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4


1.
  그녀의 이름은 수잔. 스팟에서 영화 교육과 각종 부대행사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올해로 벌써 12년 째. 그녀는 친절히도 그간 내 일을 돌봐주었다. (여름 방학과 가을 학기 개강 준비 탓에) 눈코 뜰새없이 바쁠 것임에도. 너무 감사했다. 타이페이에 이른 뒤 그녀부터 방문했다. 파리바게트 엿 상자를 선물로 건넸다, ‘코리안 트레디셔널 캔디’라 이름을 꾸몄다.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였다. 고마운 사람은 나였다. 민망했다. [섭은낭] 첫 상영이 시작될 참이었다. 티켓을 받아들고 극장에 들어섰다. 100명 남짓 수용 가능한 공간이었다. 자리를 찾아 앉고 눈을 감았다.얼마나 기다려왔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였다. 좌석까지 좇아 와 이런 저런 선물을 건넸다. 허우 감독 특집호 잡지, 뱃지, 파일, 노트, 엽서 등등. 실례지만 그 장면은 엄마 같았다. 신경을 모아 하나하나 건네던 그 두툼한 손. 깊은 푸근함을 느꼈다.

  다시 만나기로 한 건 나흘 뒤. (스팟 안에 있는)‘카페 뤼미에르’에서였다. 벌써 두 시간 째 그녀의 퇴근을 기다렸다. 어쩌면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그만큼 바빠 보였다. 여자친구는 오랜 기다림의 짜증 반, 그녀에 결례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 반으로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난처한 일이었다. 금방 마무리하고 나오겠다 한 얼마 뒤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십수분여 뒤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백도 잊은 채였다.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내뱉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우리는 객쩍은 미소를 지었다. 우산을 펴고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뛰어들었다.

  타이완 전통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다 했다. 그녀는 저를 믿고 따라오라는 눈치를 했다. 골목골목을 한참 지나 한 허름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허우 감독의 [펑쿠이에서 온 소년]이나 [연연풍진]에 나올 법한 식당이었다. 메뉴판을 봐도 내가 읽을 수 있는 한자는 ‘고기 육’자 뿐이어서, 주문은 그녀에게 맡겼다. 생각보다 다채한 음식들이 나왔다. 맛도 좋았다. 나는 그녀에게 여행 기간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대개가 허우 감독 촬영지 순례사진이었다. 그녀는 하나하나 미소 지으며 넘겨 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봤을 땐 너 좀 미친 거 같아” “뭐라고?” “너 혼자 이러는 건 상관없는데 여자친구는 엄청 힘들었을 거 아냐.” 여자친구는 반색을 하며 그녀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물었다.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봐. 왜 이토록 감독님한테 열정적인 거야?”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고른 뒤 대답했다.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어. 어렸을 때 많은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고, 싸움도 곧잘 일으키고 다녔어. 지금이라고 썩 좋은 인간은 못 되지만 감독님 영화가 아니었다면 더 걷잡을 수 없었을 거야.” 그녀는 고기 한 점을 입으로 가져 갔다. “그건 허우 감독님하고 닮은 점이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우 감독은 어린 시절 소문난 양아치였다. 대입 낙방은 물론 고등학교도 진학 못했을 만큼 성적 또한 형편없었다.(군에 다녀온 뒤 예술대학에 진학했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도둑질을 하거나, 싸움을 벌이거나, 당구장 또는 도박장을 전전하는 일 따위가 그의 소년 시절의 거의 전부라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그의 자전적인 초기작들과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찍은 헌정 다큐 [HHH : 허우 샤오시엔의 초상]을 보면 그가 그 시절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허우 감독이 택시기사와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말다툼을 했단다. 내내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다툼이 깊어진 그들은 결국 차를 도로 한 가장자리에 세웠다. 급기야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그 일은 언론에 보도되었다. 우리는 깔깔 웃었다. 역시 허우 감독다운 에피소드다 싶었다.

 자리를 옮겨 건너편 빙수 가게로 갔다. 나와 여자친구는 망고 빙수를 시켰고 그녀는 팥이 들어간 밀크티를 시켰다. 몇 대째 물려 내려오는 집인 모양이었다. 낡았으면서도 기품이 흘렀다. 창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상점의 불빛들이 젖은 바닥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허우 감독이 내 편지를 개봉하던 날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동봉했던 폴라로이드 카피 사진과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 사진을 함께 겹쳐 보시면서, “이 친구 알 것 같다.”고 한마디 남겼다고 한다. 듣기 좋으라고 꾸며낸 말 같진 않았다. 그는 사람을 잘 기억하기로 유명하다. 스텝의 몇 째 아이 학교 생활 소식도 먼저 물어오고, 심지어는 누구네 집 강아지 아픈 건 다 나았느냐 식의 마음도 먼저 내비치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파행적 운영과 그로 인한 서울아트시네마 존립 위협, 부산 국제 영화제의 재정적 어려움에 관해서도 반대 성명을 통해 이미 입장을 전한 바 있다. 가슴과 발이 늘 함께 움직이는 사람.

