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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3.

아사코



불이 켜졌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진행자, 대담자가 들어왔다. [아사코]는 두 번째 감상이다. 올해 가장 이상했던 영화. 아직 반 년이 남았지만, 분명 그리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끌린 영화다. 비밀을 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감독과의 대화를 예매했다. 그러나 한 번 더 보고 나자, 구태여 그 비밀을 풀려 들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였을까. [아사코]는 매우 사실적인 톤으로 찍혔으면서도, 매우 느닷없고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제시하고 상황을 풀어간다. 바쿠와 아사코가 처음 사랑을 이루는 장면부터 그렇다.(어떻게 저렇게 연애를 시작할 수 있지?) 쿠시하시는 남의 집에 초대받아 잘 얻어먹고서도 느닷없이 마야의 연기가 제대로 형편없다며 호통을 친다.(그리고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빈다. 뭐지?) 마치 거기에서 만날 것이 불가피했던 운명처럼 (억지스레) 아사코와 하루요는 재회한다. 영문도 없이 사라졌던 바쿠는 흡사 유령처럼 (평온한 얼굴로) 아사코 앞에 다시 나타나고, 아사코는 그런 바쿠의 손목을 붙잡고 뭐에 홀린 듯 료헤이와 친구들의 곁을 도망쳐 나온다. 이 모든 비현실성과 비개연성들. 그러나 여기엔 이상한 리듬이 있다. 그것이 만드는 기묘하고 나른한 감각에 점차 설득 당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차라리 이 영화 전체를 ‘관계의 불안’, ‘일상성의 불안’에 관한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는 생각에 이끌리는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 모티프의 삽입이 (조심스러운 말이나)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문명사적 비극을 이용하려는 얄팍함이 없이, 그 불안의 체험을 관객과 함께 나누려는 조용한 야심이 여기엔 깃들어 있다. 하마구치가 앞서 도호쿠 3부작 다큐를 찍을 때, 재난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 모든 것이 한바탕 꿈만 같고, 환상 같다”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도호쿠는 집이 부서지고, 전기가 끊기고, 가족이 죽고, 하수구가 역류하고, 논밭은 헝클어지고, 곳곳에 썩은내가 진동하고,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는 울음이 이어졌다. 한복판에 놓였던 피해자들은 그 모든 비극을 다름아닌 ‘육체’로 겪어낸 사람들일 것이었다. 더 없이 실제의 감각으로 그 모든 비극을 통과했던 주민들이, 그러나 결국 전한 말은 그 시간이 '꿈' 같았다는 것, 한바탕 '환상' 같았다는 것이었다. [아사코]를 보는 동안 나는 저 관계의 불안, 일상의 불안에 나란히 동석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아사코]가 택한 이상한 방식 때문에 더 짙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경력의 상당 부분을 '다큐멘터리'로 채워온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나는 [아사코] 같은 '환상성의 영화'를 찍어냈을 때에도 그가 굳건히 견지했을 중심의 태도에 관해 질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행사의 시간은 짧았고 결국 나는 묻지 못했다.  





2019. 5. 30.

기생충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간 후, 장남 기우가 아버지 기택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는 내레이션 장면이 참 좋았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성공하겠다. (악착같이) 돈을 벌고, 어떻게든 이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어코 살아남고야 말겠다. 부자가 되겠다. 그리하여 그 집을 얻고, 당신과 만나겠다.' 우리 시대 청년들은, 80년대처럼 짱돌을 들 수도 없고, 공통의 목적의식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연대하기도 힘들다. 자칫 미끄러져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을, 상당한 불안을, 거의 태어남과 동시에 학습받고 체화하면서 성장해왔으니까. 혹자는 너희들 패기가 왜 없느냐, 이제까지 세상을 바꾼 건 언제나 젊은이들이었는데, 너희들은 왜 개인의 분노로만 수렴되거나, 아니면 그것도 못해 자학에 빠지고, 자기연민에 빠지고, 신경증이나 걸리고 앉았느냐, 라고 힐난한다. 알기는 알까.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아니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이들이 의탁케되는 길은 끝내 제도권 경쟁이라는 사실을.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공채, 수많은 시험들 시험들 시험들.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제도권 밖의 다른 방도를 통과해 '한탕'을 노리는 수밖에. 비트코인 광풍. 집단 최면의 풍경들. 하여간, 어찌되었든,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하여, 생 전체를 송두리째 내던져야 하는 일들이 이들에게는 전혀 심심치 않고, 전혀 과장인 일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구정물에 침수될 뿐인 집. 그런 삶. 그 '엄정한 냉혹'의 세상을 견뎌야하는 청년의 얼굴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최우식의 얼굴로 닫힌다. 그것이 너무나 좋았다. 좋았고, 서글펐다.





2018. 10. 7.

레볼루셔너리 로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았다. 10년 만이다. 그때나 이제나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하나다. "정말 지독하다." 도저하고 냉엄하게, 한 중산층 가정의 시작과 끝을 들여본다. 차곡차곡, 한톨의 불필요함 없는 축적과 리듬으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서로의 생활을 묻고 아이를 낳고, 회사에 다니고, 집을 사고,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마음이 어긋나고, 각자의 공간을 마련하고, 후회와 번민에 허덕이고, 다시 일을 하고, 섹스를 하고, 그러다, 그렇게 살다가, 이렇게 계속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이별을 선언하고, 다시 마음을 돌려보려하다가, 끝내 내 마지막 삶이 이래선 안되겠다는, 그래서 '어떤 결단'을 내리기까지. 이 모든 지난한 생활의 궤적과 심리의 추이를, 이 영화는 징그럽게 응시한다. 나는 군에서 막 제대한 20대 초반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물론 그때는 머리로 보았다. 반도 흡수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저들의 삶에 대한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 10년의 시간 동안 나는 연애의 부침을 겪었고, 가정 생활의 기초를 터득해가고 있다. 그 두 시간 축의 결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본 이 영화의 뒤에, 나는 어떠한 서툰 주석도 달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할 만한 짓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지난 10년 시간이 내게 남긴 유일한 무엇일 것이다.





2017. 9. 25.

서성거리기


1. [쓰리 타임즈] 틀어 놓고 빨래를 개다 불현듯 든 생각. '연애몽'을 무성영화로 처리한 까닭을 묻는 질문에 허우 샤오시엔은 이렇게 대답했다. 청대의 고어를 재현해낼만한 여러 여건들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꼭 십년 뒤 [자객 섭은낭]을 만들었다. 숫제 열 세기도 더 전인 당을 배경으로 해야했다. (대사수는 극히 적었으나) 똑 당대 언어로 발화되었고 그 점이 중화권 관객들에 (움직임 없는 무협영화라는 듯도보도 못한 형식만큼이나)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3.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다가서야 하는 일과 다가서지 말아야 하는 일(혹은 그럴 수 없는 일). 그들 틈 간에 허우 샤오시엔은 늘 서성인 채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7. 3. 22.

타이베이로부터의 선물


허우 감독님께서 결혼 선물을 보내 오셨다.
수잔은 손편지와, 열쇠고리와, 과자 꾸러미를 보내왔다.









2016. 5. 11.

