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13.

천지유정, 일개인 몰유동류.



  그가 아낀다는 말을 문득 되새김해본다. 천지유정(天地有情). 일개인 몰유동류(一個人,没有同類). 세상 만물에 사랑이 깃들어 있고, 세상 누구도 서로 같은 이는 없다는 말. 근래 부쩍 까닭 없는 서글픔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애초 심어진 우리 사랑과 고유는 시간과, 삶의 관성과, 세상의 편리 앞에 좀처럼 멀리 피어나기 힘들다는 것. 숙명인 줄 알면서도 그런다. 누구도 사랑을 품고 나지 않은 이 없고, 누구도 오직 하나의 존재로 나지 않은 이 없는데. 그저 휩쓸려 살다보니 제각기 다른 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 같아서, 내가 그들 같아서, 화면 속과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그냥 와락 끌어안고 싶어진다. 단란한 외식 한 번 못해본 꼬마도 안고 싶고, 술주정뱅이인 어느 아버지도 안고 싶다. 멍투성이가 된 여자도 안고 싶고, 자기가 미워 눈이 번진 여자도 안고 싶다. 욕심 많은 어느 기름진 노인도, 손발 다 갈라진 검은 어깨의 농부도 안고 싶다. 감당할 줄 몰라 소비로만 채워내는 어느 금수저 인생도, 평생을 바치고도 영문없이 내쫒기는 어느 실업자도 안고 싶다. 그저 꿈이다.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는 내가 사랑을 서글퍼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일들이 다 무슨 소용이며 무슨 헛짓거리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2016. 6. 11.

뽀미



우리 뽀미 사랑스럽구요







2016. 6. 10.

근조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빈다. 죄스럽다. 내 안의 여성 혐오를, 나는 충분히 들여 보지 못했다.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여동생과 어머니를 아껴온 것은 오늘의 이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임을, 이번 일로 배웠다. 어리석게도. ‘효녀 연합'의 홍승은 씨는 말했다. “혐오는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취급하지 않는 모든 문화를 말한다.” 뛰어난 여성, 치열한 여성을 나는 흔쾌히 받아 들여왔던가. 예쁜 여자, 착한 여자, 얘기가 잘 통하는 여자, 섹시한 여자, 혹은 삶의 경륜이 쌓인 여자 - 범주 밖의 여성들을 나는 진정으로 애정하거나 존경한 일이 있었던가.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반성은 모래에 쓴 글자와 같아서 쉽게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이 다짐 뒤로는 말을 멈추어야 한다. 대신 자꾸 스스로를 응시해야 한다.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수고없이 얻은 것들. 무감하게 취한 편리들. 그들 가운데 나. 남성인 나. 다시 한 번 희생되신 분의 명복을 빈다.

2016. 5. 21.

노파의 향


한낮. 노파가 저만치 앞질러 갔다. 따를 수 없는 잰걸음이었다. 무슨 일일까. 걸음을 따라 특유의 향이 이어졌다. 코끝이 매캐했다. 죽음에 가까워진 냄새로구나. 불경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말도 아니었다.

모든 아이는 달큰한 향을 풍기며 태어난다. 어미 젖의 향, 제 품은 순결의 향. 생각해보면 향이 없는 것은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향이 있다. 시절에 걸맞은 향내를 바꿔 풍기다, 다만 언젠가 병들고, 언젠가 떠난다. 향. 육신의 향. 심령의 향. 나는 어떤 향을 풍기고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땀내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백 번의 관념보다 한 번의 노동이 새겨지기를. 되도록 거친 손과 그을은 살결을 갖게 되기를. 그렇게 시큼한 노동의 향내가 내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나 구호를 삼는 일은 그것이 턱없이 부족할 터이기 때문이다. 노파의 향을 따르며, 나는 내게서 땀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러웠다. 그것도 몹시. 저 향도 언젠가는 내것이 될 것이다. 그때라면 좀 덜 부끄러운 일이 될까. 노파의 향은 매캐했으되, 불쾌하지 않았다. 떳떳한 죽음의 냄새였다.


2016. 5. 20.