  수잔의 고향은 딴수이였다. 부모님은 현재 딴수이에 살고 계시고 그녀 역시 얼마 전까지 본가에서 출퇴근을 했단다. 스팟 인근에서 독립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일년 남짓이라고 했다. 퇴근 후나 쉬는 날에 무엇을 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한국 드라마, 한국 예능 보는 게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라 했다. “정말?” 여자친구와 나는 놀라 물었다. 방송 일에 종사하는 여자친구가 질려할만큼(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아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많은 한국 프로그램을 알고 있었다. 뿐아니라 연예계 소식이며 음악, 뉴스까지 두루 꿰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 되었다. 그 천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우편과 메일로 안부를 계속 나누기로 했다. 다시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계속 바라봐 주었다. 우리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2.
  그녀의 이름은 클로이. 스무 살의 앳된 소녀. 스팟에서 파트타임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1년 반 째라고 했다. 그녀는 한 달 전쯤 내게 [섭은낭]의 상영 스케줄과 정보에 관해 전화로 알려준 바 있다. 그게 첫 인연이었다. 전화 목소리와 얼굴 첫인상은 사뭇 달랐다. 나는 그녀가 꽤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스무 살이었을 줄이야.) 처음 도착해 수잔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클로이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침 그녀는 이날 휴무였고, [섭은낭]을 보러 왔다. 나는 그녀의 바로 뒷 열에 앉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영화였고, 내내 탄식을 내뿜으며 보느라 나는 자세를 자주 고쳐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영이 끝나고 우리는 함께 걸어 나왔다. 그녀는 우리를 ‘스팟 디자인’으로 안내했다. 거긴 별천지였다. 허우 감독의 초기작 DVD들, 섭은낭 한정판 화보집, 허우 감독 전작 자료집들. 뿐만 아니라 상당히 팬시하게 디자인된 갖가지 생활 소품들이 시네필들을 유혹했다. 나는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고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며 구경했고, 그 시간이 자꾸 길어지자 함께 있던 여자친구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 사이 클로이는 사무실에서 뭔가를 들고 왔다. 섭은낭 스텝 한정 포스터였다. 자기에게 두 개가 생겼다며, 내게 하나를 건넸다. “웰컴 투 타이완 앤 허우 샤오시엔스 하우스”라는 인사와 함께. 쉽사리 받아 들지 못했다. 그녀가 직접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와 저녁을 먹고 싶었다. 갓 스물이 된 소녀답게 타이페이의 이런저런 맛집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 중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꽤나 유명한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딤섬 비슷한 걸 시켰고, 쌀국수에 자장 소스를 끼얹은 요리를 시켰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영어가 유창했다. 할머니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이라며 웃어 젖혔다. 영화 이론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곧잘 했는데, 과학도 싫고, 수학도 싫고, 법도 싫었단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하다, 불현듯 영화를 해야겠다 생각했단다. 아무래도 현장 체질은 아니지 싶어 이론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그녀는 참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천천하고 정확한 발음이었고, 거기엔 어떤 자신감이 실려있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부드러움까지 섞였다. 허나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저 이지적인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나는 몇 차례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뭐랄까. 그녀에겐 상대를 매혹하는 힘이 있었다. 꾸며진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을 물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비에 돌란”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해맑은 얼굴이 되어, 돌란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열 몇 가지쯤 말했다. 나는 아직 그의 영화에 유보적인 입장이기에(절대 질투 아니다), 다소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대뜸, “됐고, 그냥 잘 생겨서 좋아하는 거지?”라고 농을 쳤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 그녀가 재치 있게 받았다. 비평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앞길은 자기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쉬는 날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고 했다. 소설은 그리 많이 읽지 못하고, 이론서나 역사서를 많이 읽는 편이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를 유명한 망고 주스 집으로 이끌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줄이어 서 있었다. 비는 참 질기게도 내렸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와 나는 스팟에서 최근 개봉한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나는 그 영화를 못 봤지만 연작인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은 아주 감명 깊게 본 터였다. 최근 몇 년간 ‘힐링 푸드 무비’는 전 세계적인 추세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카모메 식당], 존 파브로의 [아메리칸 셰프], 부지영의 [키친], 샤오야췐의 [타이페이 카페스토리] 등등. 열거하자면 퍽 긴 리스트가 된다. 그 중에서도 [리틀 포레스트]는 단연 돋보이는 영화였다. 한 여인이 도망치듯 시골로 흘러 들어 농사를 짓는다. 그녀가 하는 일은 밥을 지어먹고 차를 마시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일이다. 엄마와의 묘한 관계라는 서브플롯이 끼어들긴 하지만 그닥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이게 영화의 전부다. 클로이는 말했다. “나는 이 영화가 고성장시대 이후의 어떤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지향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리틀 포레스트] 속 여인은 단지 농사를 짓고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 거세된 시대에 되려 그 작은 몸으로 희망을 일구어가는 어떤 작은 활기에 관한 영화다.’ 우리는 입을 모아 대충 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쭝산 역 앞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걸음걸이조차 느릿하고 분명했다. 형광색 옷을 입은 덕에 그녀는 꽤 오래 어둠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3.
  그녀의 이름은 저스틴. ‘스팟 디자인’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친구였다. 나이를 묻진 않았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그녀를 만난 곳은 스팟 2층 빈 강의실이었다. 그녀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데워 온 인스턴트 파스타였다.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색함을 달래려 괜히 이 건물의 역사에 대해 물었다. 그녀가 아이폰을 뒤적이며 내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굉장한 천재 같아 보였다. 말을 이따금 더듬거렸고, 어떤 대목에선 알아듣지 못할 만큼 빠르게 말하기도 했다. 나와 눈을 잘 마주치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외동딸이고 타이페이에 살며 몇 년전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아직 꿈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차이밍량의 광팬이라고 소개했다. 한 달에 두어번쯤은 그의 얼굴을 본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다. 차이밍량 감독이 타이페이 어딘가서 커피숍을 운영하는데, 거기 가면 가끔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했다. 귀여웠다. 그 카페에서 일해볼까도 했지만 이력서를 다 써놓고도 내지 못했단다. “왠지 망설여지더라고.” 광팬은 아니지만 역시 나도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여행 전 마침 [떠돌이 개]를 다시 본 참이었다. 우리는 그 영화에 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건, 그렇게 어두운 영화에서 아이들 연기가 어떻게 저리 생기로울 수 있었는지였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걔네들은 이강생(주연배우) 조카들이야. 삼촌이니까 아무래도 편하고 그래서 더 자연스러울 수 있었겠지.”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비전문 배우의 전격적인 기용이다. 대자본이 투입된 영화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허우 감독도, 차이밍량도, 에드워드 양 감독도 적극 비전문 배우를 그들의 영화에 등장시켰다. 그럼으로써 독특한 인상과 질감의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길거리를 지나다 인상이 좋은 사람을 발견하면 뒤따라가서 영화 출연을 대뜸 제안하는 식으로 그들은 비전문 배우를 섭외했다.(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는 [연연풍진], [비정성시]의 신수펜이다.) 우리는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떠돌이 개]에서 제일 의아했던 건, 이강생이 맡은 인물의 직업이었어. 어떻게 오늘 날에도 저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저건 판타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이강생은 이 영화에서 피켓을 들고 비바람을 맞으며 신축 아파트를 홍보하는 일을 한다.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아무 인격도 감정도 없는 사물처럼 보인다.) 근데 신베이터우 역에서 정말 그런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본 거야. 와, 사실이구나. 판타지가 아니었구나. 눈 앞의 사람과 영화 속 이강생을 겹쳐 떠올리면서 굉장히 묘한 기분이 되었어.” 그녀는 내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었다. “맞아. 그런 직업이 대만엔 아직 있어. 그건 네 말마따나 차라리 판타지적이라고 불러야 할 장면이지.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온갖 풍요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이 세상은 도대체 뭘까. 이런저런 의문을 품게 하지.” 그녀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와 차이밍량의 영화를 비교하는 코멘트도 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는 보다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면이 있는 거 같아. 열 사람이 영화를 본다면, 열 사람 모두 똑같은 걸 느끼진 않겠지만 아마 대체로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 왜냐하면 허우 샤오시엔이 가장 중요시하는 건 사실주의이기 때문에. 그리고 섬세한 결의 생활 묘사이기 때문에. 하지만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는 열 사람이 본다면 아마 열 사람 모두 다른 생각과 감정을 품게 될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사실적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너도 느꼈듯 한편으론 굉장히 판타지적인 풍경이거든? 분명 어떤 특수효과를 쓴 것도 아니고 편집으로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주 이상한 판타지처럼 보이지. 그게 차이밍량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해.” 그녀의 열변에 나는 구구절절히 공감했다. 정말로 또렷한 감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며칠 전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함께 찍은 아이폰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섭은낭] 개봉 기념 리셉션 파티 현장이었다. 나는 품에서 허우 감독과 찍은 사진을 꺼냈다. 우리는 10년 전 찍은 내 사진과, 3일전 찍은 그녀 사진을 나란히 탁자 위에 놓고 보았다. “허우 감독 얼굴 달라진 거 봐. 역시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네.” 그녀는 시처럼 이렇게 말했다.




4.
  그녀의 이름은 정선년. 나의 오랜 연인이자, 벗. 서울에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을 만났을 때, 언젠가는 대만에서 허우 감독의 흔적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10년 만에 그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될 줄이야. 애초 나는 올 부산 영화제에서 [섭은낭]을 보려고 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대만으로 이끌었다. 대뜸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그건 그녀가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상대를 깊이 배려하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무심히 선물을 내밀거나 이벤트를 벌이는 것. 이번에도 그 수법이었다. “너 대만 가고 싶어했잖아.” 속수무책 감동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대만에서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토라지고 말았다. 허우 샤오시엔의 흔적을 향한 나의 순례는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러다못해 비장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숫제 그녀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행동한 시간들이 있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독단적이고 이기적으로 나도 모르게 굴고 말았다. 그녀는 충분히 인내했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나를 멈춰 세웠다.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유만아. 너는 여기서 뭘하고 싶은거야?” 나는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글쎄다.. 미안해.“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무책임한 대답에 그녀는 화가 많이 났다. 그날 저녁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여행을 함께 해왔다. 터키에서도 함께였고, 중동에서도 함께였다. 아프리카에서도 함께였고, 남미에서도 함께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도 함께다. 돌이킬수록 나의 이기심 밖에는 짚이는 바가 없었다. 나는 늘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하려했고 그녀는 적지 않은 시간을 묵묵히 따라와주었다. 그 이기심과 무책임함을 알면서도. 속으로 매우 서운했을 것이었으면서도. 남미 어느 나라에서, 지도에도 없는 인디오 마을을 찾아 들어가겠다고 그녀를 이끌고 저 깊은 고산 정글 숲 속을 헤칠 때에 그 이기심은 절정이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천만한 미친 짓이었다.) 정말 나는 그랬구나. 작은 탄식이 나왔다. 처음한 각성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잊고 말았다. 나를 어쩌면 좋을까.

  그녀는 내가 어떤 노력을 한다해도 그 인간적 깊이에 이를 수 없을 그런 사람이다. 지난 7년의 시간을 빌어 감히 확신 한다. 이미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숫제 이해한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더듬더듬 엊그제 받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허우 감독은 내가 많이 부족해서, 따르고 싶은 어떤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야. 너는.. 내가 따르고 싶은 사람이면서, 또한 그 어떤 길이든 함께 하고 싶고 또 해나갈 사람이고.” 스스로도 이 대답이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 대답이 공허했겠지만, 모른체하며 넓은 품으로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다시 큰 사람이라고 느꼈다. (2015)

2015. 9. 1.

촬영지 순례 여행 #2. 허우 샤오시엔 감독 만남 10주년 기념



1. 우리로 치면 명동쯤 될 이곳에서 여자친구는 먹거리 위시리스트를 지워내느라 여념없었고, 나는 대만 최초의 극장(이지만 멀티플렉스로 개축된)을 비롯한 또다른 멀티플렉스들의 분위기를 살피러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개봉 사나흘차를 맞은 [섭은낭]은 초반 스코어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대부분은 속아서 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후에 SPOT의 수잔에게 들은 바로는, [섭은낭]을 보고 뿔난 관객들이 포털 평점 테러를 신나게 하는 중이라고, 적어도 [와호장룡] 정도는 되는 고급지고 신나는 무협영화일 줄 알고 찾아왔다가 기대완 전혀 다른 엉뚱한 영화라 짜증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곧 내려질 간판들을 돌아다니면서 찍었다. (시먼띵.2015)