곡성


[다우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장 수녀는 흐느껴 운다. “아직도 의심이 들어요. 의문이 든다고요.” 순백한 젊은 수녀는 함께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감싼다. 사태는 이미 종결됐다. 그녀가 그토록 의심하던 플린 신부는 쫒겨났다. 그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곡성]이 공포스런 이유는 거기에 광기나, 피칠갑이나, 좀비, 악마, 혼령이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차라리 가장 깊은 곳에서 스멀대는 도저한 무력감 때문이다. 이 지옥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을 기어코 직시시키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도, 판단하지 않고도, 이론과 종교와 과학 따위에 의탁하지 않고도, 인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않고도 이 세계를 견뎌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질문을 던진 채 끝을 맺지만, 관객은 한 켠에 묵시록적인 대답을 안고 돌아간다. ‘아니, 전혀.’ 오늘만도 나는 한 동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다. 그에 대한 평판이 있었고, 나는 그 평판 위에서 그의 작은 실책을 보았다. 확대경에 찍힌 사진처럼 그 장면은 머리에 남았다. 이토록 얄팍한 인식과 감정, 그리고 믿음이라니. ‘당신들은 아마도 계속하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곡성]은 말하고 있다. 

곡성


1. [곡성]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기 전 막연히 [소서러], [지옥의 묵시록] 류의 괴이한 처절함과 [사이비], [안개마을], [이어도] 류의 폐쇄 공동체적 광기와 음산함이 적당히 뒤섞인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다. 보기 좋게 희롱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레퍼런스를 쉬 대입하기 어려운 영화다. 강력하고 심오하며 정직한 영화다. 활짝 열린 창과 같은 영화다. 우리 사고와 행위가 추동되는 바탕인 믿음의 실체에 관해 질문하는 영화다. 자기 현시적 테크닉으로 일관하고 언뜻 심오해보이는 주제를 얄팍히 분칠한 어떤 경향의 영화들은 [곡성]을 보고나면 생각할 지점들이 많아질 것이다. 기분좋은 희롱을 경험한 관객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2(추가). 역대급의 해석들과 갑론을박이 쏟아질 작품임은 극장문을 나선 이라면 누구나 직감했을 터다.(물론 이 영화를 더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 한 해. 상당히 많은 수가 객석을 퉁명스레 털고 일어났다.) 개봉 첫 날임에도 반응은 역시 뜨겁다. 누가 누구의 편이냐, 누가 누구와 대립했느냐가 주된 논쟁의 양상인 거 같다. 감독이 ‘특정인과 특정인이 한 패'라는 식의 유권해석을 어디선가 흘린 모양인데(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누구와 누구가 진짜 악마였어,로 (아직까진) 논쟁이 쉽게 귀결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를 넘어선 매우 다층적인 고민거리를 안긴다. 누가 악마여도 좋고 누가 악마가 아니어도 좋은 지경까지 간다. 모두가 악마가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믿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 그 자체에 관한 징그러운 탐구. 그 끝에 도달한 곳은 거대한 무력감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영문도 없는 불행과 무력감. 영화 전체가 거대한 현혹(환각)이라고 느꼈다. 그 느낌에 관해 언젠가 정리해보고 싶다.   

2016. 4. 3.

불면의 밤



차례대로 [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


  기자가 물었다. “아직까지 거리를 지키시는 이유가 뭐죠?” 여인이 대답했다. “제 영혼 하나만큼은 지킬 수 있으니까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가 일었다. 세계 경제를 파탄에 몰아 넣고도 저들은 숨어 배당금 잔치를 했다. 하지만 분노는 영원할 수 없었다. 동력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갔다. 하나 둘 거리를 떠났다.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단지 한 줌의 사람들만이, 그러고도 한동안 거리를 지켰다.

아무리 싸워도 승산이없다 직감할 때,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어 줄 수 없다 의지케 되는 한가지는 ‘자기 영혼'이다. 그래 이거라도 지켜내자. 이 간신한 불씨마저 사그라진다면 내 삶도 함께 끝장나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과 한둘로 특정할 수 없는 일상의 적들 앞에, 우리는 마지막 구원처로 '내 안의 평화'를 희구한다. 그렇게 회사를 견디고, 연애를 감당하며, 아이를 키운다. 이 길의 궁극엔 타인마저 불필요하다. 결국 '내가 있고, 남이 있다’. 단지 삶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수행을 찾고 닦아야 하는 길을 걷는다. 모두는 얼마간 구도자가 된다.

  차이밍량의 승려 3부작-[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은 구도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붉은 천을 두른 승려가 있다. 그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걸음이 매우 느리다. 아주 간신히 한 걸음씩을 뗀다. 어찌나 그 속도가 느린지 단 열 개의 계단을 밟는 데 5분의 시간이 걸린다. 저 이름 각오했다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얼이 빠질 무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승려의 곁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그를 흘끔거리거나 무시한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열차가 지나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려는 한결같다. 시종 정지화면에 가까운 한 걸음을 겨우 내딛는다.

그는 지금 수행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왜 하필 타이페이 한복판이란 말인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도시의 일상과 붉은 천의 승려를, 지독한 차이로 대비해 보여줄 뿐이다. 이게 [행자]라는 영화의 전부다. HDV캠으로 찍었고, 조명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폰으로 찍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서유]는 배경만 달라질 뿐(프랑스) [행자]와 똑같은 영화다. 똑같은 승려가 똑같은 걸음을 걷는다. 서양 사람들이라서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똑같이 무시당하고 이따금 흘깃거림을 당한다. 군중 속의 (광대 같은) 수행자. 차이밍량은 무슨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군. 세상의 선호와 가치와 속도가 무엇이건 자기의 걸음을 걷는 사람의 이야기. 간편한 해석이기도 했고, 손쉬운 교훈이기도 했다. 다르게 볼 여지가 크게 없는 영화이기도 했다. (정말 위에 나열한 장면들이 전부인 영화다.) 동시에 일상의 수행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보였다. 지독한 세계를 살아내야 하는 건 당신들입니다. 이 승려를 스치지만 마시고 얼마간 무언가를 느껴보십시오. 차이밍량의 주문이 들리는 듯했다. 말하자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김민희가 말했던 ‘루틴’같은 것. 그녀는 매일 화실에 나간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곧 망해버릴 것 같”다고 했다. 승려의 걸음은 곧 나의 루틴을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러나 [무무면]을 보고 말았다. 이 영화에도 역시 똑같은 승려가 나온다. 똑같은 붉은 천, 똑같은 느린 걸음. 그러나, 세 번째 장면부터, 앞선 두 영화와는 전혀 새로운 영화가 된다. 화면 가득 지하철의 창 밖이 차오른다. 타이페이의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쉴새없이 스쳐 흐른다. (이 연작에선 물론이고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에서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속도감이 몇 분 간 지속된다. 화면 밖에선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일상음도 들려온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승려의 시점쇼트일 것이다. 승려는 그 긴 수행을 마치고 지금 ‘퇴근’하는 길이다. 무려 세 번째 영화 만에!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모두 24시간 사우나에서 벌어진다. 승려는 발가벗고 탕에 지친 몸을 누였다가 사우나로 들어간다. 스키니한 몸매의 한 청년이 나오지만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여자가 사우나 수면실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고,(이 장면은 물론 뜬금없다. 그러나 어찌나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길게 담아내는지, 보는 사람이 다 긴장이 되는 지경이 된다.) 드디어 승려가 수면실로 들어온다. 몸을 누이고 이불을 끌어 당긴다. 그도 잠에 들지 못한다. 무무면(無無眠). 영어제목은 No No Sleep이다. 눈은 감았으되 잠에 들지 못하는 승려. 그는 끝내 잠들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앞선 두 영화([행자], [서유])에서 나는 희망과 교훈을 읽었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빛을 지키는 일. 이 지독한 세계에서 우리가 죽거나 아주 나쁘지 않고 그런대로 살아나가는 일이, 저마다의 수행과 구도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보았다. 두 편을 보고 났을 때는 뭔가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고, 일상에 복귀해서도 그 에너지를 나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무무면]은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앞의 희망들을 처음부터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세계는 이토록 시시각각 어두워지는데, 우리는 정말 어디까지 싸워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였다. 승려가 지하철 창 밖으로 보았던 세계는 그의 지난 수행을 완벽히 무력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가공할 힘의 세계였다. 수행은 그토록 지난하고 어려운데, 폭력은 너무도 빠르고 간편하다. 언젠간 편한 잠에 들 수 있을까? 내 영혼 하나만이라도 건져낼 수 있을까?


