. 많기도 하거니와 그 이야기란 걸 잠자코 들어보면 하나마나한 소리이거나 작가 자신의 세계안에서만 수용되고말 뿐인 언어의 나열인 경우가 대부분임을 어렵잖이 알아챌 수 있다.

8. 보는 이가 스스로 그 작업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작가는 그 발들임의 문간에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서사들, 너무 많은 언어의 나열은 (내 생각에) 좋은 예술이 할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그런 예술은 관객과 예술이 관계맺는 과정에서 관객의 자기창조를 가로막고 무력감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9. 그러니 시편이든 시네마든 회화든 설치든, 앞으로도 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는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침묵하고 있는가'이며 그 침묵과 응시의 사려깊음 만큼이 그 예술의 깊이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 5. 9.

남화연 [마음의 흐름]



1. 남화연은 최승희의 무엇에 그토록 이끌렸던 걸까. 2012년부터 근 10년을 아카이빙 해왔고, 그 흔적의 나열이 이번으로 벌써 수차례라 한다.

2. 나 역시 많은 예술가들을 동경해왔고, 그중엔 여전히 삶의 지침으로 삼는 이들이 몇 있다. 마음이야 그러므로 헤아릴 듯하나, 남화연처럼 한 인물과 그 삶에 대한 꾸준한 들여봄과 수집행위로서 자신의 창작을 이어가는 사례는, 내 경험과 이해가 일천한 탓인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다.

3.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신기했다. 최승희가 누군지, 남화연이 그의 무엇에 그토록 사로잡혔는지는, 실은 내게 그다지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한 작가가 자신의 작업세계를 채워가는 이같은 방식과의 만남이 의미라면 의미가 될 터다.

4. 오브제들을 부러 이쪽저쪽 방향으로, 높낮이를 위아래로 달리해가며 배치한 방식이 재밌었다. 그러니까 작업들을 찬찬히 들여 보려면 몸을 많이 움직여야만 했다. 누군가가 관람객들을 버즈아이뷰로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남화연과 최승희가 봤다면 흡족해했을지 모를 장면이라고도 생각했다.












2020. 5. 6.

너무많은재난들


너무많은재난들. 종이에 연필과 마카, 오일파스텔. 2020

너무 많은 재난들이 속절없이 흘러다닌다. 재난이야 늘 존재했지만, 이토록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며 당사자성을 확인시키는 류는 좀처럼 마주하기 어려운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이 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못할 심리적 재난이라면, 작금의 재난은 그야말로 피부와 호흡, 생식과 감각의 재난이며, 사태의 종식과 무관히 습관으로 새겨질 실존의 재난이다. 삶을 가까스로 버티어 선 사람들이 보이고, 버티어 서려다 대롱대롱 끝내 저 아래로 추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너무 많은 재난들. 이 가운데, 38명의 근로자들이 집단으로 불에 타 죽었는데, 그것쯤은 그냥 흘려보내도 어쩔 것인가의 생각들이 있다. 수십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온라인 강간에 가담했는데 어쨌든 나완 무관한 일이 아닌가 빗어 넘기려는 태도들이 있다. 너무 많은 혐오들, 너무 쉬운 구별짓기.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재난들, 재난들, 재난들. 


2020. 5. 4.

장 르누아르의 말



"그러므로 우리들은 추억의 마법에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변해버린 세계의 지옥 속으로 단호하게 뛰어드는 일이다. 그것은 수평적으로 분할된 세계이고 실용적인 세계이며 열정이 사라진 세계임과 동시에 향수도 사라진 세계이다."

- 장 르누아르,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중에서



2020. 4. 5.

천변풍경, 함미나 [Idleness]



1. 무무를 데리고 동네 천변 산책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벚꽃은 잘도 흩날리고 있었다. 저들을 (포함한 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결국 고통받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사라진다면) 자연은 언젠가 제 모습으로 회복해갈 것이다. 오직 사람이, 그 안에서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오염으로 신음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더 매정하고 무서운 것이다.