2. 처음 타이페이 시내에 당도했을 때,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거리 제례의식이었다. 그날따라 무슨 일이었는지 가게마다, 가정마다 작은 제단을 마련해놓고는, 향초와 지방을 태우며 기도를 외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종교는 없지만 종교인들이 제각기 관례에 따라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중동을 여행할 때, 하루 꼬박 다섯번 나라 전역에 울리는 코란 소리에 취해들곤 했었다. 무슬림들은 길을 걷다 말고 등짐에서 작은 카펫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메카를 향해 전심으로 기도를 바치는 모습에서 풍기던 그 엄숙함, 정결함을 잊지 못한다. 이따금 제 종교에 교조적으로 빨려들어 타 종교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무섭다. 하지만 어떤 종교든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러는 법이 없다. 신을 무조건 숭앙하는 대신 신과의 대화 속에 무엇보다 자신을 뒤돌아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정성시] 첫장면은 임문웅의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아내의 진통과 비명이 시작되자 안절부절못하며 향초를 집어올린다. 양손에 모아 허공에 몇번 휘두른 뒤 기도를 올린다. 나도 그 방법대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평온을 기도해보았다. (용산사.2015)



3.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잠깐 쉬러 들어간 카페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17세의 학생이었다. 싸인, 코싸인, 탄젠트 등의 기호가 복잡히 적힌 문제지를 풀고 있었다. 그 시끄러운 틈에서 괜찮겠냐 물었더니 상관없단다. 그녀는 허우 샤오시엔을 알고 있었다. 반면 장첸과 서기는 모른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눈이 참 예뻤고 말씨가 고왔다. 그녀도 나도 더듬거리는 영어로 서로의 생활을 물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21살이고 그녀를 많이 예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수줍게 보여준 휴대폰 사진이 그걸 말했다. 그녀는 이곳 딴수이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여행 비지니스 학과에 들어가고 싶단다. 멋진 여행 기획자가 되는 것이 꿈이란다. 그녀의 행복과 꿈이룸을 빌어주었다. 아직 키스를 못해봤다기에 얼른 해보라고 농섞어 충고해줬다. 인생에 진짜 좋은 몇가지 중 하나라고. 수줍게 붉어진 볼이 참 예뻤다. (딴수이.2015)



4.[비정성시]와 [연연풍진]의 촬영지, 지우펀. 저 첫 번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향한 이유는 충분히 채워진 셈이었다. 저 습한 장면은 비정성시에 인서트로 두어차례 삽입된다. 그 무심한 쇼트를 바라볼 때마다 정말 가슴이 아려오곤 했었다. 우리는 한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길다란 의자에 걸터 앉아 습기 가득한 바람을 맞았다. 한 쪽 귀에 씩 이어폰을 나눠 꽂고 비정성시 사운드 트랙을 들었다. 그녀가 내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긴 시간 함께 귀기울여 들어주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지우펀.2015)

촬영지 순례 여행 #1. 허우 샤오시엔 감독 만남 10주년 기념



1. 클로이가 긴 시간 구글링을 해낸 끝에 [밀레니엄 맘보] 오프닝 촬영지를 알아냈다. 찾아 가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곳은 오랜 세월 탓에 곳곳이 훼손 되어 있었고, 이 참에 지자체는 쇼핑몰과 연계하여 다리 전체를 새로 짓는 리모델링을 할 계획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무지 소음 때문에 오래 있기가 어려웠다. 이를 무릅쓰고 여자친구가 기꺼이 서기 역할을 맡아주었다. 그 덕에 거기서 밀레니엄 맘보 오프닝을 비슷하게(?) 따라 찍을 수 있었다.




2. 루이팡에서 핑시시엔 열차를 갈아 타고 시펀에 갔다. [연연풍진]과 [남국재견]의 촬영이 이루어진 곳이다. 수년전부터 관광이 활성화되어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파를 뚫고 잠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연연풍진의 소년이 살았을 법한 가옥들이 이어져 있었다. 습하고 조용했다. 깡마른 고양이를 보았고 우산처럼 넓은 잎을 가진 식물을 보았다. 다시 철로 변으로 나왔다. 한 풍등 가게에서 풍등을 샀다.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바람을 적어 넣었다. 한 면에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10주년을 자축, 감사하는 문구를 적었다. 풍등 안에 종이를 말아 불을 붙이자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저 멀리로 날아가는 모습이 참 예뻤다.




3. 열차는 언제나 나의 영화적 로망이었다. 히치콕의 서스펜스한 열차. 오즈의 아이들이 걷던 철로길. 사트야지트 레이의 꿈결 같은 열차. 어떤 서부극은 아예 열차의 이미지를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역시 나는 좋아했다. 그래도 허우 샤오시엔의 열차만큼 내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은 없었다. [연연풍진]과 [남국재견]의 저 철로라니. 그저 차창 밖을 바라볼 뿐인데도 깊은 곳에서 아련한 감격이 올라왔다. 흡사 시간을 잇는 선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4. 실제 [비정성시] 촬영이 이루어진 가게에서 이날 저녁을 먹었다. 맛은 없었다. 대신 임문웅과 그의 가족들이 둘러 앉았던 식탁이 있었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자리를 차지하던 사람들 또한 변해갔던 그 식탁이다. 영화가 끝난 뒤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식탁을 흘러 지나 갔을까. 벽 한 켠엔 허우 감독이 남기고 간 싸인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2015. 8. 28.

[자객 섭은낭] 짧은 소감




[자객 섭은낭] 짧은 소감





  섭은낭을 보았다. 꼭 10년의 세월이다. 스물 되던 해 이 기획을 처음 들었다. 앞으로 또 무엇을 이렇게 기다릴 수 있을까. 더없이 깊고 아름다운 영화였다. 무협영화지만 어떤 전통에서도 비껴선다. 온 육신이 너절해질 때까지 불사르는 비장한 결투도 없고, 정교한 합 아래 곡예를 펼치듯 빠르고 화려한 무술도 없다. 그 대신 이 영화가 공들여 다루는 건 ‘망설임’, ‘기다림’, ‘비어있음'의 시간이다. 죽여야 하지만 차마 죽일 수 없는 남자를 바라보는 어떤 여인의 이야기. 그녀는 자객이라기보다 흡사 배회하는 유령같다. 그 지연과 공백의 틈을 채워내는 건 무심한 풍경과 그 풍경을 감각하는 시네마틱한 시간이다.(군데군데 무성영화의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섭은낭]의 인물들은 격렬히 쟁투하지 못하고 종종 이상한 리듬으로 멈춰선다. 기량과 법도만으로는 앞지르거나 감당해낼 수 없는 어떤 성정이 그들의 운명을 자유롭게 풀어두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간의 흔적-옥결, 금가면, 종이인형-이 여전히 남아있고, 그 궤적과 소용돌이 가운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이들 중 아무도 없다. 섭은낭은 끝내 실패한다. 그리고 어디론지 알 수 없을 먼 길을 떠난다. 허우 샤오시엔은 다른 어떤 이보다 ‘무엇'에 ‘얼마만큼 다가가야 하는가'(혹은 '얼마만큼 멀어져야 하는가')를 깊이 고뇌한 작가다. 카메라가 선 자리로, 쇼트의 지속시간으로, 인물 감정과 생활감각에 대한 섬세한 결의 묘사로, 말하자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수단으로 그 거리를 표현해왔다. 그 거리만큼이 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방도이며 그곳이 자신이 이를 수 있는 마지막 자리라는 듯. 이 영화 역시 그 거리감을 잊지 않는다. 그 결과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말로 모두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시적인 무협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생활을 살아낸다. 영화는 단지 그 방편일 뿐이다. 지난 기록들이 이 작품에 이르러 한 숭고한 결정을 맺은 느낌이다. 정식으로 수입되어 개봉하면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밖을 걷고 싶다. 

2015. 8. 28.
Spot Taipei (光點台北)




덧붙임1.

[자객 섭은낭] 대담



  서울아트시네마서 열린 감독님과의 대담행사(16.1.28)에 참석했다. 2005년 낙원동에서 있었던 마스터클래스 이후 10년 만에 뵙는 자리다. 무척 설렜다. 이창동 감독이 특별히 함께 했다. 김영진 평론가가 사회를 진행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대담이 이어졌다. 허우 감독에 대한 이창동 감독의 애정이 컸다. 10년을 기다려왔다고 입을 떼었다. 이 영화에선 서사의 인과성이나 인물 관계의 명료함이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알 듯 모를 듯한 감정들과 그를 둘러싼 풍경들, 소리들에 감각을 여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스러운 영화였다고 말했다. 과연 허우 감독님의 작품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영화였다고. 당이라는 시대적 외피, 무협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둘렀을 뿐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어떤 마음 관한 영화가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깊이 공감했다.