추신 : 세 영화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2016. 3. 18.

비워진 자리에 채워지는 것


지아장커 [산하고인] 중에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이다. 확실히 그랬다. 사랑에 앞서 방법을 고민했을 때, 줄곧 나는 실패했다.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산하고인]을 저평가하는 이들도 결국 이 맥락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식을 먼저 앞세웠다는 것.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 뭐하나. 슬픔을 보여주려는 액자가 먼저 둘러쳐 있는데. 그랬다. 거기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플롯의 측면, 화면 비의 측면. 삶이 어떻게 선형적인 서사로 그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고, 삶이 어떻게 표준화면에서 시네마스코프로 (균등히) 번져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의한다. 확실히 이 영화는 지아장커의 전작들과 다르다. 나는 특히 99년을 다룬 에피소드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아직 돈의 폭력에 물들기 전 저들의 사랑, 우정은 지나치게 매끈한 드라마로 전개된다. 그랬을 뿐 아니라, 전에 볼 수 없던 얕은 심도의 화면과 팬, 트래킹 등 촬영술의 유려함이 전시된다.(이제껏처럼 유릭와이가 찍었다.) 99년, 2014년, 2025년 세 시대를 통과할 때마다 화면 비가 달라진다. 불평들은 충분히 그럴만하다. 나도 낯설었고, 왜 이랬을까 싶었다.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영화의 중반.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던 주인공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이 점이 이상했다. 탄광 노동자 리앙즈.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성공한 친구에게 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탄광 노동자다. 그의 삶은 위태롭다. 탄광은 언제 문을 닫을 지 모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사이 그는 큰 폐병을 얻었다. 수술을 위해 아내, 갓난 아이와 큰 도시로 올라온다. 그는 누워 쉬고, 아내가 돈을 빌리러 나선다. 그녀가 찾은 사람은 리앙즈의 옛 사랑 타오다. 타오는 진솅과의 결혼 이후 제법 큰 사업체를 갖게 됐다. 사연을 전해 듣고 리앙즈를 방문한다. 진솅과의 이혼, 아들 양육권까지 내준 소식을 전한 뒤 그녀는 품에서 돈 뭉치를 꺼낸다. 그는 그 돈을 거절할 수 없다. 살아야 한다. 굴욕감이 들지만 사치를 부릴 순 없다. 고맙다고 넙죽 받는다. 이 장면은 슬프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리앙즈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일이다. 줄곧 영화가 그의 감정선을 따르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타오와 그녀의 아들 달러의 이야기다. 달러는 아버지를 따라 새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호주로 유학 보내졌다. 타오는 달러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부른다.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리앙즈. 그는 왜 그렇게 퇴장해야 했을까. 이 질문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아장커의 전작들은 모두,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나가는가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릴 적 친구를 잃고도, 또한 건강과 앞날까지 잃고도) 리앙즈가 어떤 삶을 이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지아장커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돈으로 수술은 잘 받았는지, 그랬다면 다시 탄광으로 복귀했는지, 아니라면 무슨 일을 얻게 되었을지, 아내, 아이와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이야기가 계속돼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과감히 그를 떠나 보낸다. 그 결단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려온 세계를 닫은 대신 새롭게 열어 젖힌 세계는 무엇일까. 비워내고 그 자리에 대신 채운 것.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시, 타오와 달러. 모자는 함께 장례를 치른다. 달러는 생모 앞에서 자꾸 빌려 온 아이처럼 군다. 그 모습이 타오의 가슴을 후벼 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달러는 이제껏 생모인 타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사흘의 시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구축하기에 너무 짧다. 그 점을 타오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덤덤히 말한다. “달러, 넌 아빠랑 사는 게 나아. 아빠랑 살면 국제학교도 가고 유학도 갈 수 있어.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어.” 이 장면도 슬프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엄마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배경은 2025년 호주가 된다. 달러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 아버지 진솅은 고집불통이 되어버렸고, 새엄마는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온갖 풍요에 둘러싸여 있지만 달러는 공허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다. “어머니 이름은 뭐니?” “전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없다니 그럼 넌 뭐니?” “저는 시험관 아기에요.” “그래도 엄마는 있지.” “그럼 선생님 이름은 뭐에요?” “(사실) 나도 잊었어!” 달러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앞길을 알 수 없지만 대학은 관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에 진솅은 격노한다. 급기야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달러는 집을 뛰쳐나와 선생님과 여행을 떠난다. 가장 낭만적인 순간에, 그는 그녀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 둘은 잠자리를 한다. 달러에게 선생님은 여자이자 엄마다. 오롯이 홀로 서기 위해서는, 친밀한 타인의 도움이 얼마간 필요한 법이다. 선생님은 그러나 둘의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 두렵다.(달러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 아이와 더 깊은 사랑은 안 돼. 그녀는 달러를 친모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달러의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결정에 달러는 실망과 두려움을 느낀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지아장커의 관심이 한결 같다는 데 안도했다. 그는 리앙즈의 남은 이야기를 멈춘 자리에 달러의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 리앙즈는 ‘이미 잃어 버린 자’고, 달러는 ‘앞으로 잃어갈 자’이다. 그간의 세계가 ‘상실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풍요의 자리에 무엇이 비어가는가’를 다룬다. 결국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의 연민은 계속된다. 물론 이 영화는 도식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단점들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는 서정이 있다. 그 서정의 순수성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 서정은 귀한 것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온 지난 영화들과 이 영화와의 관계망 속에서 찾아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모 평론가는 “영화는 개인적 야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며 단죄하듯 이 영화를 폄훼했는데,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가 지키는 야심은 무엇이며 그 삶의 순수성은 어느 수준으로 견지되어 왔나. 그 궤적을 묻고 싶다.) 형식이 앞섰다는 애초의 지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특히 화면 비의 문제. 나는 화면비가 확대돼 나가는 것이, 그의 치기어린 형식주의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감정들과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이 양 옆으로 길어질수록 인물 간의 정서도 이격되어간다고 느꼈다.(허우 샤오시엔이 표준 화면으로 [자객 섭은낭]을 그리지만, 칠현금 장면에서만 비스타 비젼으로 확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만의 까닭’에서 지아장커는 화면 비를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타오, 리앙즈, 진솅이 한 데 모여 집단군무를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때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텅 빈 자리를 그저 응시한다. 진솅은 여전히 놈팽이 짓을 할 것이고, 선생님은 안전한 생활로 복귀할 것이다. 달러는 티켓을 받아들고 고민할 것이고, 타오는 기다림의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리앙즈는, 모르겠다. 살아있다면, 그의 가족들과 행복했으면 좋겠다. 부디.