여자친구


그녀는 여행을 갔고 나는 남았다. 창 너머 앉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나도 그녀도 먼 거리를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버스는 떠났다. 청소를 하고, 짐을 꾸리고, 투표를 하고, 그리고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우리 둘 중 우리가 잠들어버렸다는 걸 인지한 이는 없었다.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서야 잠을 깨었고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어떡해,를 읊어댔다. 나는 우리에게 단 1초라도 줄일 방법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답은 없었다. 무조건 뛰었다. 신호를 무시했고 경적 소리도 무시했다. 저 편에 기적처럼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버스는 그녀를 날름 삼키고는 문을 닫았다. 저만치 사라졌다. 허리를 굽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한 시간 쯤 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속을 밟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잘 다녀올게. 사진 많이 찍어와. 전화를 닫았다. 한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탔다. 그 중엔 중국인 가족이 있었다. 너 댓살 쯤 먹은 막내가 엄마 허리춤을 끌어 당기며 칭얼댔다.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는 스마트폰 게임에 몰두해 들었다. 不出, 可入 따위 글자들이 화면에 큼지막이 떠올랐다. 한동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궤도 소리가 둔중했다. 풍경이랄 것도 없는 어두운 것들이 스쳐 흘렀다.


2016. 5. 1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말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소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중에서
 
 나는 예술 그 자체에 관하여 또는 예술의 사명에 관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삶 자체이다. 삶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정말로 본질적인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예술가로서의 과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더 중요히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문명이 처한 상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역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 각자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뛰어난 인물들‘, 통치차들, 종교 재판관들이 설치는 역사적 단계는 우리 시대로 끝나간다는 인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행복을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서 우리의 삶을 함께 바꿔내자는 주장을 펴 왔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망각했으며, 이 개성은 보편적 역동성 속에서 상실되어 버렸다. 인간은 인류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이해는 망각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구심점을 이루는 고유한 존재라는 인식, ’나‘ 자신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결심과 막대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는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다. 그에 반해 순전히 물질적인 것들은 제도적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우리들 삶의 근거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의 삶은 경화증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마비 증상의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에 가담하고 발전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인간의 행동과 인간의 운명 사이 상호 연결 관계가 상당히 심각하게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분리가 현대인의 자의식을 불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자기 자신은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스스로를 여긴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환경의 강제를 받아왔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운명에서 결국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는 숙명적인 감정을 가슴 한켠에 품고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하여야만 한다. 고통, 그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자신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악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소유한 힘으로부터 오는 것도 인간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 공동체를 위한 담보도 아니고 사회적 조화의 현상도 아니다. 예술은 일종의 사랑 고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우리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 얽매여 있다는 자백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고백이다. 예술은 삶의 본디 의미를 표출해주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며 사랑이고, 희생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

2016. 5. 11.

곡성


[다우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장 수녀는 흐느껴 운다. “아직도 의심이 들어요. 의문이 든다고요.” 순백한 젊은 수녀는 함께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감싼다. 사태는 이미 종결됐다. 그녀가 그토록 의심하던 플린 신부는 쫒겨났다. 그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곡성]이 공포스런 이유는 거기에 광기나, 피칠갑이나, 좀비, 악마, 혼령이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차라리 가장 깊은 곳에서 스멀대는 도저한 무력감 때문이다. 이 지옥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을 기어코 직시시키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도, 판단하지 않고도, 이론과 종교와 과학 따위에 의탁하지 않고도, 인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않고도 이 세계를 견뎌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질문을 던진 채 끝을 맺지만, 관객은 한 켠에 묵시록적인 대답을 안고 돌아간다. ‘아니, 전혀.’ 오늘만도 나는 한 동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다. 그에 대한 평판이 있었고, 나는 그 평판 위에서 그의 작은 실책을 보았다. 확대경에 찍힌 사진처럼 그 장면은 머리에 남았다. 이토록 얄팍한 인식과 감정, 그리고 믿음이라니. ‘당신들은 아마도 계속하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곡성]은 말하고 있다. 