  Q&A 시간엔 으레 나올 법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히 여기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봤는데 이 감상이 맞는 것입니까. 허우 감독은 그 모든 질문들에 성심껏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빈틈을 남겨두는 듯한 인상이었다. 과잉 해석과 현학의 분석을 슬며시 경계하고 있었다. 특유의 유머와 익살어린 제스쳐로 대신 그 틈을 채워냈다. 답변은 전작들을 마치고 했던 그간의 인터뷰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은 줄곧 사실주의를 강조해왔다는 말. 함께 자주 작업하게 되는 이들은 결국 그이의 품성과 사람됨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말. 가장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필름에 담기 위해 먼저 그런 상황과 환경,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말. 머리로 하는 대화가 있고 가슴, 발바닥으로 하는 대화가 있다. 허우 감독과의 대화는 언제나 명명한 후자였다. 그는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로 영화를 배운 사람이 아니다. 삶과 생활이 먼저였고 영화는 언제나 방편이었던 사람. 생활을 감각하고 세계를 살아내는 데 다만 영화가 필요했던 사람. 가신공주는 섭은낭에게 말한다. “너의 검술엔 적수가 없으나 마음은 사람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구나.”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거리감'은 인간의 불가피한 어떤 성정으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이뤄내야 하지만 이뤄낼 수 없음을 자각하는 일. 전해야 하지만 끝내 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 [카페 뤼미에르]의 아버지는 딸 요코에게 ‘어떤 방법으로 네가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며 살 것인지'에 대해 끝내 묻지 못한다. 그는 정종을 들이켜거나 뒤돌아 앉아 함께 우동을 먹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그 거리감과 생활묘사는 그저 많은 영화를 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담이 끝났다. 관객들은 로비에서 허우 감독을 기다렸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갔다. 나는 그의 보좌 직원(SPOT 직원이라고 했다)에게 작은 선물을 남긴 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친구가 허기를 호소했다. 종로3가 앞에 늘어선 한 포장마차로 향했다. 막 반죽을 부은 붕어빵과 계란빵이 익기를 기다렸다. 저편에서 허우 감독과 통역사, 스팟 직원이 향해 오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 전했다. 허우 감독이 밝게 화답해주었다. 선물에 고마워하신다고 통역사는 전했다. 붕어빵 가게 앞에서, 그들은 후미지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역으로 갔다. (2016)






덧붙임2.

허우 샤오시엔 감독에 관한 짧은 생각



“열네 살, 카오슝에 살던 때다. 점심을 먹고 나면 걸어서 높은 관리들이 사는 관저로 갔다. 담을 넘어 망고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훔쳤다. 우선 배불리 먹고 나서, 열매를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지는 않는지 뒷길로 누가 다니지는 않는지 무척 긴장이 되었다. 이제 바람이 불 것이고 매미가 울 것인데 그 소리는 과연 어떻게 들려올까. 그렇게 주의를 모은다는 게 이미 하나의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영화란 건 하나의 주어진 상황, 분위기, 정서를 확대시키고 응집시키는 일이 아닐까.”                                                                                              
- 허우 샤오시엔, 서울아트시네마 마스터클래스(2005. 8. 27) 중에서


1. 시네필로서의 자의식이 없었던 사람. 생활과 삶, 그로부터 감각되는 세계가 오직 중요했던 사람. 그 안에서 세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발견하고, 질박한 응시의 예술을 길어 올려온 사람. 더 다가갈 수도 없고,(’내게 그만큼의 권리가 있을까?’) 더 물러날 수도 없었던 자리.(’이들에 혹여 무감해지는 건 아닐까?’) 딱 그만큼의 거리. 그는 그곳에서 무엇보다 바람을, 햇빛을, 소리를, 사람을, 마음을, 지나간 것을 느껴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오랜 필름을 볼 때도, 가장 근작을 볼 때도,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지난 풍경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그래왔다. 우리도 그래왔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2. 평자들은 [남국재견] 이후 그의 세계가 변모했다 지적한다. ‘완벽히’ 달라졌으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정성일)고까지 한다. 일견 사실이다. 정처없는 인물들, 떠다니는 카메라, 불균질의 시점숏 등이 등장했으니. 시네마의 측면이라면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형식 비평을 위한 수사일 뿐, 감독 자신의 내적 동기와는 크게 관련이 없어보인다. 허우 샤오시엔은 (도약을 갈망하는 여타 예술가처럼) 허물기 위해 허문 일이 없다.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단지 그를 따라 함께 흘러 다녔을 뿐이다. ‘해체'니, ‘비인칭 시점'이니 하는 심오한 결단 같은 것이 거기에 자리했을까.(허우 감독의 주관적·정서적 시점숏은 초기 작품부터 일관되어 온 것이다. 영화적 방법론이라기보단 그의 생활감각에서 빚어진 한 태도라 보는 것이 더 근접할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자리서 주변의 사람과 세계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세계의 진실을 포착해 낼 수도 있다는 엷은 믿음을 품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혹 시네마의 전통이나 혁신 따위서 이탈되든 그렇지 않든 그다지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의 눈에, 이미 세계는 여러 굴절 속에 있다. 사람들도 따라 부유하고 있다. 그는 이들-가령 [남국재견],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 ‘청춘몽(靑春夢)‘의 유령 같은 청춘들-에 합류해 다만 자신도 함께 움직여야한다 생각했을 것이다.(허우 감독은 [밀레니엄 맘보] 인터뷰에서  2011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영화의 나레이션에 대해 “나이를 먹은 내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위치이자 현대 3부작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빨간 풍선] 인터뷰에서는 풍선이라는 기호에 대해 "소년의 곁을 따라다니며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 내 마음의 시선"이라고 말했다. 성장 4부작에 관해서는, "그건 마치 사진과 같은 기억의 풍경이므로, 보다 정적이고 먼 거리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판단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그렇다고 ‘지금, 이곳’을 외면하지도 못한 채 그저 그들을 따르는 일. 그것 말고는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력한 이끌림’. ‘판단없는 응시’. 온전히 허우 샤오시엔의 것이라 부를만한 건 혹여 이것들이 아니었을까.

3. 그의 영화에서 쇼트와 쇼트가 붙지 않고 튀는 순간을 특히 좋아한다.([밀레니엄 맘보]에서 비키의 거실을 비출 때, [카페 뤼미에르]에서 요코가 노면전차를 타고 도쿄 시내를 흐를 때, [섭은낭]에서 은낭의 목욕물을 채우기 위해 시중들이 일을 할 때, 그리고 전계안이 그의 아들과 겨루기 비슷한 장난을 칠 때 등.) 여타의 감독들이라면 그런 연결은 당장 폐기해내고 말 것이다. 편집의 가장 기초를 무시한 연결. 영화과 학생들도 저지르지 않을 실수. 그렇다고 고다르, 트뤼포 식의 의도된 소격효과도 아닌 것. 허우가 그걸 모를까. 천만에. 허우는 그걸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렇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중이다. 자기 영화에 완전무결이란 필요도 없고, 가능할 수도 없다는 일종의 체념-받아들임. 할 수 있는 만큼만을 해내겠다는 태도인 것이다.(“중요한 건 인물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거다. 구조나 스토리는 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인물이며, 또 공간이다.”) 그건 예술에서도, 또한 생활에서도 그가 줄곧 견지하려 애써 온 어떤 자세였다. 생활을 지켜냄으로 예술을 빚는 사람. 이런 예술가와 한 시대의 대기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매우 축복한 일이다. 이어질 배움을 기다린다. (2016)





덧붙임3.

허우 샤오시엔에게서 배운 것들



결국 실패하고 마는 일. 인간의 양태를 벗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일. 머뭇거리는 일. 속수무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는 일. 불현듯한 무력감. 어찌해볼 수 없는 회한에 젖어드는 일. 다시 그게 삶이라고 고개를 꾸벅이는 일. 매선 눈으로 먼 풍경을 바라보는 일. 응시. 긴 응시. 뛰어들지 못하고, 바꿔내지 못하고 그저 한없이 바라보는 일. 저 긴 호흡, 느린 걸음. 그 속도만이 자신의 것임을 도리없이 수긍하는 일. 허우 샤오시엔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2016)




덧붙임4.

영화는 영화가 아닌 곳에서 길어져야 한다




지난 봄 새해 선물을 보내 오셨다. 올 봄엔 결혼 선물을 보내 오셨다. 이국의 작은 이에게도 그는 구태여 이런 성가신 일을 한다. 그는 늘 현장에 있다. 풍경과 사람 속에 발딛고 있다. 느긋이 바라보다가도, 긴요한 일엔 재지 않고 뛰어든다. 그렇게 문화 공간을 일구고, 긴 시간 후학들과 토론하고, 억울한 이들과 나란히 서 불복종운동을 한다. 창작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 않는 사람처럼, 작품은 짧은 회차에 하나를 찍거나 오래 간격을 두고 공들인 하나를 겨우 내놓는다. 기회 때마다 그는 말한다. "영화는 영화가 아닌 곳에서 길어져야 한다". 칠십 노인의 뜨거움이다. 나도 그때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 (2017)






2015. 8. 27.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3




  첫 여행은 터키였다. 누리 빌제 세일란의 [우작]을 보고서였다. 흑해, 보스포러스 해협, 아나톨리아 고원. 그 풍경 속에서라면 한없이 많은 계단이 놓여있는 것만 같았던 당시의 막막함을 얼마라도 위안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림을 준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 다니는 건 이후 모든 여행에서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대만은 언제고 가야 할 나라였다.(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이안의 나라!😮) 그러나 어쩐지 자꾸 미뤄져 왔다. 올해는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오직 10주년이라는 저 의식을 치르기 위해. 시간도 돈도 넉넉지 않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떠나게 되었다. 이해심 많은 여자친구가 경비 일부를 돕고 동행까지 한다. 고맙다. 이 시간 역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오늘은 ‘SPOT TAIPEI'에서 허우 감독의 [섭은낭]이 첫 상영을 하는 날이다. 또한 우연하게도 10년전 서울에서 허우 감독과 처음 만났던 그날이다. 운이 닿는다면 다시 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 그 한 번 만남의 기억으로 간직되는 편이 실은 내겐 더 좋다.(2007년 부산에 [빨간 풍선]을 들고 오셨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부러 귀찮게 해드리지 않았다.)  타이페이에 내리면 가장 먼저 허우 감독이 실현한 꿈, 'SPOT TAIPEI'를 방문할 것이다. 그곳에서 [섭은낭]을 보고, [연연풍진], [비정성시]와 [남국재견]의 촬영지를 차례로 순례할 것이다.