2016. 3. 4.

불확실한 화해


  예술로 타인의 삶에 근접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멋진 일이다. 나의 세계는 협소하다. 스스로에 머물거나 독단에 잠겼을 일들을, 그들은 멈춰세우고 돌아보게 한다. 알 수 없었거나 보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그들은 기어이 보게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인간의 삶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야.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간접 경험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러니까 세 배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10년 전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적잖은 나의 구성이 좋은 예술에서 왔음을 수긍할밖에 없다.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정말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요즘 나는 영화를 볼수록, 책을 읽을수록,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볼수록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 잡힌다.


  나는 중산층에서 나고 자랐다. 적당한 문화 자본과 교육 자본, 사회적 자본을 취하며 살았다. 내 노력도 없진 않았지만 주어진 것이 훨씬 많았다. 현실에선 그만큼만 생각하고 그만큼만 보는 일이 많다. 주어진 세계의 힘은 과연 세다.

지아장커를, 김기덕을, 어어부 프로젝트를, 프란시스코 고야 등을 보고 듣는 일로 부식됨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통해 폭넓은 이해와 감수성을 기여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오만. 그 나르시시즘.

정말 나는 그들을 이해했을까?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일까? 부끄러움이 엄습해온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그조차도 물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예술들은 되려 나를 기만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이해라니. 내 사람들도, 내 자신도 이해 못하는 내가 하물며.

씨네필과, 다독가와, 미술관 순례객은 내가 정말 되고 싶지 않아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타인의 인생을 수집하듯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성찰의 도구라 둘러 세우긴 했으되 냉정하게 그건 소비였다. 타인의 삶에 대한 소비.

  이창동의 [시]는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다운 영화다. 그러나 딱 한 장면, 양미자가 죽은 소녀에게 추모시를 바치는 장면은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양미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녀가 죽었던 강가로 카메라가 슬금슬금 걷는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했을 풍경들이 스친다. 그리고 갑자기, 양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어 들린다. 잘못 들은 것일까?

가해 학부형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의 말, “시를 쓰세요? 근데 시는 왜 쓰세요?” 이창동은 이에 대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양미자는 무력한 시편으로 그렇게 죽은 소녀와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혹한 세계에 무력한 칼날이나마 들이 겨누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너무 감동해서 자리를 오래 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그렇게 쉽게 합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확신이 없다.

2016. 2. 14.

진보마초란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있었다. 그럼에도 회의 시스템은 매우 성실히 유지됐다. 그만큼 우리가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할 필요 때문이었다. 나는 회색분자였다. 이것도 옳은 것 같았지만 저것도 옳은 것 같았다. 이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지만 저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앙칼진 답이란게 있었으면.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랬다면 그토록 눈치보며 괴롭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확해야 하고 묵직해야 하고 단호해야 한댔다. 모든 게 실행을 위한 준비이므로. 발을 내딛고, 구호를 외치는 일에 망설임은 최대의 적이었다. 한 번 전선이 세워졌으면 진탕 휩쓸려 싸우고 돌아와야 했다. 그게 우리의 일이었다. 그 시절 써냈던 수많은 성명서, 선언문들.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나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채로 쓰고 썼다. 그게 내 입장이 되었고, 행동의 준칙이 되었고, 삶의 구성이 되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그 단체를 나왔다. 그곳은 나름 신사회운동을 지향하는 곳이었다. 노동가를 부르거나 빨간 조끼를 입지 않아도 되었다. 생태, 여성, 탈핵, 자급자족, 제도교육 거부 등을 지향하는 고상한 곳이었으니. 제3세계 좋은 음악을 들으며 이반 일리치를 읽고, 에른스트 슈마허를 강독했던 곳. 우리는 순수히 현재를 사랑했고 미래를 낙관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미련없이 돌아나왔다.

  운동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운동만으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절실히 깨달았다. 그 믿음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 하나 뿐임을, 나는 처절하게 배웠다. 온갖 멸시 속에서, 시선의 폭력 속에서. 운동은 실행이고, 실행은 부득불 힘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은, 조직적으로 규합될 필요가 있을 때, 결코 다양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작은 소리는 제 영역을 얻기 위해 투쟁 안의 투쟁을 해야 한다. 운동은 태생적으로 마초다. 여성 운동가들은 늦든 빠르든 남성성을 체현하게 된다. 거기엔 거의 예외가 없었다. 더 강한 옷을 입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힘으로 움직이는 모든 집단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유형의 조직뿐 아니라 가상의 조직에서도.

  나는 이 자매들을 사랑한다. 이 자매들은 멋지다. 누구보다 집단과 사회의 근원적 생리를 간파한 사람들이다. 그랬을 뿐 아니라, 거기에 맞는 오직 자신들의 실천을 한다. 이게 섹시한 진보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런가. 그녀들의 발언에 나는 여러차례 고개를 숙였다. 내 안에 지워내지 못한 가부장성, 쓸데없는 권위 의식을 그녀들은 돌아보게 했다. 많이 털어냈다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한참은 더 털어야 한다. 끝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다.