곡성


1. [곡성]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기 전 막연히 [소서러], [지옥의 묵시록] 류의 괴이한 처절함과 [사이비], [안개마을], [이어도] 류의 폐쇄 공동체적 광기와 음산함이 적당히 뒤섞인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다. 보기 좋게 희롱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레퍼런스를 쉬 대입하기 어려운 영화다. 강력하고 심오하며 정직한 영화다. 활짝 열린 창과 같은 영화다. 우리 사고와 행위가 추동되는 바탕인 믿음의 실체에 관해 질문하는 영화다. 자기 현시적 테크닉으로 일관하고 언뜻 심오해보이는 주제를 얄팍히 분칠한 어떤 경향의 영화들은 [곡성]을 보고나면 생각할 지점들이 많아질 것이다. 기분좋은 희롱을 경험한 관객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2(추가). 역대급의 해석들과 갑론을박이 쏟아질 작품임은 극장문을 나선 이라면 누구나 직감했을 터다.(물론 이 영화를 더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 한 해. 상당히 많은 수가 객석을 퉁명스레 털고 일어났다.) 개봉 첫 날임에도 반응은 역시 뜨겁다. 누가 누구의 편이냐, 누가 누구와 대립했느냐가 주된 논쟁의 양상인 거 같다. 감독이 ‘특정인과 특정인이 한 패'라는 식의 유권해석을 어디선가 흘린 모양인데(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누구와 누구가 진짜 악마였어,로 (아직까진) 논쟁이 쉽게 귀결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를 넘어선 매우 다층적인 고민거리를 안긴다. 누가 악마여도 좋고 누가 악마가 아니어도 좋은 지경까지 간다. 모두가 악마가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믿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 그 자체에 관한 징그러운 탐구. 그 끝에 도달한 곳은 거대한 무력감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영문도 없는 불행과 무력감. 영화 전체가 거대한 현혹(환각)이라고 느꼈다. 그 느낌에 관해 언젠가 정리해보고 싶다.   

2016. 4. 16.

노란 리본


1. 많은 것은 없는 것이고, 어디나 향하는 것은 아무 곳도 향하지 않는 것이다. 돌볼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곁으로 들이자. 그 밖의 것들은 과감히 쳐내는 것이다. 상처를 주게 되더라도, 도리어 제가 아프게 되더라도. 관계도, 소유도, 다른 모든 일들도. 스스로에 주문하는 말.

2. 그 분이 떠나셨다. 인사를 남기지는 않으셨다. 나는 그 분을 좋아했다. 그 분은 솔직했고, 유머러스했다. 그 유머는 그 분의 것이었다. 내가 느낀 그 분은 그랬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고,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다. 비대면 관계를 불신하는 옛 사람이나, 그 분의 흔적을 기다리는 일에는 낯섦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떠나셨다. 뜻하는 생활 이어가셨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할 때도 너무 힘들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감사했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3. 작년 여름의 일이다. TV를 보다가였나.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의 옆 침상을 쓰고 있던 그 분은 상인이었다. 그 분은 저 놈의 세월호 때문에 장사 다 망해버렸다면서, 쫄쫄 굶게 생겼다면서, 제발 좀 저 특별법인지 지랄인지 하는 일들 좀 싹 다 관둬버렸으면 좋겠다고, 수분이나 목청을 높였다. 나는 무얼 했을까. 어떻게 반격을 해야하나 생각했을까. 아니. 병실 가득 그 분의 침이 차오르는 동안, 나는 내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바라보았다. 저 리본을 저 분이 보게 될까를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이튿날 재차 병실을 방문할 때, 가방엔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세월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내게 추모의 날이 아니다. 이 날의 비겁함과 나에의 혐오를 다시 떠올리는 날이다.


2016. 4. 10.

타인의 진심은 타인의 것


1. 타인의 진심을 함부로 의심할 권리가 제게 있다는 이상한 믿음에서 세상의 많은 폭력은 빚어진다. 나의 진심이 나의 것이듯, 타인의 진심은 타인의 것이다. 표현된 진심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방에서 따져볼 일이다. 그 입증 책임을 타인더러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다. 

2. 사랑에 관해라면 어설픈 카운슬링 백 번 듣는 것보다 [아노말리사] 한 번 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3. 테라스에 앉아 꽃을 본다. 벌들이 꿀을 빤다. 꿀 빨고 앉아 있다. 이 꽃, 저 꽃을 쉴새없이 오간다. 잠깐 머무는 꽃, 오래 머무는 꽃. 참도 부지런하다. 꿀 빨고 앉아있다,는 말을 듣기에 저들은 너무 필사적으로 산다.


2016. 4. 3.

불면의 밤



차례대로 [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


  기자가 물었다. “아직까지 거리를 지키시는 이유가 뭐죠?” 여인이 대답했다. “제 영혼 하나만큼은 지킬 수 있으니까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가 일었다. 세계 경제를 파탄에 몰아 넣고도 저들은 숨어 배당금 잔치를 했다. 하지만 분노는 영원할 수 없었다. 동력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갔다. 하나 둘 거리를 떠났다.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단지 한 줌의 사람들만이, 그러고도 한동안 거리를 지켰다.