2015. 8. 20.

허우 샤오시엔 집 회고전 2015 상영 리스트


허우 샤오시엔 집 회고전 2015 상영 리스트
Retrospective Of HHH At Home 2015 Screening Lists
2015. 8. 1 ~ 2015. 8. 20

1. 고향의 푸른 잔디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1983)
2. 펑쿠이에서 온 소년 The Boys From Fengkuei (1983)
3. 동동의 여름방학 A Summer At Grandpa’s (1984)
4. 샌드위치 맨 The Sandwich Man (1983, 단편)
5. 동년왕사 The Time to Live and the Time to Die (1985)
6. 연연풍진 Dust In The Wind (1986)
7. 비정성시 A City Of Sadness (1989)
8. 나일의 딸 Daughter Of The Nile (1987)
9. 황금시대 La Belle Epoque (2010, 단편)
10. HHH : 허우 샤오시엔의 초상
      HHH : Un portrait de Hou Hsiao-Hsien (1997, 다큐)
11. 희몽인생 The Puppetmaster (1993)
12. 호남호녀 Good Men, Good Women (1995)
13. 남국재견 Goodbye South, Goodbye (1996)
14. 해상화 Flowers Of Shanghai (1998)
15. 밀레니엄 맘보 Millennium Mambo (2001)
16. 일렉트릭 프린세스 하우스
      The Electric Princess House (2011, 단편)
17. 카페 뤼미에르 Cafe Lumiere (2003)
18. 쓰리 타임즈 The Three Times (2005)
19. 빨간 풍선 Flight Of The Red Balloon (2007)















2015. 8. 16.

적당한 소비는 건강에 이롭다


  오늘은 사랑하는 나의 여자친구님 생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급하지도 않은 대본을 어서 써내라고 채근하는 선배작가 덕에 일찍 사무실로 들어가보아야 했다. 맛있는 걸 사 먹였으면 그나마라도 덜 섭섭했을 텐데 하..음식마저 별로였다.(차이나팩토리, 저주한다.) 이른 시간에 홀로가 되었다. 뭘 할까 하다가, 서두르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호금전의 [협녀]를 볼 수 있겠구나 싶어 얼른 달려갔다. 근데 여자분들 노출에 잠깐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뭔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열차를 잘못 타고 말았다. 영화도 놓쳐버렸다. 하늘도 먹먹한 색깔이어서 오늘은 뭔가 안 되려나 보다 하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저기 알라딘 중고서점이 보였다. 꽤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기에 한번 들어가보았다. 별천지였다. 많은 책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구경하고 구경했다. 종류도 양도 생각 외로 방대했다. 기가 찰 정도로 값이 저렴한 책들도 있었고, 이 가격이라면 새 책을 사보는 게 낫겠다 싶은 책들도 있었다. 솔직히 그 시간 동안은 대형 서점에서 운영하는 이런 중고책방이 동네 작은 헌책방들에 얼마나 피해를 끼치고 있는지에 대핸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 몇 권을 샀고 디비디 몇 장을 샀다. 그 중 가장 뿌듯한 건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의 수확이다.(그렇게 찾아 다녀도 없더니만!) 폴커 슐렌도르프의 [양철북]과 비스콘티의 [강박관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샀다.(천원대!) 조금 기분이 풀렸다. 적당한 소비는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했다.


2015. 8. 13.

위선


1. 여인의 아름다움은 30대 후반, 40대에 이르러서야 만개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생각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의 생각이다. 남성의 멋스러움도 역시. 싱그럽고 풋풋한 미도 있지만 더 깊은 미는 역시 삶의 두께가 어느정도 쌓인 뒤에라야 배어나는 거 같다.

2. 위선이더라도 친절한 사람이 좋다. 이건 요즘 생각이다. 예전엔 겉이 위악스러워도 속마음만 따뜻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허나 갈수록 아니다. 겉으로 선하려 애쓰는 사람은 속으로도 얼마간 그 선함이 따라온다. 반면 겉이 사나운 사람은 아무리 본성이 따뜻해도 결국 어떤 선이 그어지고 만다. 내가 느끼는 바 그렇다는 것이다.

2015. 8. 10.

여자친구


여자친구가 부쩍 다시 두통을 호소한다. 사고 후유증도 남은 거 같고, 격무의 피로 탓도 있는 거 같고. 두통의 원인이야 워낙 다양한데, 주치의 선생님은 목 뒤 근육뭉침이 뇌로 가는 혈류를 방해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특별한 병변이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하라고 하신다. 다행한 말씀이지만 아파하는 걸 계속 지켜보는 마음이 그렇다고 편해지진 않는다. 얼마 전부터 그간 야심차게 준비해 온 모창과 성대모사를 선보이고 있다. 신승훈, 조성모, 전도연, 오광록, 이순재 선생님까지 했다. 그녀는 머리가 더 아파온다고 그만하라고 한다. 그럼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어니.


2015. 8. 8.

자끄 러끌레르끄의 말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옛 이야기꾼들이 전해주는 광야나 숲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며, 여러분의 아이들도 더 이상 원시적인 것을 경험해 보고,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몸을 풀거나 환상적 느낌에 몸을 달려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아이들은 저희들 생각대로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놀이 프로그램'이란 교육을 통해서 배우며, 시간이 조금 지나면 경기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게 규격화되어 있어서, 달리고 싶은 곳에서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줄지어 놀이터까지 이끌려 가서, 자격증 소지자의 행동에 따라 체계적으로 몸을 단련하게 됩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졸업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 '자리'가 필요하고 이 자리는 졸업장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를 믿고 있고, 누누히 강조하며 이 생각을 널리 전파하는데, 이래서 졸업장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겨납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 가운데 하나는 창조적 노력이 없이 교육을 받아들인 졸업장 인생들 자신입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해낸 것만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인간은 그저 졸업장 인간일 뿐 그것으로 그가 박식하고 많은 이들이 말한 바를 알고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말한 바를 그가 모두 모아들인다 한들, 그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기를 어떻게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식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좋은 것인데 인간은 지식의 노예, 졸업장의 노예, 혹은 계획의 노예, 방법의 노예가 될 위험을 안고 삽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고, 바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의미하고, 이 인간성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생기요 창조력이며, 노력의 의미이며, 그 개성 자체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 자끄 러끌레르끄, [무지의 찬양]중에서

2015. 8. 4.

걷는 듯 천천히




1. [걷는 듯 천천히]를 달리는 듯 빠르게 읽었다. 그렇게 넘길 책이 아닌데. 다시 돌아가 읽어야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짧은 글 모음집이다. 문체가 너무 좋다. 귀엽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중하다. 사유와 통찰이야 이미 그의 영화들이 말했지만 글에서도 역시 멋지게 묻어난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이런 눈과 마음을 닮고 싶다. 쉽게 읽히면서도 사람과 세상을 깊이 존중하는 마음이 담긴 글. 특히 후쿠시마 사태와 그 이후의 일본을 바라보는 그의 글들에선 여러번 감탄했다. 문명사적 사건 앞에 그 책임자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 체제를 또한 유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다. 역시 멋진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나저나 모 형님이 아니었다면 출간 소식도 몰랐을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에 이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라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었는데. 조금 민망했다. 그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번역기 돌려가며 봤던 글들을 이렇게 묶인 책으로 만나게 되니 너무 반갑다. 곁에 두고 자주 읽을만한 책이다. 맘 같아선 한 30부쯤 사서 주변에 돌리고 싶다.