‘효녀연합’ 홍승희, 홍승은 자매 인터뷰 “진보 마초란 있을 수 없다”고영득 기자 godo@kyunghyang.com 
‘대한민국효녀연합’ 홍승희씨(26)는 최근 ‘여성비하’ 논란으로 시달렸다. ‘사회적 예술가’인 홍씨는 소녀상 시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각에서 그의 활동보다 외모와 여성성을 부각시켰다. ‘얼굴 이쁜 개념녀’라는 여성차별적 시선은 물론 ‘효녀연합’을 지켜주겠다는 ‘오빠연합’까지 등장했다. 이에 대해 강원 춘천에서 ‘인문학카페 36.5도’를 운영중인 언니 홍승은씨(28)는 “내 안의 아베나 어버이연합은 보이지 않느냐”고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동생을 들들볶아 페미니스트 만든다’는 따위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 조롱들 대부분은 진보적 정치 성향의 남성들로부터 나왔다.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홍 자매를 둘러싼 공방전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은 11일 홍 자매와 인터뷰를 했다.
홍 자매는 최근 논란에 대해 “차라리 일베같은 사람들이나 커뮤니티로부터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대승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을 마녀사냥하고, 벌레 취급하는 것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던 진보가 무엇인지 의심하고 회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진보운동을 보수·진보의 양자구도로 바라보는 ‘편의 논리’가 낳는 폭력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진보마초란 있을수 없는 단어다”라며 “성찰없는 진보는 생각없는 보수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 자매는 “스스로 성찰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며 “우선 나부터 내 안의 여성혐오와 자기혐오의 정서를 성찰하고 내 삶을 회복해가려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더 이상 이미지화 되기 싫다”는 인터뷰이들의 요청을 수용해 홍 자매의 얼굴 사진은 게재하지 않았다.
-최근 SNS상에서 자매를 놓고 ‘여성비하’ 논란이 발생했다.
홍승희 “여성혐오 정서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성혐오란 여성들을 대상화·도구화하는 정서를 말한다. 효녀연합을 두고 ‘개념녀’, ‘미소녀’라고 이름붙이고 젠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꼴페미’, ‘메갈충’이라고 이름붙이는 것도 그렇다. 온라인에서는 이것을 마치 놀이문화처럼 즐기고 있다.”
홍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여성이 남성을 위안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온 극단적 성적 대상화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온 효녀연합을 ‘미소녀’, ‘개념녀’로 명명하는 미디어와 일부 여론의 동향은 문제의 본질을 또다시 반복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지적하자 ‘꼴페미’, ‘벌레 같은 페미니스트’라고 조롱당했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한국사회 여성혐오의 한 모습이다. ‘오빠가 허락한 사회운동’,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말처럼 운동진영 내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다. 운동진영 내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표현의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본인들에 대한 비아냥 글들이 게시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을 때 심정은 어땠나.
홍승은 “글을 쓰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인 줄 몰랐다. 원색적이고 조롱섞인 말들을 볼 때마다 ‘묻지마 폭행’을 당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아팠다. 온라인상 폭력이 개인에게 얼마나 큰 인격적 상해를 입힐 수 있는지 체험했다. 차라리 일베같은 사람들이나 커뮤니티로부터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나름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대승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을 마녀사냥하고 벌레 취급하는 것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던 진보가 무엇인지 의심하고, 회의하게 되었다.”
홍승희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 특히 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상식적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언니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언니가 아닌 오빠였다면, ‘동생에게 질투심이 있다, 열등감이 있어서 저런다’라고 말했을 것 같지 않다.”
-일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넘어 ‘표현의 폭력’을 행사하는 심리적 기제는 뭐라고 보나.
홍승은 “온라인의 익명성이 훈련되지 않은 자유의 이름으로 남용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서로 간의 책임이 있어야 하고, 문제가 일어났을 때 시스템상 그것을 제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두 가지 다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도 큰 작용을 했다고 본다. 페미니즘을 휴머니즘과 다른 개념으로 보고, 어떤 이익추구나 편협한 생각 정도로 보는 정서가 만연하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나 생태운동과 같다고 본다.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선택적 정의가 아닌 모두가 젠더 이전에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기를 원하는 보편적 정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불편함을 ‘예민하다’, ‘꼴페미다’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안타깝다.진보운동을 보수·진보의 양자구도로 바라보는 ‘편의 논리’가 낳는 폭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편’에 도움이 되는 말은 적극 수용하지만, 모두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젠더에 대한 문제제기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 편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란 무엇인가.
홍승은 “여성혐오는 여성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모든 문화를 말한다.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자니까 무엇을 해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감상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등 ‘만들어지는 여성’을 거부한다. 그러한 시각을 통해 성녀와 창녀를 구분 짓고,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 전에 대상화하는 모든 행위를 여성혐오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이 일부 진보성향 남성들의 여성혐오가 본질이라고 보나.
홍승희 “맞다. 여성혐오는 이념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사회를 바꾼다는 이들조차 여성혐오 발언에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할 만큼, 여성혐오의 정서는 은밀하고 구조적이다. 그래서 진보진영에서조차 젠더문제는 대승적인 정치사안보다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진보 내부에서 존재하는 여성혐오 원인은.
홍승희 “진보진영에서 젠더문제는 노동문제, 통일문제, 국제문제 등의 대의보다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문제다. 사소해보이는 일상조차 변혁하지 못하는 운동에 아무리 대의명분에 따라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해도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삶을 등진 혁명’보다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문화혁명’이 더 절실한 이유이다.”
-일부 정치적 사안은 진보성향이라고 해도 여성차별적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진보라고 불러야 하나.
홍승희 “맞다. 진보마초란 있을 수 없는 단어다. 젠더감각은 인권감수성의 기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느끼는 것이 진보의 기본이다.”
홍승은 “소수자, 다양한 사회의 목소리를 귀 기울이지 않고 진보는 없다. 성찰없는 진보는 생각없는 보수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소녀상 지킴이 활동이나 인문학 카페를 운영하면서 여성혐오적인 체험을 한 적이 있나.
홍승희 “효녀연합 활동을 하면서 언론은 ‘개념녀’, ‘미소녀’ 등의 이름을 붙였다. 국정교과서 1인 시위를 했을 때도 ‘광화문녀’, ‘시위녀’ 등으로 기사화된 적이 있었다.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여성성만 부각되어 유통되는 것이 불쾌했다. ‘촛불소녀’도 마찬가지다. 사실 인간으로서 행해왔던 모든 활동에 꼭 ‘녀’의 이름이 붙는다. ‘‘얼굴도 예쁜데 개념도 있네’ 혹은 얼굴은 예쁜데 개념이 없네’ 등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를 항상 포함시키는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다. 최근 오빠연합 같은 경우에는 ‘효녀연합을 지켜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성을 남성에게 지킴을 받는 존재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관점이다.”
홍승은 “인문학카페를 운영하면서 특히 여성리더이기 때문에 마주하는 편견이 있다. 여성은 감상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남자 후배들을 종종 목격한다. 실제로 같은 말을 남자 선배가 이야기하면 수긍하면서 내가 이야기하면 여자니까 만만하게 보거나 비이성적이라고 비난하는 경우를 목격한다. 여성은 사회운동 중 발생하는 경제문제를 나중에 결혼하면 해결할 수 있으니 마음 편히 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도 듣는다. 나는 남편에게 기대면 되니까,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일상적으로 카페에 찾아와서 마담취급을 하거나,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하는 남성들을 자주 접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왜 뿌리깊은가.
홍승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것이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혐오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화되지 못한다. 그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꼴페미’가 되거나 ‘개념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혐오는 잘 해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여성혐오는 여성들 스스로에게 자기부정의 감정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도록 교육받아온 여성들은 여성혐오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여성혐오를 줄일수 있는 대안이 있을수 있는가.
홍승희 “나부터 각성하는 수밖에 없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각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새로운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고민 중이다.”
홍승은 “스스로 성찰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나도 여성으로 교육받으며 가지게 된 코르셋을 벗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다. 그래서 더욱 여성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모든 인간이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한 인격체가 되기를 바라는 페미니즘이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관점에서 모두에게 통용되길 바란다. 페미니즘이라는 언어의 편견을 벗고, 제대로 알아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는 한국사회는 어떤가.
홍승희 “상처가 많은 사회다. 여성혐오 기저에는 열등감과 죄책감이 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너무 많은 폭력을 목격하며 자란다. 이 상처를 이야기할 곳이 없다.”
홍승은 “한국사회 가장 큰 문제는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것이라 생각한다. 질문 없이 열심히 삽질하는 보수 세력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보운동을 하는 우리 역시 언제부턴가 ‘왜’라는 질문 없이, 관성적으로 운동을 해온 건 아니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다. 이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질문과 주저함이 사라지는 순간,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다. ‘핵심적인’ 사회문제가 있고, ‘부차적’ 사회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유는 끝나고 파시즘적인 운동방식으로 변질될 수 있다. 끊임없이 성찰하며 활동을 해야만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뭔가
홍승희 “모든 사람이 직업, 나이, 성별, 인종, 종교, 국가, 학력, 연봉, 주거, 지역 등과 같은 조건에 상관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고 존중받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게 무너졌기 때문에 사회가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한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란 피켓을 들고 어버이연합 회원들과 맞섰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홍승은 “애국, 국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국가를 사랑한다’, ‘민중을 사랑한다’는 말은 매우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권이 사실은 주류계층의 권리에 한정된 개념일 수도 있다는 말을 접했다. 국가나 민족의 동질성이 강조됨으로써 개개인의 정체성과 각자의 당면문제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애국이 아닌, ‘어떠어떠한 인간에 대한 사랑’, 자신의 위치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문제제기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본다.”
홍승희 “예전에는 애국, 인류애 등을 쉽게 말해왔다. 이제 애국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삶을 대한다. 애국이라는 대의와 사명감으로 시작한 애국이 얼마나 자기를 소외시키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는 보수우파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도 보여줬던 위험성이다. 아이들을 구하지도 못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부르짖는 애국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지금 한국사회가 보여주고 있다.”
-홍 자매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홍승희 “폭력이 없어질 수는 없다. 적어도 이 폭력 한가운데서 더 많은 폭력에 기여하거나 타협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누구도 폭력을 고발하는 데에 소외되지 않는 세상, 혼자서 분노하고 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홍승은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모두가 외롭고 불안하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결핍이 자꾸 개인에게 흐른다. 열등감과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문제다. 학벌, 직업, 돈, 성별, 외모, 장애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세상을 꿈꾼다. 스스로가 당장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주위부터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망을 조금씩 확장해가고 싶다.”
-앞으로 무엇에 집중할 생각인가.
홍승은 “인문학카페 36.5도를 운영하며 지난 2년간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다. 이제는 ‘우리의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담론을 확산하고 발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나’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찰하고 글을 쓰며 계속 사유를 점검하고 다듬을 계획이다. 이러한 글쓰기 문화를 확산하고 독립출판 등을 통해 공론화함으로써, 사적인 목소리가 공적으로 전환되는 통로가 되고 싶다.”
홍승희 “효녀연합 퍼포먼스 이후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해온 운동방식을 성찰하게 됐다. ‘정치혁명’ 이전에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승적인 대의명분 이전에 사소하다고 치부해온 폭력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이자 해결방법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온 젠더문제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젠더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기초적인 인권감수성의 회복 문제다. 모든 사람들이 젠더감감을 회복할 때, 세상의 본질적인 변화가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운동, 여성운동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우선, 나부터 내 안의 여성혐오와 자기혐오의 정서를 성찰하고 내 삶을 회복해가려 한다.”