2. 무무의 천연한 눈망울은 그것이 자연의 편에 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3. 함미나 [Idleness] 전에 다녀왔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혼돈의 심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작가(가 대변하는 시대의 얼굴들)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널 쏴 죽이겠다'라고 했다가, '깨어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가, '자살의 풍경'을 먼발치서 바라보다가, 다시 '널 쏴 죽이겠다'라고 한다. 도리 없는 분열증의 상황. 타깃은 과연 찾아낼 수 있는 걸까. 좌절과 불안은 고스란히 이들 몫이지만, 그를 생산해낸 건 이들이 아니다. 명징한 적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적은 여전히 특정할 수 없으며, 그 힘은 가공할 수준으로 더욱 비대해간다. 으스러진 머리, 흘러내리는 얼굴은 이미, 쏘려고 총을 든 자의 것이다. 무얼 쏘겠다는 걸까. 무얼 쏠 수는 있는 걸까. 









2020. 3. 31.

Carved&Flow_3




Carved&Flow_3. 캔버스에 연필과 오일. 2020





2020. 3. 22.

아내 노트북, 아빠 면회, 라자스탄의 우물, 김민지 개인전


1. 아내의 노트북을 주문했다. 지출이 조금 있던 달이었는데, 때마침의 성과상여금이 숨통을 좀 틔웠다. 글로 벌어먹는 사람이 2013년식 중고노트북으로 퍽 오래 버텼다. 그 노트북도 응당 제 일과 쓰임을 다했다. 모두에게 아쉬움 없는 이별과 맞이라고 생각했다.

2. 아버지는 수술 후 조금씩 걷기 시작하셨다. 우리 모두 아빠의 움직임에 탄식을 보냈지만, 척추 고장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드라마틱한 결과와 만나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여도, 당장의 불안과 고통을 얼마간 덜어내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자식 도리를 약간분이라도 해낸 것 같아 뿌듯하고 다행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3.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라자스탄의 우물]전을 보았고, 청와대앞길을 따라 삼청동을 걸은 다음 갤러리 조선에서 김민지 개인전 [문제적 장소]를 보았다.

4.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두 전시가 '멀어진 장소에 대한 아카이빙'이라는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쪽이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을 좀 더 모아놓고 있었다면, 한쪽은 '잊혀지고 말 것을 붙들기로 한 결심의 흔적들'을 다만 좀 더 모아놓고 있었다.














2020. 3. 15.

카페



1. 북촌 쪽 갤러리들을 둘러볼까 나섰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 동네 카페로 몸을 숨기듯 들어왔다. 

2. Flaming Lips의 [King's Mouth]를 오전부터 귀에 꼽고 있다. 세 바퀴째 돌고 있을까.

3. 아버지의 허리 수술과 무무의 중성화 수술이 공교롭게도 한 주에 있었다. 두 사건은 이후 우리 가정에 각기 얼마간의 변곡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4. 옆 테이블의 커플이 마주 앉아 각자의 독서를 하고 있는데, 저 장면을 흘깃 바라보노라니 괜스레 내 마음이 따뜻하고 노르스름한 것으로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5. 오랜만에 흑당의 맛이 그리워져 블랙슈가라떼를 시켰는데, 허 참, 에스프레소가 안에 안 든 거다. '카페'블랙슈가라떼를 시켰어야 했던 건데 평소 뜨아나 바닐라라떼 밖에 좀처럼 사먹질 않아선지, 카페에서라면 (곡물 라떼나 과일 음료가 아닌 한) 에스프레소는 기본으로 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 자리했나보다. 전혀 의심없이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가 메뉴판을 다시 돌아보고서야 이를 깨닫게 되었다.  



2020. 3. 12.

Carved&Flow_2



Carved&Flow_2. 캔버스에 목탄과 오일. 2020




2020. 2. 29.

Carved&Flow_1



Carved&Flow_1. 캔버스에 오일. 2020


2020. 2. 25.