아무리 싸워도 승산이없다 직감할 때,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어 줄 수 없다 의지케 되는 한가지는 ‘자기 영혼'이다. 그래 이거라도 지켜내자. 이 간신한 불씨마저 사그라진다면 내 삶도 함께 끝장나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과 한둘로 특정할 수 없는 일상의 적들 앞에, 우리는 마지막 구원처로 '내 안의 평화'를 희구한다. 그렇게 회사를 견디고, 연애를 감당하며, 아이를 키운다. 이 길의 궁극엔 타인마저 불필요하다. 결국 '내가 있고, 남이 있다’. 단지 삶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수행을 찾고 닦아야 하는 길을 걷는다. 모두는 얼마간 구도자가 된다.

  차이밍량의 승려 3부작-[행자(行者)], [서유(西遊)], [무무면(無無眠)]은 구도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붉은 천을 두른 승려가 있다. 그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걸음이 매우 느리다. 아주 간신히 한 걸음씩을 뗀다. 어찌나 그 속도가 느린지 단 열 개의 계단을 밟는 데 5분의 시간이 걸린다. 저 이름 각오했다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얼이 빠질 무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승려의 곁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그를 흘끔거리거나 무시한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열차가 지나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려는 한결같다. 시종 정지화면에 가까운 한 걸음을 겨우 내딛는다.

그는 지금 수행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왜 하필 타이페이 한복판이란 말인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도시의 일상과 붉은 천의 승려를, 지독한 차이로 대비해 보여줄 뿐이다. 이게 [행자]라는 영화의 전부다. HDV캠으로 찍었고, 조명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폰으로 찍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서유]는 배경만 달라질 뿐(프랑스) [행자]와 똑같은 영화다. 똑같은 승려가 똑같은 걸음을 걷는다. 서양 사람들이라서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똑같이 무시당하고 이따금 흘깃거림을 당한다. 군중 속의 (광대 같은) 수행자. 차이밍량은 무슨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군. 세상의 선호와 가치와 속도가 무엇이건 자기의 걸음을 걷는 사람의 이야기. 간편한 해석이기도 했고, 손쉬운 교훈이기도 했다. 다르게 볼 여지가 크게 없는 영화이기도 했다. (정말 위에 나열한 장면들이 전부인 영화다.) 동시에 일상의 수행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보였다. 지독한 세계를 살아내야 하는 건 당신들입니다. 이 승려를 스치지만 마시고 얼마간 무언가를 느껴보십시오. 차이밍량의 주문이 들리는 듯했다. 말하자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김민희가 말했던 ‘루틴’같은 것. 그녀는 매일 화실에 나간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곧 망해버릴 것 같”다고 했다. 승려의 걸음은 곧 나의 루틴을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러나 [무무면]을 보고 말았다. 이 영화에도 역시 똑같은 승려가 나온다. 똑같은 붉은 천, 똑같은 느린 걸음. 그러나, 세 번째 장면부터, 앞선 두 영화와는 전혀 새로운 영화가 된다. 화면 가득 지하철의 창 밖이 차오른다. 타이페이의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쉴새없이 스쳐 흐른다. (이 연작에선 물론이고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에서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속도감이 몇 분 간 지속된다. 화면 밖에선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일상음도 들려온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승려의 시점쇼트일 것이다. 승려는 그 긴 수행을 마치고 지금 ‘퇴근’하는 길이다. 무려 세 번째 영화 만에!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모두 24시간 사우나에서 벌어진다. 승려는 발가벗고 탕에 지친 몸을 누였다가 사우나로 들어간다. 스키니한 몸매의 한 청년이 나오지만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여자가 사우나 수면실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고,(이 장면은 물론 뜬금없다. 그러나 어찌나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길게 담아내는지, 보는 사람이 다 긴장이 되는 지경이 된다.) 드디어 승려가 수면실로 들어온다. 몸을 누이고 이불을 끌어 당긴다. 그도 잠에 들지 못한다. 무무면(無無眠). 영어제목은 No No Sleep이다. 눈은 감았으되 잠에 들지 못하는 승려. 그는 끝내 잠들 수 있을까? 영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앞선 두 영화([행자], [서유])에서 나는 희망과 교훈을 읽었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빛을 지키는 일. 이 지독한 세계에서 우리가 죽거나 아주 나쁘지 않고 그런대로 살아나가는 일이, 저마다의 수행과 구도를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보았다. 두 편을 보고 났을 때는 뭔가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고, 일상에 복귀해서도 그 에너지를 나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무무면]은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앞의 희망들을 처음부터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세계는 이토록 시시각각 어두워지는데, 우리는 정말 어디까지 싸워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였다. 승려가 지하철 창 밖으로 보았던 세계는 그의 지난 수행을 완벽히 무력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가공할 힘의 세계였다. 수행은 그토록 지난하고 어려운데, 폭력은 너무도 빠르고 간편하다. 언젠간 편한 잠에 들 수 있을까? 내 영혼 하나만이라도 건져낼 수 있을까?