2016. 2. 12.

춘절 선물


감독님께서 새해 선물을 보내오셨다.












2016. 2. 7.

사람이 보이는 글


  도저한 구조비평, 형식비평을 갈수록 못읽겠다. 기력이 달려서일까. 한때는 정성일 씨의 (수십 페이지짜리) 쇼트 단위 분석비평도 좋아했고(헉헉 대며, 뭥미하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같은 책들도 (괜히 폼잡는답시고) 열심히 품에 끼고 다녔더랬는데. 물론 비평은 여전히 다양해야 하고, 그중 어떤 건 정말 끝간데 없이 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의한 발견을 위해라면 난해함이 아니라 난해함 할아버지라도 기꺼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갈수록 내 영역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에너지의 문제인지, 취향의 문제인지 잘은 모르겠다. 정말 궁금해서 찾게 되는 일 아니고는 거리를 두게 된다. 대신 좋은 인상비평이나 이름모를 블로거의 사적인 글 따위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글쓴이와 작품 간의 관계맺기가 오롯한 흔적으로 남은 글. 그런 글은 거의 웬만하면 환영이다. 서투른 문장이어도, 통찰이 깊지 못해도, 다소 허세가 있어도 사람이 보이는 글이라면 다만 좋다. 김영진 씨는 아마도 영화 인상비평계의 가장 뛰어난 국내 필자일 것이다. 그의 오랜 팬이었다. 이번 글 역시 좋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이라 무단 전재, 배포한다.)

장면의 의미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_ 허우샤오셴 감독의 ‘섭은낭’ (한겨레 2월 3일자)
  한때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꽤 많이 진행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요 몇년간 거의 하지 않았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만 하는 정도였다. 평론가로서 하는 극장에서의 작품해설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인정상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관계의 지인에게 들어온 청탁일 때만 한다. 이 일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더 심해진 경향이라고 느끼는데, 한국의 관객은 유독 영화에서의 의미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장면을 그렇게 찍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는 ‘그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감독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객석의 질문이 상당하다.
  허우샤오셴의 섭은낭은 영화의 서사와 장면의 구성에서 의미의 퍼즐을 찾는 관객에겐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 번 봐서는 또렷이 감지되는 줄거리가 없으며 감독이 그걸 부러 신경쓰지 않고 흐려놨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허우샤오셴 감독과 이창동 감독의 대담 자리에 사회자로 불려나간 건 순전히 두 감독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지방 출장을 갔다가 올라가는 길에 많이 후회했다. 별로 할 말도 없는 자리에 나가 또 쓸데없는 품을 팔겠구나 걱정했다. 무엇보다 필자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해 크게 묻고 싶은 말이 없었다. 섭은낭의 알맹이를 다 알아차렸다는 게 아니라 두 번 보고 난 후에도 언젠가 또 보고 싶은 영화일 뿐,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뭔가 묻고 싶은 건 없었다.
  행사 당일, 허우샤오셴, 이창동 감독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부터 사석에선 사소한 농담들이 오갔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별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 ‘불면증 환자를 위한 건강 영화’로 자신의 영화를 평하면서 주로 자신 주변의 일상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창동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화 미학을 운운하는 어떤 자리보다 공기는 농밀했고 그 두 분의 영화에서 느끼는 삶에 대한 질박한 통찰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처럼 그날 경험은 내 마음에 잔잔한 공감의 무늬를 남겼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관객들이 던진 질문의 수준은 높았고 진지했지만 역시 의미의 협량함에 경도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대체로 품는 의문에 대해 허우샤오셴은 풍부한 예시를 들어 답하곤 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에 갑자기 화면 크기가 변한 까닭에 대해 그는 등장인물이 켜고 있는 악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만화에선 자주 각 화면 크기가 바뀌는데 영화에선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허우샤오셴 감독과 이창동 감독은 필자를 포함한 청중들이 좁은 수도관 파이프 같은 질문을 던지면 측량할 수 없는 강물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이날 얘기의 핵심은 결국 영화가 주는 체험의 너비와 깊이에 관한 것이었다. 섭은낭에서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 창조된 아름다움, 우리의 실제 삶에서 겪기 힘든 아름다움을 초밀도로 경험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럴 때 필자는 보이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그게 또 훌륭한 영화의 조건일 것이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2016. 2. 5.

서울아트시네마 [자객 섭은낭] 대담



  서울아트시네마서 열린 감독님과의 대담행사(16.1.28)에 참석했다. 2005년 낙원동에서 있었던 마스터클래스 이후 10년 만에 뵙는 자리다. 무척 설렜다. 이창동 감독이 특별히 함께 했다. 김영진 평론가가 사회를 진행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대담이 이어졌다. 허우 감독에 대한 이창동 감독의 애정이 컸다. 10년을 기다려왔다고 입을 떼었다. 이 영화에선 서사의 인과성이나 인물 관계의 명료함이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알 듯 모를 듯한 감정들과 그를 둘러싼 풍경들, 소리들에 감각을 여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스러운 영화였다고 말했다. 과연 허우 감독님의 작품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고. 당이라는 시대적 외피, 무협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둘렀을 뿐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어떤 마음 관한 영화가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깊이 공감했다.