무무, 코로나 휴관


1. 나는 우리 무무를 너무나 사랑한다. 이 작고 여린 것이 세상에 바라는 것이라고는 오직 산책과 간식, 주인의 애정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문득 눈물이 핑 돈다. 이 작은 생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한없이 추잡하고 간교하고 제멋대로인 채라는 생각이 든다.

2. 한국영상자료원,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같은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씨알콜렉티브, 대안공간루프, 서울아트시네마, 아트선재센터, 송은아트큐브 등등과 같은 민의 영역에 있는 전시장들마저 코로나 탓에 모두 휴관이라고 하니, 이게 무슨 기이한 풍경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전례없고 초현실적인 상황들의 연쇄가 퍽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일종의 길티플레져) 

3. 주말+당직휴무 뒤에 오랜만에 출근했더니, 이게 웬일인가. 일이 재밌다.(응?) 허허.

4. 다시 저 작은 생명체를 바라본다. 가진 것도 없지만, 약간 분이라도 있다면 그마저도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정말 없어서 그럴거야.)  



2020. 2. 23.

코로나19, 강박x강박(강박²)



1. 3년째 다니는 미용실인데 오늘 같은 한산함은 처음이었다. 두 명의 종업원과 한 명의 디자이너 겸 매니저 그리고 나의 머리를 만져주시는 원장님 사이에서, 침묵의 30여분을 보냈다. 코로나의 여파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이는 도구 트레이를 정리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스마트폰을 까딱이고 있었다. 모두 적당히 불안하고 적당히 무료한 얼굴들이었다. 원장님만이 특유의 힘 있는 가위질을 이어갔다. 가위날 부딪히는 쇳소리가 찹찹찹 유난히 크게 들렸고, 노르스름 익은 오후 두시 반의 햇살은 통유리를 통과하며 더 깊고 넓게 퍼져 실내를 적시고 있었다. 

2.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엘 갔다. 대한문 앞에도 사람이 없었고, 인근 상가엔 숫제 영업을 쉬는 점포들이 몇 군데 보였다. 손에는 마끼아또 한 잔이 들려 있었다. 우유 냄새가 너무 진했고, 결국 나는 다 마시지 못한 채로 그것을 휴지통에 던졌다.

3. [강박x강박(강박²)] 전을 보았다. 뉴 미네랄 콜렉티브, 우정수, 오메르 파스트, 차재민, 정연두, 김용관, 이재이, 김인배, 에밀리아 스카눌리터의 순으로 그들의 작업을 둘러보았다.

4. 가장 오래 발길을 머문 곳은 오메르 파스트의 영상 작업 [5,000 피트가 최적이다]에서 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이 작가가 미디어를 다루는 방식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여기에도 여느 미디어아트처럼 인터뷰가 있고, 작가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랐(다고 느꼈)던 것은, 이것이 철저하게 '극영화'의 논리와 문법을 따르고 있었던 부분이다.

5. 그러니까 사건이 있고, 인물이 있었다. 인물의 감정이 있었고, 그 감정을 (우리로 하여금) 살피도록 돕는 부수의 캐릭터들이 있었다. 쇼트를 잘게 나누었고(인터뷰이가 중간중간 휴식차 복도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 장면은 정면-리버스-정면-리버스 쇼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운드의 활용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복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필름라이크'한 화면의 톤으로 찍혔다. 아마도 레드원 같은 기종으로 디지털 촬영을 하였을 테지만, 몇몇 장면은 필름으로 촬영하였다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큼 어떤 특유의 물성과 질감이 보유되고 있었다.

6. 그래서 이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나 스스로에게 들었지만, (허무하게도) 이렇다 할 뾰족한 대답을 찾아내진 못했다.   

7. 다만 하나의 얇은 발견이라면, 근래의 미디어아트들에서 내가 줄곧 느꼈던 피로감을 이 작업에서는 거의 느낄 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연히 들어간 전시실에서 나는 30분짜리 극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기분이 들었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선명히 수용할 수 있었으며, 한동안은 그 질문을 받아들고 나름의 생각을 하느라 다른 작품, 작업들에는 건성의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8. 미디어아트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디어아트 고유의 논리, 그러니까 (극적 구성을 뒤로 두고) 감각과 감정의 원체험으로 단도직입해 들어가는 그 방식이야말로 곧 순수 미술적이며 그것이 미디어아트의 본령과 같다는 생각에는 그다지 흔들림이 없다.