추신 : 세 영화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2016. 4. 2.

허우 샤오시엔의 말






 작품의 형식, 스타일에만 골몰하지 마세요. 예술엔 정도가 없습니다. 주변의 일상 관찰을 통해,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만의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독창성의 근원입니다. 독창성은 다른 무엇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고 무엇보다 자기의 힘으로 느껴야 합니다. 통찰을 얻게 되면 내가 본 것과 느껴온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독창성은 그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큰 예산은 필요가 없습니다. 뭐든 정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장비란 아무거나 써도 괜찮습니다. 뭐든지요. 우리 주변의 누구나가 할 수 있어요. 지금의 영화는 과거와는 달라요. 제도권, 비제도권을 나눌 필요도 없어요. 할리우드 같은 거대한 시스템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건 정말 괜찮아요.
  영화는 내가 자라고 생활하는 곳에서 나옵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애착을 갖는 사회, 사람, 사물, 관계, 분위기 같은 것으로부터요. 대만은 특히 생동감이 넘치는 사회잖아요? 대립 세력 간의 마찰 같은 뒤틀린 이야기도 많고,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젊은 세대들 뿐아니라 부모들에게도요. 어떤 이야기든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 분쟁, 패배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극적이어야 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대만은 굉장히 독특한 곳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표현하려는 창작자들의 노력이 줄고 있죠.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 허우 샤오시엔, [자객 섭은낭] 칸 영화제 수상 후 귀국 기자회견에서

2016. 3. 28.

영화는 영화가 아닌 곳에서 길어져야 한다


1. 라오슈강이 주편한 허우 샤오시엔 대담집.
   [영화는 영화가 아닌 곳에서 길어져야 한다]

2. 칠십 노인의 불복종 운동.
   (생명 학대 반대, 공동체 파괴 반대)









2016. 3. 20.

칼릴 지브란의 말


그러자 한 늙은 사제가 말했다.
우리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제가 오늘 종교 말고 다른 무엇을 말했던가요?
모든 행위, 모든 사색이 종교 아닌가요?
또한 행위도 사색도 아니지만,
심지어 손으로 돌을 다듬고 베틀로 옷감을 짜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것 역시 종교 아닌가요?
그 누가 자신의 행위와 신앙을,
또는 자신이 하는 일과 믿음을 분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기 시간을 자신 앞에 펼쳐 놓고
‘이건 신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이건 내 영혼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내 육체를 위한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들의 모든 시간은
지금의 나에서 다음의 나를 향해,
퍼덕이며 창공을 날아가는 날개입니다.
도덕을 가장 좋은 옷으로 여기고, 그걸 입고 있는 사람은
차라리 벌거벗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해도 바람과 태양이 그의 살갗에
구멍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윤리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노래하는 새를 새장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철망과 빗장을 통해서는
최고의 자유의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예배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창문처럼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집, 새벽에서 새벽까지 창문이 열려 있는 그 집에
아직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들의 나날의 삶이
그대들의 사원이며 그대들의 종교입니다.

그대들 그 사원에 들어갈 때마다
그대들의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가기를.
쟁기와 풀무와 나무망치와 류트,
필요해서 만든 것이나 즐기기 위해서 만든 것
그 모두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몽상 속에서도 그대들은
그대들이 성취한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고,
그대들이 실패한 것 이하로 내려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왜냐하면 찬양 속에서도 그대들은 저들의 희망보다 높이 날 수 없고,
저들의 절망보다 더 낮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를 풀려는 사람처럼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대 자신을 둘러보십시오.
그러면 신께서 그대의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허공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구름 속을 걷고, 번개 속에 팔을 뻗고, 비를 타고 내려오는
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대들은 꽃들 속에서 미소짓고,
위로 올라가 나무 사이에서 손 흔들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 '종교에 대하여' 편

2016. 3. 18.