2. 수년전 사회단체에 있었을 때, 내가 처음 맡은 일은 레퍼런스 책 구하기였다. 연구와 활동에 도움될만한 책의 목록을 작성하고 저자에 영향 주었거나 관련지어질 법한 책들의 연결고리를 찾은 다음 그 책들 역시 목록으로 작성하는 일이었다. 사무실이 광화문 근처여서 교보문고를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어느 날인가 크게 경악했던 일이 있다. 아동 코너를 지나고 있는데, 내 눈을 의심케하는 장면이 거기 있었다. 모 출판사에서 나온 [2세 국어], [2세 영어], [2세 수학]. 이름하여 ‘2세 시리즈'였다. 한 귀퉁이에 차곡이 진열되어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2세부터 저 짓거리를 해야해? 같이 갔던 동료와 그런 말을 주고 받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 2세 시리즈는 참 종류도 다양해졌고 숫제 입구부터 비치되어 있을만큼 인기도 좋은 모양이다. 집단적 광기와 불안의 풍경이다. 부모들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모르는 부모라면 그야말로 답없는 거고.) 남들이 시키니까, 내 아이만 뒤쳐지면 안되니까, 나처럼 자라선 안되니까, 나중에 원망들어선 안되니까, 그 불안 때문에들 저러는 걸꺼다. 그리고는 마음 한 구석의 불편감(내 아이에게 이런 일을 시켜도 좋은걸까?)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왜곡 치환하고 애써 덮어버리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알자. 학대는 학대다. 사랑이 아니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 이 집단적 광기와 불안과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 결혼도, 출산도 참 망설여진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현재 자기가 처한 경제사회적 상황에 더해, 이런저런 사회문화적 고민에다 문명사적 고민까지 짊어지느라 참 수고가 많다. 나 역시 그 중 하나다. 이 피로와 불안의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할 지는 철저히 각자의 몫으로 치환되어버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2세부터 수학을 영어를 국어를 배워야 하는 아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렇게 태초부터 합리적으로 기획되고 찍어내듯 생산된 아이들이 세상에, 자연에, 사람에 벌일 일은 과연 어떤 광경일까. 개인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공동체의 문제고 따라서 제도적으로 (해결은 어렵겠지만) 고쳐나가야 할 일이다. 똑똑한 아이들 몇 명이 이 세상을 이끌고 나머지는 기계와 첨단기술로 채워지는 풍경은 끔찍하다. 나머지 아이들은 허드렛일이나 담당하거나 그도 아니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고, 그 똑똑한 몇 사람을 위해 굽신거리며 멸시받는 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정말 그런 세상을 바란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건 그 똑똑한 아이들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3. 걷는 듯 천천히 살아가는 아이들이 더 많아질 세상을 꿈꾼다. 허우 감독과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처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지아장커의 영화를 가장 우선 챙기려 하는 건 내가 무슨 대단한 영화광 행세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얼마나 내가 나약한지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고 금방 부식되고 말아버릴 인간인지 잘 알기 때문에. 나를 붙잡으려고 그러는거다. 이런 책은 반갑다. 아직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니까. 그가 계속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책도 이따금씩 내주었으면 좋겠다.

2015. 8. 2.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2



1.
  십 년전에 썼던 허우 샤오시엔에 관한 글. 당시 감독론이랍시고 감히 몇 편 끄적였던 것들 중 일부 발췌했다. 다시보니 좀 많이 오글거리나 큰 견해엔 변함이 없다.

“허우 샤오시엔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세계의 이러저러한 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활을 그려낼 때에조차 그는 결코 서사를 순서정연히 축조해 나가는 법이 없다. 그런 일엔 애당초 관심이 없는 것이다. 쇼트와 쇼트의 연결ㅡ몽타주를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그의 관심과 전통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쇼트가 이미 하나의 세상을 품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전체를 구석구석 보여주는 것보다 하나의 결을 천천히 그려내는 것이 훨씬 깊고 진실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바라본다. 그리고 감각한다. 그것은 어찌할 바 없이 한자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 온 자신의 뿌리와 궤적을 수긍해내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카메라는 사람과 사물, 세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 시간 공들여 느릿느릿 그들을 느껴본다. 마치 거기가 다가갈 수 있는 마지막 자리이며 그 응시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듯. 그의 영화엔 늘 실내가 있고 실내와 연결된 바깥 창이 있다. 인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 머문다. 열려진 창 밖에선 역사가 벌어지고 그 창을 통해 생의 불가피한 진물들이 하나 둘씩 집 안으로 침윤해 들어온다. 인물들은 묵묵히 세상의 변화를 살아낸다. 그 풍경을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적막하고 준엄한 관조이다. 감히 나는 그것을 동시대의 가장 윤리적인 시선이라 생각한다.“ (2005.12) 




2.
  8월은 허우 샤오시엔의 달이다. 십 년전 8월 낙원아트시네마에서 그를 만난 이래 그냥 내가 그렇게 정했다.😐 매해 이맘때면 허우 샤오시엔을 다시 꺼내 본다. 마침 타이페이에선 14일부터 그의 회고전이 열린다. 그 기간엔 갈 수 없으므로 집 회고전을 열고자 한다. 이름하여 ’허우 샤오시엔 집 회고전 2015’. DVD로 보유한 열한 편의 작품과 도무지 DVD를 구할 수 없었던 (그래서 파일로 보유한) 여덟 편의 작품, 총 열아홉 편으로 이달을 날 것이다. 어느 씨네마테크나 영화제가 부럽지 않다.




3.
  8월 28일 타이페이서 개봉 예정인 8년 만의 신작 [자객섭은낭] 포스터.





4.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믿는다면 수상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상을 받거나 받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내 영화들은 전세계에서 상영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에 심사위원들이 [섭은낭]에 상을 주지 않았다면 우린 돌을 던졌을 것이다. 물론 농담이다.”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소감 중에서)





5.
  2008년 대만 당국의 싼닝마을(三鶯部落) 개발 계획에 맞서 주민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 삭발 투쟁까지 했던 허우 감독. 집회 현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싼닝 공동체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해오기 훨씬 이전부터 주민들이 고유의 생활 문화를 일구며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다. 납득할 수 없는 명분과 졸속 행정으로 하루 아침에 이주 결정을 내려버리는 건 도무지 말이 안될 일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이주 및 파괴는 결국 당국의 의지대로 집행되고 말았다. 그의 새로운 영화는 타이페이의 수로 시스템 개발자와 강의 여신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위무의 형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진심으로 이런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


2015. 8. 1.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만남 #1





  10년 전 8월 27일, 허우 샤오시엔 감독을 만났다.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서 열린 ‘대만 뉴웨이브 영화제’에서였다. 이날은 영화 상영 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예정되어 있었다.(상영작은 [펑쿠이에서 온 소년]이었다.) 나는 상영시간 보다 좀 늦게 도착했다. 입장이 불가한 시간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극장 밖 공터로 나와야 했다. 쭈뼛쭈뼛 맴돌고 있는데 저 편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향해 왔다. 허우 감독과 차이밍량 감독이었다.((지금은 고인이 되신) 에드워드 양 감독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어찌나 가슴이 쿵쾅거리던지. 손과 발까지 다 부르르 떨었던 거 같다. 그들은 저쪽 구석진 곳으로 가 담배를 나눠 물었다. 지는 해를 등진 채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한참 서로 주고 받았다. 역광을 받은 그들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자아냈다. 기자들은 그 장면을 더 잘 담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나는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저만치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날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내겐 유독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조조는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내가 세상에 지겠다. 세상에 내가 복종하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사실 그때 나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렸고, 뜨거웠다. 세상에 맞서고 사람에 맞설 때였다. 나이 든 어른의 다소 비겁한 변명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저 말의 속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건 결국 사람과 세상에 예의를 지키겠다는 말이었다. 세상을 바꾸거나, 나서서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뜨겁게 응시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스스로만을 훈계하겠다는 다짐 같은 거였다. 그의 모든 영화들이 이미 그걸 소리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마스터클래스가 끝나고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었다.(단편 연출부 촬영 헌팅 중이었다.) 어렵사리 사진 촬영을 부탁드렸다. 그는 빙긋 웃었다. 뽑힌 인화지에 사인을 해준 뒤 내 두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내 모습이 아무래도 가여웠던 모양이었다. 뭉툭하고 작았지만 매우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저 사진을 보고 또 들여 보았다. 그리고 아직 내 손에 남은 온기를 되짚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때까지도 얼얼한 기분이었다.


2015. 7. 31.

존내 양아치


  학창시절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그건 누구보다 10세 이후의 내 모든 생애주기를 지켜 봐온 M군이 잘 안다. 그는 지금도 나를 그렇게 부른다. ‘쓰레기’ 내지 ‘존내 양아치’. 내가 어쩌다 ‘존내 양아치’가 되었는지 그 원인을 구태여 추적 한다면 몇가지 쓸만한 사연을 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라고 해서 그 야비하고 야만적이었던 내 지난 날들을 충분히 설명해주진 못한다. 우리 집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고, 나는 그 전까지의 삶에 어떤 강한 트라우마도 없었다. 그 시절 무엇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는지 해석할 필요를 못 느낀다. 별의미가 없을테니까. 차라리 감기처럼 찾아왔다고 해야할까. 그저 인정하고 살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존내 양아치'였다는 사실에 대해. 왜 아직까지 내가 그 시절을 지워낼 수 없는지에 대해.