  Q&A 시간엔 으레 나올 법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히 여기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봤는데 이 감상이 맞는 것입니까. 허우 감독은 그 모든 질문들에 성심껏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빈틈을 남겨두는 듯한 인상이었다. 과잉 해석과 현학의 분석을 슬며시 경계하고 있었다. 특유의 유머와 익살어린 제스쳐로 대신 그 틈을 채워냈다. 답변은 전작들을 마치고 했던 그간의 인터뷰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은 줄곧 사실주의를 강조해왔다는 말. 함께 자주 작업하게 되는 이들은 결국 그이의 품성과 사람됨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말. 가장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필름에 담기 위해 먼저 그런 상황과 환경,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말. 머리로 하는 대화가 있고 가슴, 발바닥으로 하는 대화가 있다. 허우 감독과의 대화는 언제나 명명한 후자였다. 그는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로 영화를 배운 사람이 아니다. 삶과 생활이 먼저였고 영화는 언제나 방편이었던 사람. 생활을 감각하고 세계를 살아내는 데 다만 영화가 필요했던 사람. 가신공주는 섭은낭에게 말한다. “너의 검술엔 적수가 없으나 마음은 사람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구나.”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거리감'은 인간의 불가피한 어떤 성정으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이뤄내야 하지만 이뤄낼 수 없음을 자각하는 일. 전해야 하지만 끝내 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 [카페 뤼미에르]의 아버지는 딸 요코에게 ‘어떤 방법으로 네가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며 살 것인지'에 대해 끝내 묻지 못한다. 그는 정종을 들이켜거나 뒤돌아 앉아 함께 우동을 먹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그 거리감과 생활묘사는 그저 많은 영화를 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담이 끝났다. 관객들은 로비에서 허우 감독을 기다렸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갔다. 나는 그의 보좌 직원(SPOT 직원이라고 했다)에게 작은 선물을 남긴 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친구가 허기를 호소했다. 종로3가 앞에 늘어선 한 포장마차로 향했다. 막 반죽을 부은 붕어빵과 계란빵이 익기를 기다렸다. 저편에서 허우 감독과 통역사, 스팟 직원이 향해 오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 전했다. 허우 감독이 밝게 화답해주었다. 선물에 고마워하신다고 통역사는 전했다. 붕어빵 가게 앞에서, 그들은 후미지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역으로 갔다. (2016)

2016. 2. 3.

당신의 불완전함을 내가 끌어안아줄게요


필립 가렐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중에서

  사랑은 충만해지는 감정이다. 보이지 않던 것은 흔적을 드러내며, 향은 짙어진다. 소리는 멀리 가닿고, 까끌한 것은 보드라워진다. 이 갑작스런, 세계의 완전해짐. 나도 함께 완전해질순 없을까. 같은 리듬이라면 다만 이곳은 천국이 되리라. 부질없는 꿈이 시작되는 건 그때부터다. 돌이킬수록 불완전한 자신뿐이다. 어울리지 않는 침대보, 바닥의 머리카락들, 피부의 잡티가 서글프다. 서글프고 불안하다. 사랑은 언제까지일까. 충만의 세계는 저만치에 있는데. 나는 리듬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인다.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일. 혹은 세계에 거짓으로 뛰어드는 일. 도망치지 않기로했다면, 거짓은 얼마간 불가피하다. 다만 이젠 타인과 자신 둘 다를 속여야 한다.

  사랑에 긴 시간 익숙해진 뒤라면 어떨까. 여기 한 부부가 있다. 마농과 피에르. 그들은 한 레지스탕스에 관한 다큐를 작업하는 중이다. 노인은 나긋하게 고통의 지난 날을 술회하고 부부는 그를 숨죽여 기록한다. 그러다 일이 벌어진다. 피에르에게 갑작스런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묘한 매력을 품었다. 피에르는 가정을 망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새 사랑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한편 마농 또한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중이다. 상대는 젊고 부드럽다. 그녀의 외도는 (하필) 엘리자베스에게 목격된다. 피에르에게 이 사실이 전해진다. 떳떳할 것 없는 처지면서도 그는 격분에 휩싸인다. 급기야 피에르와 마농은 결별하게 된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 단지 그것만으로는 충만해질 수 없음을, 늦든 빠르든 우리는 알게된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사랑에 익숙해진 뒤라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거짓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나른한 권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나름의 결단. 거짓의 양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돈을 감추기도 하고 말을 감추기도 한다. 육체와 마음의 비행을 감추기도 한다. 니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는 질문은 이때 아무런 힘이 없다.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공허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숙명인 것이고, 그것은 다만 자신 대신 타인을 돌보는 일에 더 애를 쓰기로 결심한 이들에게서 더 잘 발견될 뿐,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것이다.(‘인 더 섀도우 오브 패털리티'라는 제목도 좋았을 것 같다.)

  모든 사랑은 그러므로 크고 작은 거짓으로 구성된다. 거짓이 없다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건축의 주된 질료는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거짓, 불안, 상처와 같은 것이다. 상대에 책임을 다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건 사랑하는 이들의 당연한 책무다. 관계의 총체란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또한 작동하는 무엇이다. 원든 원치 않든 제 측량을 벗어나고마는 관계의 속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조금 더 자유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피에르와 마농은 레지스탕스의 장례식장에서 재회한다. 젊은 연인들과는 결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레지스탕스의 삶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레지스탕스이긴커녕 나치의 충직한 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피에르는 촬영분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며 낙담한다. 마농은 그러나 말한다. “다시 편집하면 돼. 가짜 레지스탕스에 대한 삶의 이야기로 만들자.”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둘은 놀랍게도 부둥켜 안고 있다. 나는 여기서 깊은 뭉클함을 느꼈다. 권태로 멀어졌던 두 사람.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두 남녀. 필연의 거짓. 불완전의 수긍.(지난 외도를 정당화하거나 낭만화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건 상징처럼 나른하게 묘사되었다.)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당신의 거짓을 인정할게요. 당신의 불완전함을 내가 받아들일게요.’

  가짜 레지스탕스는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꾸민 것일 것이다. 어마한 죄의 삶을 끌어 안아줄 이는 그의 곁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존재의 유지를 원했고 현실의 직시 대신 거짓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급기야 그를 사실로 믿어버렸다. 나치 피해자들은 통탄해마지 않을 일이겠지만, 한 개인의 실존이라는 문제에서는 얼마간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라도 살고 싶어했다. 우리도 각자의 기만으로 삶을 지탱해 나간다.



2015. 11. 30.

인생영화 2015


  해마다 새로 작성하던 인생영화 리스트를 올해부터 5년 주기로 한 번씩 작성하기로 했다. 목록에 큰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데다가, 그 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연말 올해의 영화 리스트로 충분한 거 같아서다. 이미 지난 봄에 한 차례 올린 바 있지만 5년 주기를 맞추기 위해 2015년이 가기 전 구태여 한 차례 더 정리했다.

  저 영화들은 내 영화사 최고 걸작 목록이 아니다. 나는 그만큼의 방대한 이해와 깊이를 갖추지 못했다. 다만 저들은 특정한 시기 또는 일정한 세월 동안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거나 깊은 반성과 각성으로 이끈 작품들, 또는 아주 개인적인 추억이 담긴 작품들이다. 어딘가 막혔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다시 꺼내보고 재차 곱씹는 작품들. 생활의 계속적인 영감과 실천으로 나를 끌어 당기는 목록들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내가 나고 자란, 나를 품어준 공간과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계화란 말조차 빛바랜 듯 광속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오늘,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딛고 선 이 땅, 내가 생활하고 감각하는 지금 이곳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이 아닌가 싶다. 아시아 영화 카테고리를 새로이 추가해 집어 넣은 까닭이다. 서구 영화의 문법과 전통에서 비껴나 아시아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거기에만 자리하는 어떤 불가피한 태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영화들이 주로 포함되었다.