비워진 자리에 채워지는 것


지아장커 [산하고인] 중에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이다. 확실히 그랬다. 사랑에 앞서 방법을 고민했을 때, 줄곧 나는 실패했다.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산하고인]을 저평가하는 이들도 결국 이 맥락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식을 먼저 앞세웠다는 것.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 뭐하나. 슬픔을 보여주려는 액자가 먼저 둘러쳐 있는데. 그랬다. 거기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플롯의 측면, 화면 비의 측면. 삶이 어떻게 선형적인 서사로 그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고, 삶이 어떻게 표준화면에서 시네마스코프로 (균등히) 번져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의한다. 확실히 이 영화는 지아장커의 전작들과 다르다. 나는 특히 99년을 다룬 에피소드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아직 돈의 폭력에 물들기 전 저들의 사랑, 우정은 지나치게 매끈한 드라마로 전개된다. 그랬을 뿐 아니라, 전에 볼 수 없던 얕은 심도의 화면과 팬, 트래킹 등 촬영술의 유려함이 전시된다.(이제껏처럼 유릭와이가 찍었다.) 99년, 2014년, 2025년 세 시대를 통과할 때마다 화면 비가 달라진다. 불평들은 충분히 그럴만하다. 나도 낯설었고, 왜 이랬을까 싶었다.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영화의 중반.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던 주인공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이 점이 이상했다. 탄광 노동자 리앙즈.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성공한 친구에게 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탄광 노동자다. 그의 삶은 위태롭다. 탄광은 언제 문을 닫을 지 모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사이 그는 큰 폐병을 얻었다. 수술을 위해 아내, 갓난 아이와 큰 도시로 올라온다. 그는 누워 쉬고, 아내가 돈을 빌리러 나선다. 그녀가 찾은 사람은 리앙즈의 옛 사랑 타오다. 타오는 진솅과의 결혼 이후 제법 큰 사업체를 갖게 됐다. 사연을 전해 듣고 리앙즈를 방문한다. 진솅과의 이혼, 아들 양육권까지 내준 소식을 전한 뒤 그녀는 품에서 돈 뭉치를 꺼낸다. 그는 그 돈을 거절할 수 없다. 살아야 한다. 굴욕감이 들지만 사치를 부릴 순 없다. 고맙다고 넙죽 받는다. 이 장면은 슬프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리앙즈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일이다. 줄곧 영화가 그의 감정선을 따르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타오와 그녀의 아들 달러의 이야기다. 달러는 아버지를 따라 새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호주로 유학 보내졌다. 타오는 달러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부른다.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리앙즈. 그는 왜 그렇게 퇴장해야 했을까. 이 질문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아장커의 전작들은 모두,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나가는가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릴 적 친구를 잃고도, 또한 건강과 앞날까지 잃고도) 리앙즈가 어떤 삶을 이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지아장커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돈으로 수술은 잘 받았는지, 그랬다면 다시 탄광으로 복귀했는지, 아니라면 무슨 일을 얻게 되었을지, 아내, 아이와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이야기가 계속돼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과감히 그를 떠나 보낸다. 그 결단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려온 세계를 닫은 대신 새롭게 열어 젖힌 세계는 무엇일까. 비워내고 그 자리에 대신 채운 것.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시, 타오와 달러. 모자는 함께 장례를 치른다. 달러는 생모 앞에서 자꾸 빌려 온 아이처럼 군다. 그 모습이 타오의 가슴을 후벼 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달러는 이제껏 생모인 타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사흘의 시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구축하기에 너무 짧다. 그 점을 타오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덤덤히 말한다. “달러, 넌 아빠랑 사는 게 나아. 아빠랑 살면 국제학교도 가고 유학도 갈 수 있어.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어.” 이 장면도 슬프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엄마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배경은 2025년 호주가 된다. 달러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 아버지 진솅은 고집불통이 되어버렸고, 새엄마는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온갖 풍요에 둘러싸여 있지만 달러는 공허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다. “어머니 이름은 뭐니?” “전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없다니 그럼 넌 뭐니?” “저는 시험관 아기에요.” “그래도 엄마는 있지.” “그럼 선생님 이름은 뭐에요?” “(사실) 나도 잊었어!” 달러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앞길을 알 수 없지만 대학은 관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에 진솅은 격노한다. 급기야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달러는 집을 뛰쳐나와 선생님과 여행을 떠난다. 가장 낭만적인 순간에, 그는 그녀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 둘은 잠자리를 한다. 달러에게 선생님은 여자이자 엄마다. 오롯이 홀로 서기 위해서는, 친밀한 타인의 도움이 얼마간 필요한 법이다. 선생님은 그러나 둘의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 두렵다.(달러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 아이와 더 깊은 사랑은 안 돼. 그녀는 달러를 친모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달러의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결정에 달러는 실망과 두려움을 느낀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지아장커의 관심이 한결 같다는 데 안도했다. 그는 리앙즈의 남은 이야기를 멈춘 자리에 달러의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 리앙즈는 ‘이미 잃어 버린 자’고, 달러는 ‘앞으로 잃어갈 자’이다. 그간의 세계가 ‘상실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풍요의 자리에 무엇이 비어가는가’를 다룬다. 결국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의 연민은 계속된다. 물론 이 영화는 도식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단점들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는 서정이 있다. 그 서정의 순수성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 서정은 귀한 것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온 지난 영화들과 이 영화와의 관계망 속에서 찾아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모 평론가는 “영화는 개인적 야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며 단죄하듯 이 영화를 폄훼했는데,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가 지키는 야심은 무엇이며 그 삶의 순수성은 어느 수준으로 견지되어 왔나. 그 궤적을 묻고 싶다.) 형식이 앞섰다는 애초의 지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특히 화면 비의 문제. 나는 화면비가 확대돼 나가는 것이, 그의 치기어린 형식주의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감정들과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이 양 옆으로 길어질수록 인물 간의 정서도 이격되어간다고 느꼈다.(허우 샤오시엔이 표준 화면으로 [자객 섭은낭]을 그리지만, 칠현금 장면에서만 비스타 비젼으로 확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만의 까닭’에서 지아장커는 화면 비를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타오, 리앙즈, 진솅이 한 데 모여 집단군무를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때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텅 빈 자리를 그저 응시한다. 진솅은 여전히 놈팽이 짓을 할 것이고, 선생님은 안전한 생활로 복귀할 것이다. 달러는 티켓을 받아들고 고민할 것이고, 타오는 기다림의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리앙즈는, 모르겠다. 살아있다면, 그의 가족들과 행복했으면 좋겠다. 부디.