  나는 소위 일진회 멤버였다. 젤로 잔뜩 쳐바른 기생 오라비 머리를 하고(그땐 왁스가 없었다), 교복 바지는 종아리 6.5인치로 바짝 줄인 채, 수돗가에 걸터 앉아 하교하는 아이들을 괜스레 꼬나 보는 일이 내 주 일과였다. 혓바닥엔 페인트 사탕이 물려 있는 일이 많았다. 학생부 지도 교사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을만큼 일진회와 그들 사이에는 모종의 알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아이들은 잘못도 없이 기죽어야 했고 우린 그걸 즐겼다. 눈을 제대로 깔지 않거나, 혹은 (내 기준에 조금이라도) 불경스런 모습을 비치는 아이들이라면 우선 눈도장을 찍어 두었다. 나중에 혹시나 그 아이가 자기 반에서 어떤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건 일진회 출동의 좋은 명분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게 정의고 우리의 일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이 학교의 중심이고, 이 학교의 질서는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식의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싸움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일진회에 가입될 수 있었느냐. 그건 간단했다. 싸움 잘 하는 애들 옆에만 있으면 되었다. 싸움 잘하는 능력은 일진회의 30% 멤버 정도만 갖추면 충분한 것이다. 나머지는 그들을 보조할 기싸움만 잘 해주면 된다. 눈빛, 발걸음, 행동가지 자체에서 풍기는 어떤 불량스러움. 그거면 된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교복을 심히 줄이고, 예쁜 여자애들을 옆에 끼고만 있으면 된다. 이따금 타학교 일진회끼리의 연합행사 때 얼굴 비춰 잔뜩 취해주고, 선배 일진들에게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만 잘하면 된다. 한마디로 야비한 꼬붕짓. 그게 그 시절 내 정체감의 전부였다. 이상하게도 성적이 잘 나왔지만(상위권) 그건 내 정체감의 중요한 바탕은 아니었다.(재수 없지만 사실이다.) 나는 그 시절 무엇보다 가학에 취해 있었다.

  이후에도 망나니 짓은 계속되었지만 중3 여름, 나로선 큰 전환이 된 사건을 만난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일진회 탈퇴를 선언했고 그에 상응하는 보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일진회 내부에선 일종의 계파 갈등 같은 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 싸움짱이 기싸움을 펼치고 있었는데, 나를 비롯한 꼬붕들은 어디에 줄을 설 것인지 곧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복잡한 정치게임이었고,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를 나갔다. 수돗가에 걸터 앉아 아이들을 꼬나 보면서도 눈빛이 전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진작 나는 어느 한 아이의 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아이가 더 셌기도 했고, 인적 네트워크가 넓었으며, 또한 선배 일진들 중 주류의 신임을 보다 얻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말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저쪽 편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항변하는 편지를 작성하기도 했고, 그에게 찾아가 일대일 대화를 요구한 적도 있으나 허사였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나를 왠만해선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저쪽 계파의 내 급 되는 아이와 싸움을 붙는 것이었다. 말도 안되는 일을 구실로 나는 결투 신청을 했다. 거기서 승리함으로써 나는 신임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 결투는 우리 학교 동네에서도 가장 큰 공원에서 펼쳐졌다.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정말 백 수십은 되는 아이들이 빙 둘러 결투를 기다렸다. 나는 이런 식의 상황에 내던져진 건 처음이었기에 많은 긴장을 했다. 내가 싸움을 걸었으면서도 내가 기싸움에서 지고 시작하는 게임이었다. 싸움은 단 5분 만에 끝났다. 완벽한 나의 패배였다. 나는 손가락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고, 호기롭게 웃음짓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걱정스러운 건지 실망한 건지 알 수 없는 여자친구의 얼굴을 봐야했고, 고놈 꼴 참 좋다며 속으로 배시시 거리고 있을 평소에 내가 갈구던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했다. 그러나 거기까진 좋았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싸움을 끝내려면 내가 졌다는 선언을 해야 했는데, 나는 나와 싸운 상대에게 찾아가는 대신 그의 대장에게로 갔다. “나 손가락이 꺾여서 더 못할 거 같은데”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더니 내 얼굴에 연기를 뿌렸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나는 한없이 깊은 굴욕의 늪으로 잠겨야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일진회를 탈퇴했고, 그 대가로 선배와 동기들에게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그런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거의 죽은 존재로 살았다. 한 학기만 버티면 졸업이 다가온다, 그때까지만 유령처럼 살자. 모든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비웃는 것 같았고, 내 존재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 인생의 가장 우습고도 힘겨운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추신 : 나의 악행사(惡行史)를 펼치자면 여기가 아닌 책 한 권의 저술이 필요할 것이므로, 더 긴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지난 날의 부채감으로, 또 지금 내가 먹고 입고 쓰면서 세계에 저지르는 착취에 대한 죄의식으로, 굳이 거창하게 말하면, 거기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이후 많은 시간을 살아간다. 많은 아이들을 괴롭혔고, 그중엔 물리적, 정신적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나를 변호할 생각이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무조건 죄인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그들이 아직까지 어떠한 앙심을 버리지 못한대도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직접 사과할 수 없음에 죄송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이따금 고백하며, 그 괴로움과 계속 살겠다. (2015)

2015. 7. 30.

사적 리스트의 은밀한 매력


  부산 국제 영화제가 20주년을 맞아 ‘아시아 영화100’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연다고 한다. 보도자료의 내용을 빌자면 이 기획은 ‘아시아영화의 가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보존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되었으며 ‘리스트는 5년마다 새롭게 업데이트 될’ 예정이고, 앞으로 ‘아시아영화의 미학과 역사 가이드는 물론 아시아의 숨겨진 걸작과 감독을 발굴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순위 선정을 위하여 ‘아시아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전세계 73명의 심사단이 구성’됐는데 여기엔 ‘저명한 각국의 영화평론가들과, 칸영화제 등 세계유수 영화제들의 집행위원장 및 프로그래머, ‘모흐센 마흐말바프’, ‘봉준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등 수준 높은 국내외 아시아영화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그 권위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영화제 측은 기대하고 있다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리스트들-이를 테면 까이에 뒤 시네마, 키네마 준보, 포지티프, AFI 선정 올해의 영화, 싸이트 앤 사운드 선정 100대 영화 등-이 올라오면 우선은 챙겨보는 편이다. 세계 영화의 동향도 나름 살필 수 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영화들과 접할 기회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유용한 DB 지도인 셈이다. 그 지형도의 한 축을 새롭게 만들어 차곡이 구축해 나가겠다는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선언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세계 최고의 아시아 영화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특화된 또 하나의 유용한 DB를 만들어 나간다면 영화 팬으로서도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기사를 읽고 나니 불현듯 과거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한 때는 저런 리스트들이 올라오면 거의 암송하듯 꿰고 다녔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선정 몇 년도 최고의 감독은?” 하면 가령 척하고 대답이 나오는 식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걸그룹(AOA입니다) 멤버 이름도 아직 못 외고 있는 요즘인데 말이다. 전만큼 저런 리스트에 주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발표가 올라오면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훑고 넘어가는 정도가 됐다. 내 영화적 안목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까닭에서일까? 이제 그런 오만을 떨어도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걸까? 아닐 것이다. 여전히 나는 좋은 영화들과 그렇지 못한 영화들, 좋은 영화와 더 좋은 영화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명확한 기준과 원칙 하에 판결 내리듯 올해의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신속히 가려내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럴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다. 여러 번 봐야 하고 여러 번 곱씹어야 한다. 그렇게해도 다섯 편 남짓의 ‘사적인 리스트’를 겨우 뽑아 올릴 수 있을까 말까다.

   그렇다. ‘사적인 리스트’. 저런 일종의 공식화되고 선언화된 리스트들보다 더 관심을 당기는 건 아주 사적인 리스트, 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를테면 웨스 앤더슨 감독이 좋아하는 10편의 영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인생을 바꾼 몇 편의 영화. 영화인이 아니어도 좋다. 이름모를 블로거의 사적인 글, 리스트 또한 못지않게 흥미롭다. 어떤 까닭일까. 앞선 공식화된 리스트들은, (스스로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떤 힘을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영화광이 되고 싶다고? 그럼 우선 이 무시무시한 리스트들부터 읽고 오렴!) 저런 리스트를 반복해 접하다보면 소위 ‘영화 전문가’라는 분들의 선호 패턴이라는 것이 어떤 윤곽으로 가늠되는데, (편견일 수 있으나) 그 패턴은 대개 ‘시네마틱함’ 그 자체에 경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 ‘사적인 리스트’는 권위의 무게보단 그이의 취향과 경험과 세계관이 더 부각돼 드러난다. [타이타닉]을 아끼는 사람에겐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업 다큐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또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 앞에,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민케인], [동경이야기], [게임의 규칙]이 최고의 영화 상위를 굳건히 지키는 저 리스트들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가.  