9. 내 안에는 줄곧 (나름의 논리와 근거로) 미디어아트와 시네마 사이의 어떤 구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만 이제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이 작업에 발길을 두는 동안 무겁게 찾아들었다. 

10. 돌담길을 따라 시청역으로 되돌아 나왔다. 담벽에 묻은 햇살을 2g폰카로 찍었다. 요즘 카메라를 따로 들고 다니지 않고 2g폰카로 찍어두는 일이 늘었는데, 생각보다 이 느낌이 괜찮기 때문이다. 선예도가 떨어지고, 빛도 살짝 바랜듯한 화상이, 어쩐지 똑딱이 필름의 느낌을 닮은 것도 같다. 









2020. 2. 5.

부서 이동, 김하나 개인전, 19회 송은미술대상전



1. 부서 이동을 했다. 옮겨 온 부서와, 떠나 온 부서의 송환영식을 모두 마쳤다. 이젠 정말 친정집을 나선 기분이다. 

2. 이전 부서에서는 야근이 전무했다. 새로 옮긴 부서에서는 칼퇴가 전무하다. 그러나 그런대로 이 조건과 환경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3. 주말 숙직을 서고 당직 휴무를 얻었다. 월요일에는 갤러리들이 대개 문을 닫는다. 송은아트스페이스와 송은아트큐브는 월요일에도 나직한 꾸준함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19회 송은미술대상전을 아직 보지 못했던 터라, 다소 무거운 몸이긴 했으되 그곳으로 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호선을 잡아타고 삼성역으로 갔다.

4. 송은아트큐브에서 김하나의 개인전을 먼저 보았다. [Beau Travail]라는 제목이 붙은 전시회인데, 아마도 클레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에서 가져온 것일 터이나, 그 영화와 김하나의 작업 사이에 별 상관성은 없어 보였다. 

5. 하지만 김하나의 작업은 너무도 좋았다.

6. 구식 인간이라 그런가, 나는 스마트폰도 어지럽고, 전광판의 현란함도 어지럽다. 2g폰을 쓰고, 수첩을 들고 다니는 건 내가 대단한 탈스마트 철학의 수행자라서가 아니다. 그저 어지럽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는 그냥 어지럽다.

7. 그래서, 작금의 범람하는 미디어아트 작업들을 둘러보다 보면, (나 스스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피로감 같은 것이 몰려드는 것이다. 차이밍량의 [서유]같은 작업이나, 위라세타쿤 아피찻퐁의 실험영화 같은 것들은 동시대 미디어아트임에도 (도리어!) 일종의 안정과 고요를 준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드물다. 근래 만난 작가들 대다수의 작업들에서 나는 (종류도 다양한) 여러 피로감과 마주해야만 했는데(이상하게도 김희천 [탱크]는 예외다), 바로 이런 사정들 탓에 나는 다시금 평면회화의 자리로 이끌리는 것만 같다. 

8. 김하나의 작업은 평면회화의 원점과 미래를 동시에 탐구하려는 작가 자신의 고유한 투쟁으로 보였다. 총 열한 점의 작업들 사이를 천천히 오고 가며 나는 풍요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 같은 걸 얻었다.

9. 그 여운을 품고 송은아트스페이스로 걸음을 옮겨 19회 송은미술대상전을 보았는데, 미안하지만 하나도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수백 점의 포트폴리오 가운데서 엄정히 선별된 네 개의 작업들"이라는데, 전시장을 도는 내가 다 그 문구에 무안을 느낄 지경이었다. 

10. 다만 차지량의 솔직한 고백에는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11.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하나의 전시장에서 받은 도록을 다시 펴 보았다.









아래는 차지량의 설치(고백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