2016. 3. 12.

이세돌


승부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세돌의 얼굴이었다. 한 수 한 수 혼을 담아 올리듯, 무게있지만 가늘게 떨리던 손도. 대국이 끝나고 냉철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또한 상대의 높은 실력을 겸허히 수용하며 멋쩍게 웃어보일 땐, 심쿵했다. 바둑은 모르지만, 실력에 비례에 인성도 함께 오르는 드문 스포츠가 아닌가 생각했다. 저 깨끗함, 저 안간힘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자기 일을 다 했다. 남은 대국도 몸관리하며 잘 치러냈음 좋겠다. 저 태도까지는 인공지능이 가져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6. 3. 5.

언덕길


한 친구를 보았다.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등지는 방향으로 내려 걸었다. 거리가 좁혀오자, 아뿔사, 짐칸에 또래의 여학생이 걸터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대단했다. 혼자 오르는 것도 난 힘들었을거다. 좀 벌겋긴 하나 큰 힘겨움이 배진 않은 얼굴.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모아진 여학생의 다리. 그녀는 마이쮸 같은 것을 까 남자의 입에 가져갔다. 덥썩 낚아 물고 그는 페달질에 더욱 열을 가했다. 예뻤다. 한 조각 꽃망울을 본 듯 했다. 마음에 오래 새겨두고 싶은 장면이었다. 

2016. 3. 4.

불확실한 화해


  예술로 타인의 삶에 근접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멋진 일이다. 나의 세계는 협소하다. 스스로에 머물거나 독단에 잠겼을 일들을, 그들은 멈춰세우고 돌아보게 한다. 알 수 없었거나 보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그들은 기어이 보게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인간의 삶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야.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간접 경험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러니까 세 배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10년 전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적잖은 나의 구성이 좋은 예술에서 왔음을 수긍할밖에 없다.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정말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요즘 나는 영화를 볼수록, 책을 읽을수록,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볼수록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 잡힌다.


  나는 중산층에서 나고 자랐다. 적당한 문화 자본과 교육 자본, 사회적 자본을 취하며 살았다. 내 노력도 없진 않았지만 주어진 것이 훨씬 많았다. 현실에선 그만큼만 생각하고 그만큼만 보는 일이 많다. 주어진 세계의 힘은 과연 세다.

지아장커를, 김기덕을, 어어부 프로젝트를, 프란시스코 고야 등을 보고 듣는 일로 부식됨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통해 폭넓은 이해와 감수성을 기여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오만. 그 나르시시즘.

정말 나는 그들을 이해했을까?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일까? 부끄러움이 엄습해온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그조차도 물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예술들은 되려 나를 기만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이해라니. 내 사람들도, 내 자신도 이해 못하는 내가 하물며.