2015. 11. 28.

허우 샤오시엔 감독에 관한 짧은 생각



“열네 살, 카오슝에 살던 때다. 점심을 먹고 나면 걸어서 높은 관리들이 사는 관저로 갔다. 담을 넘어 망고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훔쳤다. 우선 배불리 먹고 나서, 열매를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지는 않는지 뒷길로 누가 다니지는 않는지 무척 긴장이 되었다. 이제 바람이 불 것이고 매미가 울 것인데 그 소리는 과연 어떻게 들려올까. 그렇게 주의를 모은다는 게 이미 하나의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영화란 건 하나의 주어진 상황, 분위기, 정서를 확대시키고 응집시키는 일이 아닐까.”
                                                                                           
- 허우 샤오시엔, 서울아트시네마 마스터클래스(2005. 8. 27) 중에서


1.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이 없었던 사람. 생활과 삶, 그로부터 감각되는 세계가 오직 중요했던 사람. 그 안에서 세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발견하고, 질박한 응시의 예술을 길어 올려온 사람. 더 다가갈 수도 없고,(’내게 그만큼의 권리가 있을까?’) 더 물러날 수도 없었던 자리.(’이들에 혹여 무감해지는 건 아닐까?’) 딱 그만큼의 거리. 그는 그곳에서 무엇보다 바람을, 햇빛을, 소리를, 사람을, 마음을, 지나간 것을 느껴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오랜 필름을 볼 때도, 가장 근작을 볼 때도,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지난 풍경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그래왔다. 우리도 그래왔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2. 평자들은 [남국재견] 이후 그의 세계가 변모했다 지적한다. ‘완벽히’ 달라졌으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정성일)고까지 한다. 일견 사실이다. 정처없는 인물들, 떠다니는 카메라, 불균질의 시점숏 등이 등장했으니. 시네마의 측면이라면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형식 비평을 위한 수사일 뿐, 감독 자신의 내적 동기와는 크게 관련이 없어보인다. 허우 샤오시엔은 (도약을 갈망하는 여타 예술가처럼) 허물기 위해 허문 일이 없다.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단지 그를 따라 함께 흘러 다녔을 뿐이다. ‘해체'니, ‘비인칭 시점'이니 하는 심오한 결단 같은 것이 거기에 자리했을까.(허우 감독의 주관적·정서적 시점숏은 초기 작품부터 일관되어 온 것이다. 영화적 방법론이라기보단 그의 생활감각에서 빚어진 한 태도라 보는 것이 더 근접할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자리서 주변의 사람과 세계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세계의 진실을 포착해 낼 수도 있다는 엷은 믿음을 품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혹 시네마의 전통이나 혁신 따위서 이탈되든 그렇지 않든 그다지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의 눈에, 이미 세계는 여러 굴절 속에 있다. 사람들도 따라 부유하고 있다. 그는 이들-가령 [남국재견],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 ‘청춘몽(靑春夢)‘의 유령 같은 청춘들-에 합류해 다만 자신도 함께 움직여야한다 생각했을 것이다.(허우 감독은 [밀레니엄 맘보] 인터뷰에서  2011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영화의 나레이션에 대해 “나이를 먹은 내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위치이자 현대 3부작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빨간 풍선] 인터뷰에서는 풍선이라는 기호에 대해 "소년의 곁을 따라다니며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 내 마음의 시선"이라고 말했다. 성장 4부작에 관해서는, "그건 마치 사진과 같은 기억의 풍경이므로, 보다 정적이고 먼 거리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판단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그렇다고 ‘지금, 이곳’을 외면하지도 못한 채 그저 그들을 따르는 일. 그것 말고는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력한 이끌림’. ‘판단없는 응시’. 온전히 허우 샤오시엔의 것이라 부를만한 건 혹여 이것들이 아니었을까.

3. 그의 영화에서 쇼트와 쇼트가 붙지 않고 튀는 순간을 특히 좋아한다.([밀레니엄 맘보]에서 비키의 거실을 비출 때, [카페 뤼미에르]에서 요코가 노면전차를 타고 도쿄 시내를 흐를 때, [섭은낭]에서 은낭의 목욕물을 채우기 위해 시중들이 일을 할 때, 그리고 전계안이 그의 아들과 겨루기 비슷한 장난을 칠 때 등.) 여타의 감독들이라면 그런 연결은 당장 폐기해내고 말 것이다. 편집의 가장 기초를 무시한 연결. 영화과 학생들도 저지르지 않을 실수. 그렇다고 고다르, 트뤼포 식의 의도된 소격효과도 아닌 것. 허우가 그걸 모를까. 천만에. 허우는 그걸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렇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중이다. 자기 영화에 완전무결이란 필요도 없고, 가능할 수도 없다는 일종의 체념-받아들임. 할 수 있는 만큼만을 해내겠다는 태도인 것이다.(“중요한 건 인물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거다. 구조나 스토리는 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인물이며, 또 공간이다.”) 그건 예술에서도, 또한 생활에서도 그가 줄곧 견지하려 애써 온 어떤 자세였다. 생활을 지켜냄으로 예술을 빚는 사람. 이런 예술가와 한 시대의 대기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매우 축복한 일이다. 이어질 배움을 기다린다. (2015)


2015. 11. 3.

5 년

  2011년 3월 내전이 시작되었다. 벌써 5년의 세월이다. 8만여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중 7000명은 아이들이었다. 정부비판 낙서로 시작된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은 아랍의 봄기운을 빌어 타고 삽시간 화마처럼 온나라를 집어삼켰다. 연일 이어진 폭격, 방화, 공습들. 자유의 거리는 지워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했던 골목길도 사라졌다. 폐허의 잔해 더미와 피로 흥건한 죽음의 냄새만이 남았다. 2013년 여름, 이스마엘은 마지막 메일을 보내왔다. “지금 이곳엔 죽음의 기운밖에 없어. 저번달엔 에븐시장 한복판에 TNT폭탄이 떨어졌다니까. 준비되는대로 여길 뜰거야. 우린 정부군도 반군도 서방 지원 세력도 아무도 믿지 않아. 모두 다 적일 뿐이야.“ 그가 살아 남았는지 그랬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이후 소식은 모른다. 의사가 되겠다던 알레포 시장의 요거트 소년과, 컴퓨터 공학도가 되겠다던 홈즈의 소년과, 성직자가 되고 싶다던 라타키아의 소녀도 역시 어찌됐는지 모른다.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운명은 어째서 아직까지도 저들에게만 그토록 무거운 짐을 내려 지우는 것일까.












2015. 11. 2.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2015 비공식 트레일러 (남국재견 버전)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2015 비공식 트레일러
(남국재견 버전)

Hou Hsiao-Hsien Retrospective 2015 in Seoul Unofficial Trailer
(Goodbye,South Goodbye Version)

Shifen(十分). 2015

2015. 11. 1.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2015 비공식 트레일러 (밀레니엄 맘보 버전)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2015 비공식 트레일러
(밀레니엄 맘보 버전)

Hou Hsiao-Hsien Retrospective 2015 in Seoul Unofficial Trailer
(Millennium Mambo Version)

Keelung(基隆).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