  지금 나는 비평가, 영화 전문가의 역할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의 죽음’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다. 일반 대중보다 (아무래도) 더 절제되고 냉정한 기준과 안목으로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이들은 아무리 ‘누구나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 하는 오늘날이라 하더라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다. 영화는 다른 예술 장르들-문학, 연극, 회화, 음악, 사진 등-에 비해 그 우월함을 주장할만한 단 하나의 근거도 없는 예술이다.(영화는 종합예술이란 주장이 있지만, 비빔밥이 냉면보다 우월하다는 내적 근거가 없듯 이 경우도 그렇다.) 오히려 영화는 가장 역사가 짧은 후발 예술로서, 그 문화적, 지적, 경험적 자산의 축적이 가장 빈약하다. 게다가 그것은 일정한 시대상황적 바탕-전세계적인 시민사회의 등장과 산업혁명 이래 기술문화와 자본주의의 성장-이 조건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았을 예술이기도 하다.(다른 모든 예술은 고대 이전부터 존재했다.) 결국 어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맞먹을만한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 존재증명을 하는 일뿐이다. 아무 영화나 그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좋은 영화’가 그렇게 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비평가의 역할은 지대하다. 수없이 쏟아지는 영화의 홍수 속에 남들보다 먼저 보고, 깊이 보고, 다시 보고, 그럼으로써 마침내 어떤 영화들이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만한 물건인지 분별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종 불편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평이 외부로부터 이런저런 이론과 담론을 끌어와 스스로를 되려 영화와 유리시키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 정점은 90년대의 잡지 [키노]였고,(그 잡지는 두 페이지로 충분히 전달되고 남을 내용을 스무 페이지로 늘려 담는 일에 각별한 재주가 있었다.) 이후 탄생한 매체들도 지금까지 저 영향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그만큼 [키노] 및 오남용된 포스트 모던철학의 힘이 대단했다는 방증도 된다.) 도저한 공부를 선행하지 않았다면 아예 이 영광스런 영화들의 명단에 접근할 생각도 말라는 듯, 그렇게 고압적이고 허세투성이인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직도 그 시절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론가들이 활약하고 있고, 업계와 학계의 선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이것이 쌍방향 소통시대의 도래와 권위주의 파괴 흐름과 맞물리면서 ‘비평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몰고 오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이며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편집의 애티튜드로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따라서 보는 이가 그 자신의 삶의 감각에 대입해 영화를 사적으로 바라보려는 그 시도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기엔 어떤 현학적 이론이나 비평적 수사도 의무가 아닐 것이다. 어떤 영화가 그 영화를 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가를 들여 볼 수 있는 글이 읽고 싶다. 그런 글과 리스트가 훨씬 값지다고 생각한다. 비평 분야 중에서도 인상비평을 좋아하는 이유이며, 또한 이름 모를 어떤 블로거의 일기 같은 영화 글을 더 선호하는 이유다.



2015. 7. 28.

신념의 선의와 그 실질 윤리




  한 선배와 통화를 했다. 오랜 시간 그를 알아왔고, 그가 천성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나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안다. 그 선배는 수년 째 한 국제구호단체에 기부를 해오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을 바탕하는 중요한 활동이다. 그는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곤 했다.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이 다섯이야.” 그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자식처럼 부른다.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직접 만날 것이란다. 그 아이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며, 작은 선물들을 감격에 젖은 듯 보여준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앞에서 나와 친구들은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늘 칭송하곤 했다.

  그러나 냉정히, 그건 그를 속이는 일이었다. 아동국제구호 웹페이지에 접속해본 일이 있는지. 그곳이 얼마나 ‘선의로 가득찬 폭력’을 전시하는가 목격한 일이 있는지. 첫 화면부터 마치 상품을 진열하듯,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 사는 곳, 장래희망 따위를 적어놓고, 아래엔 친절히도 후원하기 버튼을 달아 놓았다. 너무나도 경악스런 장면이다. 이젠 선의도 쇼핑을 한단 말인가? 저 아이들의 인격과 자존심은 도대체 생각된 바 있는걸까? 물론 모르는 바 아니다. 이리 각박한 시대임에도, 지구적 온정주의를 품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는 사람들의 선의를. 그를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의 노고를. 한때 관련 단체에 몸을 담았었고 그 일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있으므로, 또 후원자의 선의라는 게 그리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현지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라도 생계를 유지하길 원하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일이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불편하다. 지은 죄는 자기 삶으로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지 주일날 한 장의 헌금 봉투로 탕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빈곤 아동과 국제 소득 불균형, 생태 불균형 문제도 마찬가지다. 적선보다 우선 할 것은 지구적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우리 안의 탐욕과 폭력성에 대한 성찰이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 그들이 처음부터 시혜의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수천년간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구며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삶을 영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위엄을 빼앗은 건 힘있는 자들이었다. 지난 날엔 총칼과 포격이 그 일을 했다. 오늘날엔 전지구적인 천민자본주의가 빠르고 조용하게 그 일을 하고 있다. 거기에 어떻게 나 자신이 예외일 수 있을까. 이미 내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데. 그 반성과 실천의 바탕 위에(실천의 구체적인 방법을 다룬 책들은 시중에 많다.) 물질적, 활동적 나눔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방법만큼은 조심스럽고도 정교해야 할 것이다.

  주요 구호단체들과 그 참여자들은 아직도 이런 식의 적선이 매우 숭고한 행위라 믿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나눔 정신마저 희박한 세상을 살고 있으므로, 얼마간 인정 받을 행위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란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를 마치 어떤 명예라도 되는 양 자기 존재감과 공명심을 보조하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광경을 만들고 있는지 이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믿는 선의와 그 행위의 실질 윤리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015)


추신1. 경험해본 바 저런 돈은 대개 잘생기고 예쁘고 애교의 기술-편지, 선물 등-을 다양히 가진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그것이 현지에서 적잖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추신2. 선배에겐 아직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가 깊이 이 일에 의미를 두는데다 나 자신도 말처럼 옳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5. 7. 27.

우연의 마법




인간 이성의 촘촘한 기획을 신뢰하는 대신 우연과 운명과 욕망의 거대한 장난을 신뢰하는 편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가 무엇보다 우연의 마법을 그려내는 사람이라 좋다. 그 우연의 연쇄 속에 밥 먹고, 취하고, 섹스하고, 다투고, 삐지고, 외롭다가, 텅 빈 거리에 불시착하는 것. 다시 속을 줄 알면서도 또 살아보는 것. 그게 사실 우리 삶의 거진 전부 아닌가? 그렇게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언제나 “예쁘다"고 말하는 이 사람이 좋다.

추신. 이날 강연에서 어떤 여성 청중이 대뜸 마이크에 대고 요청했다. “감독님, 이따 저하고 술한잔 해주실 수 있나요?” 그가 대답했다. “네..뭐 그러죠.”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한 우산을 쓰고 어디론가 향해 갔다.

2015. 7. 19.

산책. 2015년 여름


산책. 2015년 여름









희망 타투


저런 모양으로 새겨보고 싶습니다만..
(점 두 개는 원래 내꺼임)


2015. 7. 17.

있을 유(有), 늦을 만(晩)


  있을 유(有)에 늦을 만(晩)자를 쓴다. 풀이하자면 ‘천천히 살아라’쯤 된다.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였을까. 놀림도 참 다양하게 들었다. 최초의 별명은 만보계, 만세, 만두 따위였다. 퍽이나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쩌다 분식집에 가거나 급식에 만두가 나오는 날이면 괜시리 내가 먼저 움츠러들고 그랬다.(그렇다고 만두를 싫어해 본 적은 없습니다.😂) 만원권, 만득이로 이어지던 별명은 중학교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표의형으로 진화했다. 뭘해도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었기에(군대에서 마저도!) 친구들과 선생님 양 편으로부터 ‘네 이름 참 자알 지었다'는 비아냥을 듣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건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이었고 그닥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못했기에. 그러나 ‘(결과는 없고) 이유만있다’ 식의 통사형 별명은 가장 오래 들어야 했으면서 가장 수긍할 수 없는 놀림이었다. 결과는 없었을지 몰라도 변명을 많이 하며 살진 않았다. 주관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였다. 그건 그저 내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만두나 만득이와 다를 바 없는 유치함으로 회귀한 거다. 하여간 나는 내 이름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며 살아온 거 같다. 아주 어렸을 땐 왜 내 이름을 이따위로 지은거냐며 자주 툴툴거렸다. 공동 책임자인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신문이나 야구중계 따위로 애써 눈을 돌리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늘 내 두 눈을 바로 보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네 이름은 아주 유명한 작명소에서 매우 많은 돈을 주고 지은 귀한 이름이란다. 그러니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단다.“ 할머니에겐 유명하고 비싼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유명하고 비싼 부적들'도 집안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야 했던건가 보다. 흡사 만신 집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베갯잎 속에도 아빠의 양복 속주머니에도 내 유치원 가방에도 곱게 접혀 들어 있었다. 우리가 할머니 집을 나와 독립하게 된 결정적인 사연이 되어 주었다.

  시간이 적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지금 저기 하늘나라에 계시다.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십 년 넘는 세월을 침상에 누워계신다. 그때 그 단호하고 우렁찼던 할머니 모습은 이제 없다. 이따금 할머니 허리 맡에 앉아 잠든 할머니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내 이름의 귀함을 역설하시던 그 눈빛이 떠오른다. 지금은 할머니가 구태여 그리 강조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내 이름을 아끼게 되었다. 있을 유(有), 늦을 만(晩). 천천히 살아가라는 뜻이다. 조금 돌아 가듯 사는 것, 그게 순리란다. 앞서가는 놈이나 뒤쳐져 따르는 놈이나 결국 긴 시간의 풍경 안에선 고만고만한게 아니겠냐, 질끈 그저 제 갈길 가다보면 뭐라도 되어있지 않겠냐. 나직이 내 이름을 발음해 볼 때면 어디쯤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해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