씨네필과, 다독가와, 미술관 순례객은 내가 정말 되고 싶지 않아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타인의 인생을 수집하듯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성찰의 도구라 둘러 세우긴 했으되 냉정하게 그건 소비였다. 타인의 삶에 대한 소비.

  이창동의 [시]는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다운 영화다. 그러나 딱 한 장면, 양미자가 죽은 소녀에게 추모시를 바치는 장면은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양미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녀가 죽었던 강가로 카메라가 슬금슬금 걷는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했을 풍경들이 스친다. 그리고 갑자기, 양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어 들린다. 잘못 들은 것일까?

가해 학부형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의 말, “시를 쓰세요? 근데 시는 왜 쓰세요?” 이창동은 이에 대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양미자는 무력한 시편으로 그렇게 죽은 소녀와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혹한 세계에 무력한 칼날이나마 들이 겨누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너무 감동해서 자리를 오래 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그렇게 쉽게 합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확신이 없다.

2016. 3. 3.

한국이 싫어서


  2년 반여의 제주 생활을 마감했다. 좀 된 이야기다. 그간 느낀 단 한가지는,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도시 또한 무척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일층 지하 일층] 단편집에 김중혁 작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계속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도시가 주는 어떤 소란스러움, 모종의 흥분을 나는 떨쳐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깨우침은 귀중했다. 지금 나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에 살고 있다. 서울을 떠나와 이곳에 정착한지도 5년이 넘어간다. 나는 우리 동네를 무척 사랑한다. 틈날 때면 동네 구석구석을 산책하고 다큐를 위한 클립을 모은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이상적으로 도시와 자연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필요하면 큰 서점에 가 책을 보고, 답답하면 조금 나가 텐트를 친다. 그러나 그 균형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다. 이 역시 좀 된 이야기다. 브랜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대형 마트가 상상 못할 크기로 땅을 집어 삼키고 있다. 각종 편의시설들, 문화시설들, 체육시설들이 그야말로 날이 멀다하고 세워지고 있다. 그래서 괴롭기만 하냐고? 아니. 나도 얼마간 속물이다. 영화관이 코앞에 닿아 좋고 대형마트가 자정 영업을 해서 편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좋기만 하냐면 물론 그건 역시 아니다. 맘 비우고 걸을 숲과 아름드리 익어가는 노란 들녘이 누군가들에게 꾸준히 팔아 넘겨지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제 살던 자리서 원치 않는 밀려남을 당하고 있다. 그걸 지켜보는 건 유쾌한 일이 못 된다. 그렇게 늘 양가의 마음을 품고 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카메라를 드는 일이다. 무엇이 부서지고 그 위에 무엇이 세워지는지 지켜 보는 일. 그것으로 나는 일말의 속죄를 대신하려 한다. 비겁한 일이다.

낙담한 청년들이 이민 행렬을 줄잇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새꿈을 품고 혹은 또다른 불안을 안고 떠나는 것이다. 응원을 보낸다. 여행을 다니며, 저마다의 사연과 꿈으로 한국을 떠나 온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도 내 자신이 그 중 하나이기도 했거니와 제주 이민족(이라 스스로 칭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들과 복닥이며 한철을 살았다.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할 것이다. 어디에도 낙원은 없었으며 어디라고 지옥이란 법도 없었다. 사는 곳이 어디건 자신의 내면에 먼저 평화가 깃들어야 함을 나는 뒤늦게 배웠다. 부디 그러기를 소망한다. 다만 기사의 한 대목에서는 참 가슴이 저릿했다. 한 청년의 말이다. “한국 밖으로 나가서도 차별받을 거란 걸 알아요. 그치만 이곳에서 겪는 멸시보단 그게 그나마 나을 거 같아요.” 아찔했다. 어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2016. 2. 29.

탈스마트


1. 스마트폰을 없앴다. 폴더폰을 다시 쥐었다. 많이 불편했다. 7년의 습은 무서운 것이었다. 두 달 째. 아직도 적응은 안됐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2. 비슷한 시기에 두 작품이 개봉했다. 둘 모두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일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참혹에 접근하는 이들 각자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누구나가 아픔을 품고 산다. 나 역시 내 몫의 상처와 함께 산다. 누군가 내 상처를 극화하고 싶다한다면, 나는 원치 않을 것이다. 내 상처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설득에 끝내 넘겼다하더라도, 매끈하거나 낱낱하게 그려지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의 태도에 관해 말했다. 더 거들고 싶지 않다.